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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백인명(白寅明) |
본관 | 수원 백씨[1] |
출생 | 1903년 12월 22일 |
평안북도 정주군 | |
사망 | 1981년 8월 10일 (향년 77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대치 은마아파트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1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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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선우혁은 그의 장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제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은 그의 5촌 당숙(堂叔)이다.
2. 생애
1903년 1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백내풍(白乃豐)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한 뒤, 1920년 3월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고향 정주군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동지들과 같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비밀리에 만주로 송금한 후, 같은 해 9월 초 다시 중국 봉천성 관전현(寬甸縣)[2]으로 가던 도중, 친구 김규진(金奎珍)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죄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 광둥성 광저우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강창제의 주선으로 흥사단과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흥사단원 및 한국독립당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다롄에서 다시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여 용산구 용산동2가에 본적을 두고 거주했다. 그 뒤 강남구 대치동에 대치 은마아파트가 준공되자 그곳으로 이주하였고, 1981년 8월 10일 그곳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8세. #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정주동산[3]에 안장되었으나, 1990년 10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