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대 국가안보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 Ви́ктор Абаку́мов | Viktor Abakum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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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빅토르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Виктор Семёнович Абакумов Viktor Semyonovich Abakum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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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4월 24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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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4년 12월 19일 (향년 46세) | ||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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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레바쇼프 기념 묘지 | ||
재임기간 | 국방인민위원회 스메르시 국장 | ||
1943년 4월 19일 ~ 1946년 5월 4일 | |||
제2대 국가안보장관 | |||
1946년 5월 4일 ~ 1951년 7월 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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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세묜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어머니 빅토리아 예프레모바 아바쿠모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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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타티아나 안드레예바 스미르노바[1] 안토니나 니콜라예브나 스미르노바[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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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이고르 빅토로비치 스미르노프[3] | ||
최종 계급 | 상장[A] | ||
주요 서훈[A] |
수보로프 훈장 1급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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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정치인. 스메르시 국장과 국가안보부(МГБ) 장관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기와 NKVD 경력 시작
1908년 4월 24일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립학교 4학년을 다니고 1921년부터 자원병과 임시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여러가지 일을 했다. 1927년 콤소몰에, 1930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콤소몰 기관에서 일하다 1932년 NKVD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38년 아바쿠모프는 NKVD의 부서장 직위까지 올라간다. 큰 키와 운동선수 같은 체격으로 자백을 얻어내는 물리적인 방법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941년 2월 3일 NKVD가 NKVD와 NKGB로 나뉘게 된다. 아바쿠모프는 베리야의 눈에 들어 NKVD의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고 7월 19일에 NKVD 특별부서 관리국 제3국의 수장으로 임명된다. 다음날인 7월 20일 NKVD와 NKGB가 다시 NKVD로 통합된다.
2.2. 스메르시 국장
아바쿠모프가 수장으로 있던 NKVD 제3국이 1943년 7월 스메르시로 개편되었다. 이로 인해 아바쿠모프는 국방 인민위원회 산하 스메르시 국장직에 올라 스탈린의 신임을 받으며 소련군내의 스파이와 반역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다.2.3. 국가안보부 장관
1946년 5월 스메르시가 해체되고 아바쿠모프는 국가안보부(МГБ, MGB)의 장관으로 임명된다.전후기간 동안 또다시 정치 군대 가리지않고 대규모 숙청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바쿠모프는 국가안보부 장관으로서 이 숙청들을 주도하게 된다.
아바쿠모프는 내무부(МВД, MVD)의 부서들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시도해 내무부 장관 세르게이 크루글로프와 차관 이반 세로프와도 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또한 아바쿠모프는 베리야를 포함해 고위층들의 약점을 수집하기 시작해 끝도없이 적을 만들게 된다. 정치국에서 아바쿠모프와 척을 안친 인물은 칼리닌뿐일 정도로 그에게 우호적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1949년 스탈린의 건강이 악화되자 스탈린의 신임밖에 믿을게 없었던 아바쿠모프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면서 즈다노프 파벌인 서기국원 알렉세이 쿠즈네초프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는데, 이로 인해 유일한 방패막인 스탈린의 신임마저 잃게된다.
2.4. 몰락과 최후
1951년 7월 12일 아바쿠모프는 유대인 의사들이 소련 지도자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독살 의사 사건'[6]의 조사를 방해했다는 시온주의 혐의 및 다양한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혐의가 터무니없는 점은 전후 숙청때 유대인 연예인 살인을 사주하고 유대계 조직을 탄압한 것이 바로 아바쿠모프라는 것이다.소련 정치국은 아바쿠모프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이 사건을 법원에 넘기기로 결정한다. 일부 소식통에 의하면 이 결정은 1946년부터 아바쿠모프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주도했다고한다.[7]
아내와 생후 4개월 된 아들과 함께 감옥에 수감된 아바쿠모프는 베리야에게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지만 베리야도 국가안보부 장관이 된 후로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자신에 대한 비리를 수집했다는 아바쿠모프에게 등을 돌린 뒤였다.[8]
온갖 고문에도 끝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으나 1954년 12월 19일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선고받고 선고 1시간 뒤 총살로 생을 마감한다.
3. 여담
-
아내와 아들은 살아남았고 결혼 전 성인 스미르노프로 다시 개명했다.
- 의외로 부하들에게는 친절했다. 스메르시 시절 아바쿠모프의 부하 장교들은 그가 더 많은 배급을 받게 해주고 병든 친척에게 방문할 수 있도록 개인 비행기까지 빌려줬다는 얘기를 하며 끝없이 미담을 늘어놓았다.
- 축구를 아주 좋아했고 축구팀 FC 디나모 모스크바를 자신의 팀처럼 여기고 응원했다. 어느날 중요한 경기에서 군대 출신 팀에게 패배하자 극대노해 사무실에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엄천난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디나모 모스크바의 레전드 콘스탄틴 베스코프가 특히 심하게 까였다고...
- 폭스트롯을 좋아했다.
- 여자를 좋아해 아내들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여자를 갈아치우고 다녔다.
- 서구를 동경했다. 집 곳곳에 미국 잡지가 있었고 그 잡지들을 따라해 세련되게 옷을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의 인테리어도 미국 잡지를 따라하고 미국 영화를 좋아하며 일주일에 3번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을 숨기지않고 말하고 다녔다. 집에 있는 물건의 절반은 독일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 서구권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며 소련의 모든 것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어느날은 독일에 있을때 독일에서 본 모든것을 열정적으로 찬양하듯이 말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긴걸까요?"라는 감탄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아바쿠모프는 그 얘기를 듣자 갑자기 정색하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강대하고 진보적이며 훌륭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과 우리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헌신을 기억하고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 자신을 성공하게 해준 스탈린도 매우 싫어했는데, 집에서 스탈린의 호출 전화를 받은 뒤 전화를 끊고 분노와 혐오를 숨기지 않으며 욕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도 아바쿠모프가 갈아치웠던 여자들 중 한명이 회고한 것이다.
[1]
혼인 신고를 안한 동거관계였다. 아바쿠모프가 안토니나를 만나고 버려졌다. 우연히도 안토니나와 똑같은 성씨다.
[2]
아바쿠모프와 같이 수감된 아내.
[3]
안토니나 소생
[A]
1955년 11월 14일 소련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법령에 의해 박탈.
[A]
[6]
이 사건으로 스탈린의 주치의를 포함한 의사들이 대규모 체포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대에 스탈린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공식 발표되며 체포된 의사들은 모두 복권되었다.
[7]
1946년 말렌코프는 전쟁 중에 결함있는 항공기를 보급했다고 고발당했고 해당 사건의 조사를 아바쿠모프가 맡게 된다. 조사결과 일부분이 사실로 밝혀졌고 말렌코프는 이로 인해 중앙위원회 비서직에서 해임당한다.
[8]
아이러니 하게도 베리야가 아바쿠모프보다 먼저 죽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