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7:37:59

설철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설서영(薛曙影)·설갑수(薛甲秀)[1]·설갑진(薛甲璡)
자 / 호 맹원(孟元) / 융산(融山)
본관 순창 설씨[2]
출생 1914년 6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부내면 동정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정동)
사망 1981년 8월 26일
경상남도 창원시
학력 창원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 졸업)
묘소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자하연 분당추모공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독립유공자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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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새미래민주당 소속 설훈 의원의 부친이다.

2. 생애

설철수는 1914년 6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부내면 동정리(현 창원시 의창구 동정동)에서 아버지 설중조(薛仲祚, 1893. 2. 17 ~ ?. 6. 18)와 어머니 김해 김씨(1891. 12. 22 ~ 1920. 9. 20)[3]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창원공립보통학교(현 창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에 재학 중, 동교생들과 함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관한 서적을 통해 민족주의사상을 연구하면서 항일독립의식을 키웠다.

1934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4년 9월 삼동공립보통학교(현 울산 삼동초등학교) 훈도로 임명되었다. 그는 삼동공립보통학교에서 6학년 역사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며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서로의 장래 행복을 위해 각오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후 통영군 통영읍 조일정(현 통영시 태평동)으로 이주한 그는 1938년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統營第一公立尋常小學校)에서도 또한 훈도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8년 12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 받았다. 1939년 11월 가출옥했지만 일본 장학관의 방해로 복직하지 못했고, 8.15 광복 후인 1951년에서야 창녕군 남지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1973년 2월 마산공업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

1981년 8월 26일 창원시에서 별세했다.

3. 독립유공자 서훈

설철수는 당시의 재판 기록과 판결문이 소장되어 있던 대구형무소가 6.25 전쟁 때 불타 버리는 바람에 소실되어 버렸고 부산지방법원에 소장되어 있던 재판기록도 일본군이 철수할 때 불태웠기에 입증자료 부족으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러다 1998년 국가보훈처에 보관중이던 '신분장지문원지'에서 같은 죄목으로 처벌된 '설갑수(薛甲秀)'란 인물의 본적과 생년월일이 설철수와 일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밝혀졌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설철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39년 형사사건부에는 이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2] 참의공파 61세 진(鎭) 항렬. 족보명 설진철(薛鎭哲). [3] 김도서(金道瑞)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