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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보르 바소비치

유고슬라비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벨리보르 바소비치.jpg
<colbgcolor=#eee,#191919> 이름 벨리보르 바소비치
Велибор Васовић / Velibor Vasović
출생 193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포자레바츠
사망 2002년 3월 4일 (향년 62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베오그라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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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경력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FK 파르티잔 (1958~1963)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63)
FK 파르티잔 (1964~1966)
AFC 아약스 (1966~1971)
감독 FK 파르티잔 (1971~1973)
FK 프롤레테르 즈레냐닌 (1975)
앙제 SCO (1975~76)
파리 생제르맹 FC (1976~1977)
파리 생제르맹 FC (1978~1979)
자말렉 SC (1982~1983)
에트니코스 피라에우스 FC (1983)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86~1988)
AC 벨린초나 (1989)
국가대표 32경기 2골 ( 유고슬라비아 / 1961~1966)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클럽 경력2.3. 국가대표 경력2.4. 감독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타5. 수상
5.1. 선수
6.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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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축구선수 출신 감독.

AFC 아약스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다. FK 파르티잔 AFC 아약스 두 구단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평가받고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포자레바츠(Požarevac)에서 몬테네그로 출신 부부였던 세무사무소 직원 지보진 바소비치(Živojin Vasović)와 주부 옐카 라우셰비치(Jelka Laušević)의 9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4명의 형과 3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그의 누이 중 하나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바소비치가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941년 4월 나치 독일의 침공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분열로 바소비치의 아버지 지보진은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4년 동안 포로 생활을 보냈고 그의 형제들은 파르티잔 저항 운동에 합류했다. 포자레바츠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바소비치는 그의 가족을 따라 베오그라드로 이사갔는데, 1953년에 바소비치의 아버지 지보진이 으로 사망하여 바소비치의 외삼촌 다비데 라우셰비치가 누나의 가족을 데려오게 되었다. 마침 FK 파르티잔의 고위직이었던 외삼촌 덕분에 바소비치는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 중등 교육까지 마친 바소비치는 후에 베오그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 공부까지 배우게 됐지만, 공부 머리는 영 아니었는지 이를 게을리 하였고, 자기가 좋아하던 축구에 더 집중하였다.

2.2. 클럽 경력

1954년, 당시 15살이었던 바소비치는 축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었다. FK 파르티잔의 유스 코치였던 플로리얀 마테칼로(Florijan Matekalo)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고 그를 파르티잔 유스에 데려오게 된다. 유스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바소비치는 1958년, 18살에 1군으로 콜업하여 곧바로 데뷔를 하였다. 그 후 1962-63 시즌까지 4시즌을 주전으로 뛰면서 팀의 3연속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는데, 얼마 안 가 그들의 라이벌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논란의 이적을 하였다. 1986년에 인터뷰에서 이 당시의 일화를 회상하길,
나와 유수피 둘의 계약은 1963년 여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당시, 우리는 둘 다 FK 파르티잔의 핵심 멤버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이기도 했다. 내 삼촌 다비드 라우셰비치가 FK 파르티잔 이사진의 임원이었기 때문에 클럽의 수뇌들은 '유수피에게 많은 돈을 듬뿍 쥐어 줘서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겠다. 반면, 바소비치는 그의 삼촌인 다비드 라우셰비치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돈을 조금만 줘도 바소비치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물론, 나는 그럴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즉시 당시 내가 거주하던 도시의 반대 끝 편에 있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기술 감독인 아카 오브라도비치(Aca Obradović)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그저 그대로 그에게 '오브라도비치 감독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자금만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금을 긁어모아 내게 돈을 지불했다. 이 사실을 FK 파르티잔 사람들이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기겁을 했다. FK 파르티잔 회장이자 JNA 장군인 일리야 라다코비치(Ilija Radaković)는 곧바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내게 제의한 금액의 두 배를 주도록 승인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내게 전화와 편지로 연락을 시도하였고, 팬들 부추겨서 시위를 선도했다. 또한, 나는 살인위협도 받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시합하는 동안 나를 저격용 소총으로 암살하겠다는 JNA 장교 1명이 날 위협하는 편지를 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정식 경고문 같은 것인데, 심지어 암살자의 공식 이름, 거주지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기재 되어 있었다.
파일:Велибор Васовић.png
파르티잔의 주장

