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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경옥(敬玉), 경욱 |
호 | 몽호(夢湖)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883년 10월 7일[2] |
충청도
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 (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3] 139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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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1년 9월 18일[4] |
충청남도 부여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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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3년 10월 7일 충청도 임천군 내동면 북구천리(現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 139번지)에서 아버지 문상국(文相國, ? ~ ?. 3. 15)과 어머니 밀양 박씨(? ~ ?. 2. 17)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 289번지로 이주했다.일찍이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5]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했고, 1920년 4월 총재 서일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국내에 잠입했다. 이후 서일의 비서역으로 있던 강철구(姜鐵求)· 김동진(金東鎭) 등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18촌 지간의 족제(族弟) 문장섭을 비롯한 박길화(朴吉和)· 김동순(金東純)· 김정제(金廷濟)·김도균(金道均)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서무부장 김택(金澤)에 전달했다.
1922년 10월 모든 독립공채를 처분할 수 있게 되자 강철구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 본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1년 9월 18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북고리에 안장되었다가 2014년 11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