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여운형의 차녀이다.
2. 생애
1927년 8월 29일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였다. 이화여대를 다니다 중퇴했다. 존 리드 하지는 1945년 10월, 려연구과 려원구의 미국 국비유학을 주선하였으나 여운형은 이를 려연구와 려원구를 미국에서 인질로 잡으려는 속셈이라고 여겨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려연구의 주장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6년부터 려연구와 려원구 자매의 월북을 권유하고 있었고 일전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에게 미리 부탁도 해놨다고 한다. 그리고 두 자매에게 평양에 가서 김정숙에게 많이 배우라고 하는 등 김일성과 김정숙 찬양을 늘어놨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후빨성 조작이 아닐까 싶다.어쨌거나 1946년 7월 3일, 두 자매는 서울역에서 기차로 개성까지 가서 월북하였다. 잠시 김일성 집에서 지내던 두 자매는 몇달 후인 1947년 7월, 모스크바로 가서 7년간 유학하게 되는데, 유학 도중인 1947년 7월 19일, 아버지 여운형의 암살 소식을 듣게 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소련에서 인질로 잡힌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어쨌거나 1952년 9월에 북한에 돌아와 의주외국어대학에 교원으로 배치되었다. 장녀 려난구를 비롯한 나머지 여운형 일가도 월북하였다.
이후 평범한 교원으로 살았는데,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친일 성향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 남조선에 부유한 친척이 있는 잠재적 반동으로 백안시를 당했다고 한다.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외국어학원 영어교원으로 일하였고,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남편에겐 자신의 출세길 막는 장애물 취급당해서 이혼당하고 학생들이 생과부, 자본주의 사회였으면 국회의원은 했을 건데 교원 밖에 못하는 불쌍한 여자라고 동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1978년 11월, 김중린과 김정일, 김일성이 대남사업의 과거에 대해서 논의하던 중 여운형 이름이 나와서 김정일이 자기가 어릴 때 만난 려연구, 려원구 자매를 기억해냈다. 고영환은 이에 대해서 김정일의 후계 세습 과정에서 김정일이 어머니 김정숙과 연관이 있던 사람들을 데려와서 김정숙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설명했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여운형이 자신에게 자식들을 부탁했던 것을 그제야 기억하면서 얼른 그들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박병엽의 증언이다. 1979년 조국전선 서기국 부국장에 임명, 1981년 6월, 조국전선 서기국장으로 승진했으며 1982년 1월, 중앙선거위원에 위촉 2월에 최고인민회의 7기 대의원에 선출된다. 조국전선 대표단장으로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중국을 방문하였다. 1983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2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황장엽이 양형섭으로 교체됨에 따라 손성필과 함께 신임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83년 6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5년 2월, 량광일 장의위원,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 스위스, 동독, 폴란드, 몽골 등을 방문했다. 1986년 5월, 조국전선 서기국장에서 의장으로 승진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생일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1990년 8월, 임수경 석방투쟁 조선위원회 위원장 1991년 2월,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및 해외동포옹호추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91년 11월 25일, 45년 만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김일성이 여운형의 묘소부터 참배하라고 하였으나 려연구가 공적인 일로 서울에 가는 사적인 참배를 할 경황이 없다고 하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하지 않으면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예의도 없다고 욕할 것이라면서 무조건 가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 사후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을 썼는데 이는 2001년 남한에도 정발되었다.
그런대로 잘 지내다가 1996년 9월 28일 20시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001년, 동생 려원구가 밝힌 비화에 따르면,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친구집을 방문하던 중 대형트럭에 치여서 즉사했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려연구동지는 당의 위업을 높이 받들고 사회주의조국의 부강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동지는 국가최고주권기관과 통일전선기관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우리 당의 국가건설정책과 조국통일방침을 관철하는데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침으로써 인민대중중심의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를 공고발전시키며 조국통일위업을 촉진하는데 공헌하였다."라고 칭송하였다.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8년 4월 1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 김병식, 양형섭, 김중린, 김용순, 김복신, 장철, 윤기복, 류미영, 최기룡, 렴태준, 정두환, 백인준, 리몽호, 주성일, 최룡해, 최성숙, 백남준, 한시해, 강영섭, 박태호, 장재철, 박관오, 강관선.
4. 참고문헌
- 고영환, 평양 25시(서울: 고려원, 1992).
- 장영은, 가족의 초상 -정치인 부녀(父女)의 자서전적 글쓰기, 구보학집 29(2021.12).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