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 흥선대원군, 유림 세력들이 극도로 반대하던 서원 철폐 정책을 강행하고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書院撤廢
조선 왕조 말기에 흥선대원군(집권 1864년 - 1873년)의 주도하에 조선 양반 및 유림들의 학당(學堂)인 전국의 서원들을 강제로 철폐한 일. 서원 철폐령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서폐령(書廢令)이라고도 한다.
2. 상세
본래 서원은 조선 왕조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조들을 배향하며 충효예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유림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꼽힌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학교 및 대학원급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충효예의 교육과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 그리고 유교의 전통성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초기의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 양성/충효예 교육/선현의 배향 등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신분제도가 고착화되고 붕당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가문/ 학연/ 지연/사제관계에 관계된 온갖 비리가 난무하게 되었고, 선현 배향 문제도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등의 폐단이 심해졌으며[1]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제사비용 징수 등의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 막장이 되어 버렸다. 탈세와 군역회피는 당연히 따라붙었다.
이 문제가 조정까지 전해지면서 숙종 조(재위 1674년 - 1720년)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 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화되기도 했다. 영조 시절에는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에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낙인찍혀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졌다.
그러다가 1864년 고종(재위 1863년 - 1907년)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 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병폐/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아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1865년에 이르자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포함하여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다.[2]
서원의 폐단은 안동 김씨조차 동의할 수준으로 심각했으며 일단 유생들도 그 도를 넘은 수준의 폐단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흥선대원군의 주장에 전혀 반박할 수 없었는데 특히 대원군의 조치가 서원을 아예 조선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라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으로 영락한 서원들을 위주로 골라 철폐하고 일부는 남기겠다는 방침이라 서원 철폐=성현 모욕이라는 논리도 펼치지 못했다.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면서 철폐 반대소를 꾸짖자 사그라들었고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가시적인 서원 반대소가 올라오지 않게 됐다. 특히 불도저 같은 성격이였던 흥선대원군의 성격상 소를 올린다고 마음을 물리칠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죽이거나 유배보내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서원 철폐를 막아 달라는 유생들의 불만이 상소로 올라오기는 힘들었다.
야사에 따르면 유림들이 한강에 몰려들어 통곡했고, 그걸 본 흥선대원군이 유림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받았는지 "진실로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더 강하게 서원 철폐를 강행했다고 하지만, 실제론 흥선대원군의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들의 반응은 표면상으로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소를 올리지도 못하게 된 유림들의 대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흥선 대원군의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을 만들어서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다.[3] 그러나 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히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만을 존치하도록 하였으며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하도록 하였고 퇴출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1870년 9월에는 사액서원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문제가 있다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고종은 집권 8년인 1871년에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왜 있느냐?"라면서 확실시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위와 명분에 유림 세력이 굴복하긴 했어도 서원을 600개나 닫아 버린 대원군의 강단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 반대파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서원을 마구잡이로 닫아버린 것의 폐단이 심하다고 비판했다. 대원군이 실작하자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달라는 요청은 하지 않았고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이나 만동묘 같은 상징적인 서원들 위주로 복구를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 주고 나머지 서원에 대한 복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만동묘도 관아의 통제 하에 두고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써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이 "너희는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더냐?"라고 비꼬았다. 결국 상소는 시들해졌고 유림 세력도 영향력을 잃으면서 서원 복구 움직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현지 유력자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서원들이 복구되기도 했다. 사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나주시의 미천서원(眉泉書院)처럼 흥선대원군 생전인 1892년에 복원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파괴로 사라졌고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복원되기도 했지만 6.25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었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북한 쪽으로 넘어간 서원들은 관광지화시킨 세 곳[4]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많다. 현대에도 서원은 80개 정도로 늘어났는데 이는 유림들이 복원했거나 복원을 추진 중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