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박용수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1981년 5월 29일 ([age(1981-05-29)]세) |
학력 |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태권도학 / 학사) |
종목 | 태권도, 입식격투기 |
소속 | k1 |
신체 | 200cm, 110k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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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태권도 선수 출신인 입식격투기 선수이다. 태권도 헤비급 선수로 국가대표 상비군[1] 출신이다. 그가 상비군일 때의 국가대표는 문대성이었기 때문에 태권도 선수로서는 꽤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2006년, 최홍만이 국내에 K-1 붐을 불러오면서 씨름, 복싱, 유도, 검도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의 선수들이 너도나도 K-1으로 전향하게 되었는데 박용수 역시 이 시기에 맞추어 K-1에 데뷔하게 된다. 국내 선수 중에는 태권도 베이스로 격투기 무대에 뛰어든 선수가 드물었던 만큼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2. 전적
입식 전적 4승 9패 승률 30%- 주요 승 : 와타나베 다이스케, 리키 죠, 폴 랭거스, 유양래
- 주요 패 :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 무사시, 제롬 르 밴너, 우에하라 마코토, 랜디 김, 싱 자이딥, 윈 펭센, 루이스 페리
2006년 6월 3일, 서울GP에서 데뷔전을 가졌으며, 일본의 스모 선수 출신 파이터 리키 죠를 1라운드에 킥으로 KO시키며 첫승을 거두었다. 이어서 가라테 베이스의 파이터 와타나베 다이스케를 또다시 1라운드에 KO시키며 연승을 거두었고, 아프리카에서 열린 입식 대회에도 출전, 폴 랭거스를 상대로 다운을 뺏는 등 선전하며 TKO승을 거두었다.
이렇듯, K-1 데뷔 이후 3연승 3KO라는 화려한 성적을 냈고, 팬들과 언론은 크게 될 선수라며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07년 서울에서 열린 Khan 대회에서 무에타이 선수 출신인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과 맞붙었는데, 자신보다 20cm나 작고, 40kg 덜 나가[2]는 카오클라이를 상대로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연장 접전 끝에 체력 문제로 판정패했다. 그리고 그 후의 전적은 다음과 같다.
- VS 무사시 2라운드 KO패
- VS 제롬 르 밴너 1라운드 KO패
- VS 우에하라 마코토 4라운드 KO패
- VS 랜디 김 2라운드 KO패
- VS 마르신 로잘스키 3라운드 KO패
- VS 싱 자이딥 2라운드 KO패
3연승 후 7연패라는 충격과 공포의 성적을 냈다. 심지어 카오클라이와의 경기 이후론 전부 KO패다. 또한 대부분의 경기양상이 킥으로 공격→상대방이 막거나 피함→안면에 펀치 허용→떡실신이라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VS 무사시 전에서는 반칙 공격인 로우 블로를 1라운드에만 3번이나 하다가 2라운드에 실신 KO 당했고,[3] VS 밴너 전에서는 1라운드 54초 만에 KO 당했다.
