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white><colcolor=#dd0c39> 비톨트 필레츠키 Witold Pilec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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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5월 13일 | |
러시아 제국 올로네츠 현 올로네츠 | ||
사망 | 1948년 5월 25일 (향년 47세) | |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샤바 모코토프 교도소 | ||
국적 |
[[폴란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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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 |
학력 |
포츠난 대학교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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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폴란드군 | |
최종 계급 | 기병대위 | |
참전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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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내역 |
흰독수리 훈장(2006년) 오드로제니아 폴스키 훈장 공로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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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군인.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를 연합군에 알린 《비톨트 보고서》의 저자로 그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자진해서 입소하고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인 올로네츠에서 1901년에 출생했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은 쉴 새 없이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며, 제정 러시아 역시 이러한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그의 가문 역시 1864년 봉기에 참여했다가 올로네츠로 강제 이주당했다. 또한 그의 조부 역시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시베리아에 유배를 갔던 적이 있었으니 비톨트 필레츠키가 열렬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ZHP[1]라는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육군 병으로 종군했고,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에는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2.2. 폴란드 침공
1939년 8월 26일에 육군 기병 대위로 소집되어 프루시군[2] 소속의 육군 제19보병사단에 배치되었다. 갑작스러운 독일군의 기습으로 부대는 패퇴하여 동남쪽으로 후퇴했고 르부프[3]에서 제41보병사단에 재편성되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동쪽에서 공격한 소련군에 의해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해산되었다.2.3. 저항 활동
[4]
1939년 11월 9일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얀 브워다르키에비치(Jan Włodarkiewicz) 육군 소령 등과 함께 3명이서 폴란드 비밀군(Tajna Armia Polska)을 조직했다. 이 지하조직은 19,0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고, 1940년 민족연맹(Konfederacja Narodu)에 가입했으며 1941년, 폴란드 최대 지하조직인 국내군(Armia Krajowa)에 흡수되었다. 1940년 아우슈비츠에 위치한 대규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존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 이때까지 나치 독일이 대규모 수용소를 운영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절멸 캠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필레츠키 역시 단순한 노동수용소나 굴라크 정도로 인식하여 그곳에서 저항 조직을 양성하는 한편 첩보활동을 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해서 입소했다.
아우슈비츠에서 필레츠키가 입수한 각종 정보들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내군을 거쳐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영국 정부로까지 흘러들어갔다.[5] 오늘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잔인무도한 대량 학살의 규모를 대강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때 필레츠키가 보낸 정보 덕분이다. 하지만 필레츠키의 바람과 달리 폴란드 망명 정부와 영국은 군대 파견을 통한 아우슈비츠의 즉각적인 해방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으며[6] 한편 수용소 내에 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챈 게슈타포가 서서히 추적망을 좁혀옴에 따라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할 것을 결정하고 1943년 4월 26일 다른 저항조직원 두 명과 함께 아우슈비츠를 탈출했다. 지옥같은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저항군 내의 정보부에서 근무했으며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서방과 소련의 관망 속에 바르샤바 봉기는 진압으로 인해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필레츠키는 포로로 잡혀 종전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머무르게 되었다.
2.4. 이후
종전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신분을 위장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폴란드 본토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 1946년 무렵이 되면서 그의 신분이 위장된 것이 폴란드 공산당 측에 의해 밝혀지자 망명 정부는 그에게 서방으로 탈출할 것을 지시했지만 필레츠키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1947년에 체포되었다. 갖은 고문을 받은 필레츠키에게 서방측의 스파이 임무를 맡은 혐의와 암살 미수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이 언도되었고 1948년 5월 25일에 처형되었다. 필레츠키 본인은 이미 재판 이전에 죽음을 예감하여 아내에게"공산당이 보기에
아우슈비츠는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날 죽일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사형 직전 남긴 유언은 '폴란드 만세[7]비밧 폴스카라 읽는다.]'
였다고 한다.사형 직후 필레츠키의 유해는 사형터 인근의 공동묘지 어딘가에 매장되었으며 1990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그에게 혐의를 날조하여 사형을 언도한 이들 역시 기소되었으며[8] 그의 공적을 기려 폴란드 정부는 그에게 육군 대령 계급과 폴란드의 최고훈장 흰독수리 훈장을 2006년에 추서했다.
그의 이야기가 국방TV에서 방영했던 <제2차 세계대전 숨은 주역들> 1화에서 다뤄졌다.
3. 기타
- 스웨덴의 밴드 Sabaton이 그의 아우슈비츠 수감자 번호인 4859번(Inmate 4859)을 곡명으로 한 그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다.
- 필레츠키처럼 전후 공산화된 폴란드에 남아 반공 운동을 하던 국내군 장병들은 폴란드에서 저주받은 병사들(Żołnierze wyklęci)로 불린다. 저주받은 병사들을 포함한 폴란드의 반공 저항군은 소련과 폴란드 공산 정권의 토벌로 인해 1963년, 마지막 요원인 유제프 프란차크(Józef Franczak)가 사살되면서 전멸했고, 민주화 이후 매년 3월 1일이 2011년에 저주받은 병사 추모일로 제정되었다.
- < Hearts of Iron IV>에서는 No Step Back DLC 이후 폴란드 장군으로 추가되었다.
[1]
Związek Harcerstwa Polskiego. 영어로 번역하면 Polish Scouting Association. 물론
보이스카우트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2]
독일
동프로이센 지방을
폴란드어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3]
Lwów, 현재 우크라이나의
르비우이다.
[4]
머리에 뭐가 달린게 아니라 머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절대로 머리에 달린게 아니다.
[5]
물론 사람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로 라디오를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했다.
[6]
사실 이건 망명 정부와 영국군의 생각이 옳았다. 필레츠키는
공수부대 강습 이후 캠프 내 비밀 저항 조직들의 봉기를 통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폴란드까지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
[7]
Wiwat Polska,
[8]
단 다들 나이가 고령이라서 재판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이전에 이미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