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49:58

반딧불이의 묘

반딧불의 묘에서 넘어옴
1. 개요2. 상세3. 미디어 믹스
3.1. 애니메이션3.2. 드라마3.3. 실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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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세이타, 세츠코 남매가 전쟁 중 겪는 피난 생활을 다룬 작품. 작가는 노사카 아키유키.

특히 애니메이션은 단순 완성도, 스토리적 밀도와 연출만 보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넘어 역대 애니메이션사에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영화의 묘사에 대한 논란이 있어 작품의 높은 작품성과는 별개로 국내에선 여타 지브리 작품들과는 달리 큰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다.[1]

2. 상세

소설은 1967년 잡지 올(all) 요미모노(オール讀物) 10월호에 게재해, 같은 시기에 발표한 단편 <아메리카 히지키(アメリカひじき)>와 함께 제58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국내에는 1980년대 초반, 2002년, 2003년, 2006년에 번역 출간했다.

내용은 사실상 작가 본인의 자전(自傳)으로 실제로 기아로 여동생을 잃은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덕에 원작 소설은 애니메이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내용보다는, 당시 기성세대에 대한 시니컬한 냉소주의가 더 강하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데뷔작 '에로 선생님들'은 포르노 감독을 주인공으로 욕망에 충실한 전후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소설은 이마무라 쇼헤이가 인류학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요컨대 냉소주의와 풍자, 골계미적 성격이 강한 작가.

소설 반딧불이의 묘는 굳이 예를 들자면 노벨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 양철북과 비슷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노사카 아키유키는 어린 시절 부모의 별거 및 이혼으로 인해 다른 집안에 입양되었다. 그런데 고베 공습으로 양아버지를 잃는다. 이어 피난을 간 후쿠이현에서 여동생을 영양실조로 잃었다. 이때 여동생을 구하지 못한 속죄를 위해 소설로 쓴 것.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죽었지만, 노사카 아키유키는 살아남아 방황하다 친아버지가 다시 거두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종의 참회록으로 쓴 소설이지만,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 속의 세이타는 상냥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면서 "여동생(1년 4개월)의 먹을 것을 뺏아먹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잔혹한 오빠였다. 여동생을 때려 뇌진탕을 일으키게 한 적도 있다. 소설을 쓰다 보니 일기를 공개하는 것 같아,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고 자신을 치장(미화)하는 거짓말을 했고 그래서 이 소설을 읽지 못한다. 또 이 소설로 돈을 벌고, 애니메이션화가 되어서 인세를 받는 것이 깊은 상처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애니메이션이 완성되고 마련한 시사회에서는 영화를 보다 감정이 북받쳐 도중에 퇴장한 일화가 있다.

노사카의 다른 단편 중에는 '고추잠자리'도 있다. 이게 일각에 도시전설처럼 와전되듯 알려진 " 카미카제 대원이 훈련기 몰고 자폭하려다 콕핏에 앉은 벌레를 보고 순간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아 적함까지 갈 남은 연료를 무인도 가는데 써서 무인도에 불시착한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름"이라는 일화의 원전이다.

해당 작가의 다른 서적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에 대한 논문에서, 작가는 전공투 출신이며, 천황제를 부정하는 신좌익계라고 분석한다. 반 미국, 혐 일본적인 사상적 전환을 가져 정치적 발언으로 이러한 소설을 연속으로 출간했다고 분석한다. #논문

노사카 아키유키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한 인물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의 일본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원고에서는 "이 나라에 전전(戰前)이 차츰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하다(この国に、戦前がひたひたと迫っていることは確かだろう)" 즉 일본이 과거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기 전처럼 사회 곳곳에서 우익들을 중심으로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군국주의를 부채질하고 이를 동조하는 움직임이 슬슬 일어나고 있다는 섬뜩한 경고까지 남겼다. # # # # # 그가 극우라고 잘못 알려져 김세완은 1990년대 후반, 유니텔 만화동호회에 이러한 글을 쓰기도 했다. 당시 "누이동생이 죽은 걸 미군 탓으로 여겼다"든지 "빵이나 서구풍 음식을 먹으면 굴욕"이라는 망언을 했다고 서술한 적도 있다.

여담으로 노사카 아키유키는 생전 성격이 불같아서 오랜 친구였던 오시마 나기사와 공식석상에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 10월 23일, 오시마가 자신의 결혼 30주년 파티를 열었을 때, 오시마는 단상에서 축사를 할 예정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를 깜빡 잊어버렸고, 노사카는 자신의 차례가 올때까지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술을 마시며 화를 삭히던 노사카는 결국 축사를 읽은 직후에 분이 안 풀렸는지 옆에 서있던 오시마의 왼쪽 뺨을 안경이 날아갈정도로 때렸다. 오시마도 곧바로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 노사카의 머리를 2번 때리며 응전했고(..) 이 장면은 고스란히 일본 방송에 보도 되었다. 해당영상 나중에 두 사람은 서로 반성문을 써서 보내고 화해했다. 이후 오시마의 아내의 코야마 아키코는 이 난투 소란에 대해, “사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교류가 깊어졌다”며 언급했다. 꽤 유명한 소동이라 일본 내에서 아직도 종종 언급된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일화 중에, 어느 날 딸이 학교 수업에서 반딧불이의 묘를 집필할 당시 저자의 심정을 답하라는 숙제를 받아왔다. 딸은 집에 돌아와서 노사카 아키유키에게 '당시에 어떤 기분이었어?'라고 물어보았고, 노사카 아키유키는 '마감에 쫓기느라 필사적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적은 딸은 다음날 선생님에게 오답이라고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노사카 아키유키의 큰 딸은 자신의 블로그 #를 통해 해당 에피소드가 사실무근이라고 부정하였으나, 해당 일화는 노사카 아키유키의 저서[2]에 수록된 내용으로, 큰딸이 아닌 작은딸과의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 #

3. 미디어 믹스

반딧불이의 묘는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 실사 드라마, 실사 영화 등 여러가지 장르로 미디어 믹스되었다. 그 중 1967년에 출판한 노사카 아키유키(1930-2015)의 단편 소설과 1988년에 개봉한 동명의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가장 유명하다.

3.1.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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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애니메이션은 원작 소설에서 일부를 생략하기는 하였지만 대사를 포함하여 원작을 시간순으로 거의 충실하게 옮겼다. 이에 비해 실사 드라마와 실사 영화는 각색이 많이 되었다.

3.2. 드라마

2005년에는 실사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3.3. 실사 영화

2008년에는 실사 영화로 제작되었다.


[1] 오히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경우 몇 십년이 지나도 인기가 높다. 오히려 다른 작품들이 지브리 작품이라고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2] わが桎梏の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