이후 한동안 활동이 없어서 은퇴한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으나, 2012년 더 칸3 대회에서 오랜만에 복귀전을 가졌다. 상대는 신일본 킥복싱 랭킹 1위 출신인 유양래 선수였는데, 국내 입식 헤비급의 강자인 유양래에게 1라운드에 하이킥 KO승을 거두며 연패 사슬을 끊었다.[4]
2015년에는 Glory 20에 출전하여 농구 선수 출신의 루이스 페리와 경기를 가졌으나, 25초 만에 펀치 러쉬에 다운을 당하며 또 다시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
3. 파이팅 스타일과 평가
200cm, 110kg이라는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4번의 승리 모두가 KO인 만큼 거구에 걸맞은 파워도 갖추었다. 게다가 이 거구를 가지고도 태권도 국대답게 발차기는 정말 잘 한다. 그 근육질의 제롬 르 밴너 조차 로우킥을 맞고 순간적으로 휘청거렸을 정도이며, 윈 펭센과의 경기에서도 미들킥으로 상대의 허리를 빨갛게 부어오르게 만들었다. 4번의 승리 중 2번은 하이킥이며 나머지도 상대방이 킥 데미지가 쌓여 회복 못하여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뿐이다.국대 상비군까지 지낸 엘리트 선수 출신이라 WT 태권도로 상당히 오래 수련해서 그런지 태권도 시절의 습관이 좀처럼 바뀌질 않아 안면 가드가 매우 취약하다. 태권도의 경우 가드보단 회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슬리핑이나 백스텝 위주의 연습을 하게 되기 때문. 덕분에 상대방이 킥이 통하지 않는 근거리에서 인파이팅을 하다보면 클린치 빼고는 대응 방법이 전무하다. 그래서 패한 시합 대부분은 안면 펀치에 의한 KO패. 이 안면가드 문제는 데뷔 이후 10여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질 않았고, 상대방의 실력이 킥만으로 대응이 안될 땐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또한 복싱 스킬도 매우 부족해서 대부분의 공격이 킥으로 시작되었는데, 동작이 큰 킥을 펀치마냥 남발하다 보니 체력 문제도 발생했다. 오히려 킥은 상대에게 자신의 빈틈을 만들어주기에 양날의 검이다. 차라리 로우킥으로 치고 빠지고를 반복했음 어땠을까 한다.
박용수의 시합 패턴은 거의 일정했다.
- 처음에 원거리에서 거구의 긴 리치를 이용한 킥으로 갑작스럽게 공격
- 상대방은 대응하기 힘든 원거리에서 오는 갑작스런 킥공격에 당황하여 같이 킥을 하거나 일단 방어나 회피를 하며 견제
- 태권도 국가대표답게 상대방의 킥은 회피하면서 빠른 발차기로 계속 원거리에서 킥 공격
- 상대방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견제성 잽이나 킥을 간간히 날리지만 역시 백스텝이나 슬리핑으로 회피
- 상대방은 계속된 킥에 데미지가 쌓여 다운 혹은 접근하다가 카운터성 하이킥으로 KO.
- 상대방은 킥 몇방은 감수하며 가드를 단단히 굳히고 킥의 위력이 줄어드는 거리까지 파고들어 안면 위주로 펀치를 날리면 대응 못하고 KO 패배이다.
단순한 원패턴인지라 공략당하기 쉬웠던 셈. 이는 태권도 선수가 다른 입식 타격계 무술가에 패배하는 전형적인 장면을 보여준 셈인데, 사실 단일종목을 오래 수련한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 박용수가 뛰었던 K-1과 글로리는 태권도와는 전혀 다른 킥복싱 룰이었고, 킥복싱이 베이스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룰에 맞추어 스타일을 변환해야 했다.[5] 하지만 오랜 수련을 통해 몸에 기억된 습관이 쉽게 사라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K-1 데뷔 초에 거둔 3연승도 킥복싱 스타일로 싸우기보다는 태권도 특유의 스텝과 킥을 이용해 승리했다. 이때는 상대가 약했기에 어느 정도 통했지만, 무사시, 제롬 르 밴너 등 정상급 선수들을 만나자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다. 게다가 투포환 선수 출신인 랜디 김[6]에게까지 패배한 것을 보면 애초에 룰에 맞추어 개량되지 않는 무술은 격투기 무대에서 실용성이 없다는 걸 증명해준다.
한국에 K-1붐이 불 때, 수많이 엘리트 스포츠인[7]들이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었다가 얼마 못가 링을 떠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사실 박용수는 이런 스포츠인들 중에서는 꽤 오래 선수생활을 한 편이고 그나마 4차례 승리를 거두기라도 했다. 1승도 못 거두고 전패로 은퇴한 경우도 많다는 걸 감안하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그가 태권도에서 거둔 업적만 봐도 스포츠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K-1과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
더불어 타종목 엘리트 선수들이 격투기에 진출하면서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용수 또한 그런 평가가 많다. 일단 체형이 선수치고는 제법 푸짐하다. 헤비급 격투기의 경우 체중제한이 심하지 않으니 감량을 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로이 넬슨이나 마크 헌트 같은 경우), 박용수의 경우 근육량도 터무니없이 적어보였던 게 문제.