즈베즈다에서 6개월을 뛰고 곧바로 다시 FK 파르티잔으로 돌아왔다. 바소비치는 FK 파르티잔을 이끌고 1965-66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이끌었고,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역전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승전 직 후, 파르티잔의 주전 절반이 팀을 떠났고, 바소비치 또한 떠나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분데스리가 1860 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레알을 상대로 득점까지 터뜨릴 정도였던 바소비치의 공격 본능과 수비진의 리더다운 모습을 고평가 했으며, 아약스를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로 낙점했던 리누스 미헬스가 바소비치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자 바소비치는 AFC 아약스로 이적하였다.
파일:크라위프, 바소비치, 케이저르.jpg
요한 크루이프, 벨리보르 바소비치, 피트 케이저르

피트 케이저르 스야크 스바르트와 함께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바소비치는 뛰어난 리더십과 수비지휘능력 그리고 패싱력과 수비력을 겸한 토탈 풋볼 리베로로서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어린 선수들이 많았던 아약스에서 바소비치 자신의 위닝 멘탈리티를 주입했으며, 토탈 풋볼의 기둥 중 한명으로서도 요한 크루이프의 훌륭한 멘토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배리 훌쇼프와 뤼트 크롤, 호르스트 블랑켄부르크 등 어린 수비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훌쇼프는 바소비치와 함께 중앙 수비진을 이뤘으며, 크롤은 이때의 경험으로 나중에 리베로로 뛴 경험도 있다. 팀원들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는 선수였던 바소비치는 아약스의 주장 완장까지 차게 되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 된 것이었다. 아약스는 1970년대 빛나는 성공을 거둔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1966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정상을 노릴 만한 팀은 아니었다고 한다. 스바르트와 케이저르, 슈퍼루키 크루이프 등이 포진한 공격진은 분명 막강한 화력이었지만 수비진은 유럽 무대에서 통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평가였다. 그런 아약스에 합류해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 되어 팀의 수비를 이끌며 어린 수비수들의 멘토가 되어준 바소비치는 분명 구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용병이었다.

바소비치는 그들과 함께 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1968-69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득점을 했으나, 이번에도 1-4로 패하여 준우승으로 끝났다. 바소비치는 포기하지않고 팀을 또다시 1970-71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올렸고, 이번엔 주장 자격으로 파나티나이코스 FC를 2-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이 끝나고 미헬스는 FC 바르셀로나로 떠난 상황에 바소비치도 신생 구단이었던 파리 생제르맹 FC로 이적하길 원하였다. 하지만 고질적인 천식으로 인해, 바소비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은퇴를 선언했다.

2.3. 국가대표 경력

바소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국대에 1961년 데뷔하여 1966년까지 32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다만 메이저 대회에서는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1962년 월드컵 당시 바소비치가 엔트리에서 탈락하는바람에 참가를 못하였으며, 1964년 유럽선수권대회 1966년 월드컵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예선에서 탈락하여 참가를 못했다. 유로 1968은 바소비치가 해외로 이적하는 바람에 그대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게되어 아예 예선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2.4. 감독 경력

은퇴하고 곧바로 파르티잔으로 돌아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다만 선수 시절에 비하면 감독 경력은 그닥 좋지 못하였다. 파리 생제르맹 FC를 2시즌 지휘한 바 있다. 파르티잔의 라이벌인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1987-88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이 전부이다.

3. 플레이 스타일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리베로의 선두주자였다. 기본적인 수비력도 뛰어나지만 이탈리안 스타일의 전통적인 후방 수비수인 스위퍼랑은 거리가 멀었다. 뛰어난 볼 간수 능력과 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롱패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베켄바워와 함께 리베로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바소비치는 "난 미헬스와 함께 공격적인 수비를 창조해 낸 설계자다. 내가 맡은 부분은 오프사이드 반칙을 유도하거나 골을 넣기 위해 벽 가운데 서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경기장 위에서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훈련보다 100배는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아약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4. 기타

바소비치는 미르야나 프레라도비치(Mirjana Preradović)와 결혼하여 블라미디르(Vladimir, 1963~), 알렉산다르(Aleksandar,1968~)를 낳았는데, 벨리보르 바소비치는 후에 세르비아의 여배우인 브랑카 요리치(Branka Zorić)와 재혼하였다. 벨리보르 바소비치의 차남 알렉산다르는 장녀 타라를 2009년에, 둘째이자 장남 스테판을 2015년에 낳았다. 벨리보르 바소비치는 2002년에 심장마비로 향년 62세 사망하였다.

5. 수상

5.1. 선수

6. 감독

  •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1987-88

[1] 현재 국적으로 따지면 세르비아이다. [2] 스위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