1. 개요
成始伯 ( 1905년 ~ 1950년, 향년 45세)북한 황해도 출신 간첩.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다. 대한민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남파 간첩이다. # 스파이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김일성이 회고하기로는 노인 변장을 해서 성시백인 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2. 생애
1905년 황해도 평산군 출신으로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상하이로 망명,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산하 첩보 조직의 지역 총수로 활약하는 가운데 딩샹밍(丁向明, 정향명)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국민당 장제스의 직계로 활약하던 국부군 후쭝난 장군의 막료로 침투하여, 국민당 통치하의 서안지구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심지어 성시백이 조선인인 것 조차 주변 중국인들에게 완벽하게 숨겼다. 이런 간첩으로서의 인상적인 활약상으로 중국 총리을 지낸 저우언라이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이후 김일성에게 좋은(?) 인재로 소개해준다.[1]1935년 충칭시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옌안으로 갔다가 다시 충칭으로 이동했다. 옌안과 충칭, 공산당의 근거지와 장제스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근거지를 오가면서 활동하면서 민족혁명당[2]에도 개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인맥을 쌓았다. 김구나 김구의 심복이었던 엄항섭, 한국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는 이범석과도 친분이 있었고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맹활약하는 김홍일과는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였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공산당 소속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독립운동가였기는 했다.
그러다가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성시백은 귀환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자답게 당연히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을 지내게 되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남로당이 남한 내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판이기는 했지만, 김일성은 경쟁계파인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던 남로당을 영 껄쩍지근하게 여겼고, 독자적인 정보망 구축을 위해서 당시 남한 우익인사들과 친분이 있던 성시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던 것이었다.
여하튼 1946년에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력을 이용해서 정항명이라는 가명을 그대로 쓰면서 남한 내 공작을 시작했고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 방문을 주선하고, 국군 대대장이었던 강태무와 표무원의 월북을 유도하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개입을 시도하는 등 1950년 초까지도 여러 공작을 진행해왔다가 1950년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사건으로 발각되어 같은 해 5월 15일 체포되었다. 다음달인 6월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 집행 대기 중 6.25 전쟁이 터지자 바로 처형됐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김일성은 하루빨리 성시백의 시신을 수습할 것을 명했지만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고, 애국렬사릉에 남조선혁명가 직함으로 안장된 가묘만이 북한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입장에선 위험인물이지만 북한에서는 전기 드라마가 제작되고 김일성이 직접 아들 이름을 지어주는 등 높게 평가되는 인물이다.
사후 공화국 영웅 1호를 추서 받았고, 아들 성세창은 조선사회민주당 참사, 성자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