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의 교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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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대한민국 보물 제1738호 | |
서울 살곶이 다리 서울 箭串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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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1동 58 |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
수량/면적 | 1기 / 10,618㎡ |
지정연도 | 2011년 12월 23일 |
제작시기 | 조선 세종 2년(1420), 성종 13년(1482) |
길이 | 76m[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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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fb9> 살곶이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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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곶이 다리는 중랑천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다리로, 전곶교( 箭 串 橋)라고도 불리며, 한양으로 드나드는 교통로에 있어서 당대의 주요 교량이었다. 특히 이 길목은 송파나루, 천호 방향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살곶이 다리가 세워졌다. 살곶이 다리는 길이 76m, 너비 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다.서울 살곶이 다리는 2011년 보물로 지정됐다.
2. 내용
2.1. 위치
살곶이 다리가 위치한 곳은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자리 부근인데, 현재 한양대학교에서도 내려다보면 여기가 바로 보인다.이곳에 다리를 놓게 된 계기는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뒤에 약 4년 간 유유자적하며 지내면서 낙천정과 풍양궁을 오가며 거처했는데, 이렇게 다니면서 중랑천을 편히 지나기 위해 다리의 설치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다리를 놓게 된 계기를 마련한 태종은 정작 살곶이 다리를 이용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역사 참조.
2.2. 명칭
살곶이 다리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나, 사실 제대로 된 이름은 '살곶이 다리'나 '전곶교'가 맞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한자 이름인 ‘箭串橋’는 ‘전관교’로 읽기 십상인데, 여기서는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2]'살곶'이라는 특이한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했다.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은 이곳 중랑천에서 맞이했는데,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다고 전해진다. 날아간 화살은 빗나가 땅에 꽂혔고, 그 이후로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화살꽂이'에서 '살꽂이'를 거쳐 ‘살곶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3]
2.3. 역사
1420년( 세종 2년) 5월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영의정부사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했으나, 정작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승하했다. 이곳을 자주 지나던 태종이 죽자 행차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인지, 공사는 일단 흐지부지됐다.하지만 여기는 한양으로 드나드는 교통로 상에 있는 주요한 지역이었고 매번 배로 중랑천을 건너는 것은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이 길목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 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1475년(성종 6년) 9월에 흐지부지 중단됐던 다리 공사를 재개하여 살곶이 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명했다. 하지만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다리를 놓는 것은 꽤나 난공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반영하듯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482년 한 승려가 살곶이 다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방법을 고안했고 이를 통해 다리가 완성되자, 임금이 완공을 치하하면서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실제 살곶이 다리의 완공은 그 이듬해인 1483년(성종 14년)에 했으며, 이후로는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 상의 주요 교량으로 잘 쓰여온 것으로 보인다.
살곶이 다리는 20세기 초반까지도 주요 교량으로 쓰여왔는데, 1913년에 들어서는 일제가 다리의 노후된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에 경성부 지방에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가 다리가 끊어져 버렸고, 이후 끊어진 상태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38년 5월에 살곶이 다리 옆에 아예 신식교량인 성동교가 새로 가설되자 기존의 물동량을 완전히 흡수해버렸고, 때문에 살곶이 다리는 1970년대까지 무너진 상태로 계속 방치됐다.
1972년에 들어서야 방치된 다리를 복원했지만, 이미 중랑천 하천의 폭이 조선시대보다 한참 넓어졌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 증설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본래 모양과 다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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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fb9> 성동교에서 의정부시 방면으로 찍은 살곶이다리와 한양대학교 |
2009년에 서울특별시 성동구에서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 다리 복원을 진행했다.
문화재청에서 1967년 살곶이 다리를 사적 제160호로 지정했었으나, 2011년 12월에 사적에서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재지정했다.[4]
3. 기타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살곶이다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 살곶이 다리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살곶이다리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전곶교
- 대한민국 구석구석: 서울 살곶이 다리
- 두산백과: 서울 살곶이 다리
5. 문화재청 소개글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전곶교 → 서울 살곶이 다리)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전곶교 → 서울 살곶이 다리)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