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1 23:52:06

설억만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12년 5월 28일
충청남도 회덕군 외남면 대동리
(現 대전광역시 동구 대동 99번지[1])
사망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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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2년 5월 28일 충청남도 회덕군 외남면 대동리(現 대전광역시 동구 대동 99번지)에서 태어났다.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現 대전삼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중퇴하였다.

1932년 4월부터 신문배달부로 취업하여 일했고, 그해 6월에는 대전군 외남면 외천리(現 대전광역시 동구 천동) 인단산(仁丹山)[2]에서 정창세(鄭昌世)와 신문배달부로 일하던 이삼봉(李三奉)· 김지성(金知成)과 만나 정창세의 지도하에 신문배달반을 조직했다. 이때 이삼봉은 신문배달반 책임자, 김지성은 재정부원에 선임되었다.

1932년 7월 말에는 인단산에서 이삼봉·김지성 등과 함께 한종식(韓宗植)을 만나 한종식이 신문배달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것을 들었고, 한종식으로부터 소련의 실제 예시를 들으며 좌익 성향의 팸플릿을 구독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매진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후 8월에 신문배달반은 해산되었고, 8월 중순 대전군 대전읍 본정3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 정병원의 집에서 박병기(朴炳琪)·김지성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필요한 이론 전술 연구를 기획하는 신문배달반을 새로 조직했다. 이때 책임자는 박병기, 재정부원은 김지성이 맡았으며, 설억만 자신은 교양부원에 선임되었다. 이 반원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 회의를 할 것, 매달 30원씩 회비로 납부할 것, 평소에도 공산주의 연구에 힘쓸 것 등의 지침을 정했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대전군 대전읍 본정2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에 있던 '대동고무상회'에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다가 11월 9일 김지성의 집에서 박병기가 원종응(元鍾應)·김지성·이삼봉과 함께 등사판을 사용해 인쇄한 '동지들이여. 동지의 싸움은 어느 정도까지 승리했다.…‥'라는 선동 삐라 1,500장을 박병기로부터 건네받았고, 같은 날 대전군 대전읍 본정3정목 대전군제제사공장(大田郡是製絲工場) 내에 살포했다.

이후 체포되었고,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1937년 6월 26일 동아일보 기사에 장남 설병문(薛炳文, 1931년생)이 1937년 6월 23일 오후 1시에 같은 마을에 사는 김환걸(金桓杰)[3]과 함께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읍 본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원동)에 있던 대전철도기관구 용수지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다가 아들 설병문은 생환하고 설병문의 친구 김환걸은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1] 이 지번에는 현재 대신새들뫼휴먼시아1단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2] 2018년 9월 7일 대전광역시 동구청 지명위원회 심의 의결을 통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이유로 비학산(飛鶴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단(= 은단) 광고판이 이 산에 있었다고 해서 인단산으로 불린 것이라 한다. [3] 김동일(金東一)의 셋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