사실 피하지방의 경우 충격 흡수나, 체력, 지혈 등에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격투기에서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근육량이 적으면 그냥 체중이 더 나갈 뿐이니... 때문에 이걸 가지고도 "웨이트 트레이닝 안 하냐?", "목욕탕에서 흔히 보이는 몸으로 무슨 운동을 하냐?"라고 까였다. 더불어 복싱 스킬 또한 매우 부족하다. 초창기엔 K-1 특유의 서커스 매치에 맞게 급하게 전직하느라 그랬다쳐도 시간이 지나도 복싱 스킬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점은 2015년 무대까지 개선이 안된 걸 보면 아무래도 포기한 듯하다.
아무튼 엘리트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서 입식 무대에서 오래 뛰면서 격투기 팬들에게 나름 강한 인상을 남겼고, 격투기 커뮤니티에서는 태권도의 실전성을 논할 때 꼭 한 번쯤은 거론되는 선수가 되었다. 사실 한국의 태권도 인프라 덕분에 알게 모르게(?) 태권도 출신 격투가들이 많다. 해외의 경우라면 그냥 오래 수련한 것만으로도 베이스무술이나 경력에 넣지만 한국의 태권도는 반쯤 유아생활체육이 되어버렸기에 태권도 안해본 사람이 오히려 더 적을 정도이기 때문. 아마추어 선수층도 두꺼운 덕분에 지역대회나 전국대회 출전 정도로는 어디가서 경력자라고 쉽게 말하기 애매하기 때문에 보통은 전국대회 수상경력이나 국제대회 출전 경력 정도나 되어야 격투계에서 태권도 경력자라고 말하고 다닌다. 다만 올림픽 국가대표급 태권도선수 출신은 박용수가 유일무이하다.
4. 기타
- K-1에서 3연승을 거두던 시절에는 언론과 방송에서 엄청나게 띄워줬다. 카오클라이와의 경기 당시 한국 해설진도 "태권도의 실전성을 증명해준 선수"라거나, "태권도가 K-1에서 통할까하는 의문을 돌려차기 한방으로 풀어준 선수"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 3연승 후 7연패의 임팩트가 워낙 컸는지 격투 커뮤니티 내에서 자주 까이곤 했다.
- 한때 수원에서 '위너스 킥' 이라는 킥복싱 체육관을 운영했지만, # 소리소문 없이 폐업했다.
[1]
국가대표가 불가피한 이유로 출전을 못할 때를 대비한 후보 선수이다.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국가대표 선발전 2위라고 보면 된다.
[2]
경기 장소나 대전 상대를 보다시피 박용수에게 던져주는 떡밥에 가까웠다.
[3]
무사시가 쓰러진 박용수에게 달려들어 발로 밟는 등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다만 유양래 또한 공백이 길었다.
[5]
무사시와 싸울 당시 3개월 동안 가드를 올린 채 원 투만 연습했다고 할 정도로 복싱 스킬을 단련했지만 링 위에 오르자 마자 바로 주먹을 내리는 태권도 스탠스로 돌아갔다.
[6]
랜디 김 역시 별로 좋지 않은 기량을 보여 까였으나, 이후 작심하고 조쉬 바넷과 함께 훈련하는 등 최소 발전하는 모습은 보였으며 이후 지역 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할 정도로 기량이 많이 올라갔다. 훗날 그 유명한 구칸 사키와도 잠시 대등한 공방을 벌일 정도. 다만 결혼 후 은퇴했다.
[7]
천하장사 출신의
이태현이나 WBA 챔피언인 최용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