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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제6대 샤한샤
샤 사피 شاه صفی یک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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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
샤 사피 / 삼 미르자 شاه صفی / سام میرزا Shah Safi / Sam Mirza |
출생 |
1611년 사파비 제국 이스파한 |
사망 |
1642년
5월 12일 (향년 31세) 사파비 제국 카샨 |
재위 기간 | 1629년 1월 29일 ~ 1642년 5월 12일 |
아버지 |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1] |
아들 | 아바스 2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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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파비 제국의 제6대 샤한샤.조부 아바스 1세를 계승하였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터라 국정을 소홀히 하였고,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에게 각각 바그다드와 칸다하르를 상실하며 아바스 대왕의 업적을 날려먹었다. 다만 조지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친정하여 예레반을 지켜내는 등 군사적 능력이 없지는 않았고 그가 방임한 내정 역시 유능한 재상 사루 타키가 안정적으로 관장한 덕에 나라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음주를 즐기던 사피는 31살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어린 아들인 아바스 2세가 계승하였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611년 아바스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와 조지아계 부인 딜라람 카눔의 아들로 태어나 삼 미르자라 불렸다. 1615년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는 부왕의 의심을 산 끝에 라슈트의 함맘에서 체르케스계 장군 베부드 베그에게 살해되었다. 아바스 1세는 이를 곧 후회하였고, 이후 차남 모하마드 미르자와 삼남 콜리 아마놀라의 경우 반역 혐의에도 죽이는 대신 실명시킨 후 투옥하는 데에 그쳤다. 1629년 1월 아바스 1세가 사망하자 남은 아들들 중에 정상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에 18세의 장손 사피가 계승하게 되었다.집권 후 사피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이들을 가차없이 숙청하였다. 우선 선대에 감금된 숙부들을 비롯한 왕자들과 선대의 주요 각료들 및 장군들을 대거 처형하였다. 1627년까지 후계자 가능성이 적었기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피는 국정 운영이나 문화, 학문 등의 분야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음주나 아편 흡입에 치중하였다. 다만 조부와 마찬가지로 담배만큼은 극혐하여 공공 장소에서 흡연하다 적발된 자는 입 안에 녹은 납을 부어 죽이게 하기도 하였다. 사피의 무능함을 틈타 오스만 제국은 이란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2.2. 연이은 전쟁
1624년 바그다드 점령 후 사파비 조의 우세로 진행되던 전쟁은 1626년 들어 소강 국면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1629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휴전을 체결한 무라드 4세는 대재상 가지 휘스레브 파샤를 이라크로 파견하였다. 진창이 되어 있던 이라크 대신 이란으로 직행한 휘스레브는 1630년 5월 마히다슈트 전투에서 사파비 군을 격파하고 하마단을 습격하였다. 이후 11월 바그다드로 남하하여 포위했으나 겨울 추위로 철수하였다. 이라크의 사파비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들을 제압하고 방어선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이후 양측의 소모전이 계소되자 사피는 오스만 조정에 강화 사절을 보냈으나 거절되었다. 그러던 1633년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이 사파비 조의 종주권을 거부하자 이듬해 사피는 조지아계 무슬림 개종자인 루스탐 칸에게 응징을 맡겼다. 카르틀리-카헤티 국왕 테이무라즈는 이메레티로 도주했으나, 1638년 카헤티 군주로 복위하였고 루스탐 칸의 중재로 사피에게서 책봉을 받았다. 1635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4세가 친정에 나서 예레반을 점령하고 타브리즈를 습격하였다. 이에 사피는 이듬해 반격에 나서 예레반을 수복하고 오스만 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사피는 재차 평화 협상에 나섰으나 거절되었고, 1638년 무라드가 재차 친정에 나서 한 달이 넘는 포위 끝에 그해 12월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이라크는 14년만에 오스만 제국 령으로 돌아갔고, 아바스 대왕의 최대 업적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무라드는 그제야 협상을 수용하였고, 1639년 5월 주하브 조약으로 양국은 16년간 지속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사파비 조의 동쪽 변경 역시 우즈벡 족과 튀르크멘의 침공으로 불안정하였다. 1638년에는 1622년 이래로 사파비 제국령이던 칸다하르의 총독 알리 마르단 칸이 지나친 납세 요구에 불만을 품고 도시를 무굴 제국에 넘겨버렸다. 칸다하르는 11년 후 사피의 후계자인 아바스 2세에 의해 재차 사파비 령으로 회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