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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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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2. 조선
2.1. 왕실2.2. 측근2.3. 조정2.4. 정적2.5. 기타
3. 일본4. 명5. 기타 1부 인물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1부의 등장인물들.
실존 인물

2. 조선

2.1. 왕실

조선 제11대 왕비
文定王后 문정왕후[A]
성렬인명문정왕후
聖烈仁明文定王后[A]
존호 성렬인명(聖烈仁明)[3]
시호 문정(文定)[A]
출생 1476년( 성종 7년) 12월 15일 (음력 11월 29일)
조선 한성부
사망 1537년(인종 31년) 5월 16일[B] (음력 4월 8일)
(60년 5개월 1일 / 22,081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6]
능묘 무릉(茂陵)
재위 조선 왕세자빈
1488년 2월 ~ 1495년 1월 25일
조선 왕비
1495년 1월 25일 ~ 1506년 11월 18일
조선 왕대비
1506년 11월 18일 ~ 1537년 5월 16일[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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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거창(居昌)
전호 □□전(□□殿)
부모 거창부원군 신승선, 중모현주 흥안부부인 이씨
부군 조선 무종
자녀 1남 2녀(첫째는 공주, 둘째는 인종, 셋째 공주는 요절 }}}}}}}}}
  • 중전 → 성렬왕대비 신씨
    폐비 신씨로 알려진 실존인물. 원 역사처럼 지극히 선한 마음씨를 가진 인물이다.[8] 재석 또한 연산군에게 물려받은 부인에 마음에 드는 외모가 아님에도[9] 그 선한 성품에 마음을 열고 중전 신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재석과의 사이에서 세자 이황을 낳았다. 재석이 사망한 뒤에는 왕대비로 대접받으며 살다가 자연사했다. 왕대비가 된 뒤에도 여전히 아랫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등 온후한 성품을 유지한다. 슬프게도 죽을 때까지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10] 재석도 2부에 경성군으로 환생한 후 상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신씨를 그리워하며 무릉에 성묘 간다는 핑계로 신씨의 무덤 곁에 가서 그리움을 토로하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성렬왕대비'라는 존호를 받는다. 3부에서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저승에 오자마자 사랑하던 남편을 찾았으나 저승에 올라온 연산군의 영혼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자 재석이 아닌 것을 알고 크게 상심했으며, 같은 처지인 장조 비 의인황후 김씨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재석의 영혼을 찾고 있다.
  • 인수대비
    재석이 진짜 할머니처럼 정이 들어 잘해드려서 이 세계에서는 손자바보가 되었다.[11] 순행을 나가는 재석을 배웅 나와 걱정해주고 재석이 매일 인사를 드리고 잔치도 자주 열어드리는 훈훈한 관계지만 재석이 왕권강화를 위해 성종의 후궁들과 다른 왕자들을 숙청하고 태종과 세조께서도 하신 일이었다는 패드립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 후 원 역사와 같은 날에 노환으로 사망한다. 원 역사보다는 원각사가 보존되는 등 수혜자다.
  • 자순대비
    인수대비가 사망한 후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버팀목이 되어 준다. 1부에서 재석이 사망한 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후계자 선정에서 자신의 친아들인 진성대군과 재석의 아들인 이황 중 한명을 선택해야 했다. 신수근, 박원종 등 무종의 총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자 황을, 사림들은 자신들과 교분을 맺은 진성대군을 지지했다. 진성대군의 나이가 적당하다는 명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왕대비의 친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려도 무방했다. 하지만 자순대비는 선왕의 친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고, 진성대군은 이황을 보필하는 종친으로 남겨서 왕실을 안정시키는 큰 결단을 하게 된다. 2부에서 재석은 자순대비가 참으로 훌륭한 결정을 하였다며 감탄했다.

    재석이 자순대비에게 예를 다했고, 성종의 후궁 소생 왕자들은 탄압했지만 진성대군에게는 친동생처럼 잘 대해줘서[12] 자순대비가 무종에게 특별히 맺힌 것도 없던 데다가, 무종의 총신들이 실권을 쥐고 있던 현실을 감안하면 섣불리 진성대군을 옹립했을 경우 큰 내전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13] 따라서 자순대비가 진성대군이 아닌 이황을 왕으로 선택한 이유가 왕실의 내전을 막기 위한 것도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재석도 이렇게 판단했다.[14] 대신 진성대군은 왕위를 양보한 대가로 왕실의 어른으로 존경받으며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호화롭게 살았고, 심지어 결국 진성대군의 증손자 경성군이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을 하는 기간이 제법 길었고, 박원종과 유순정 등이 사라진 이후에도 급격한 변화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현상유지는 계속했다고 하며, 신씨 부인이 진성대군의 아내에서 쫓겨나지 않아 부계로도 모계로도 모두 친척이다 보니 후대에도 화목한 관계가 지속된 덕분에 경성군으로 깨어난 재석은 이를 두고 자순대비가 원하던 것이 이뤄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제안대군
    원 역사처럼 아무런 야심 없이 풍류나 즐기면서 사는 한량으로 나온다. 실제 제안대군의 행동을 두고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한 연기인지 해석이 분분한데 작품에서는 진짜 한량으로 설정했다. 재석을 연회에 초청해서 장녹수를 소개해준다.
  • 휘숙옹주
    재석의 여동생. 남편 임숭재와 함께 재석의 술친구로 셋이 술 마시며 놀 때가 많았다. 진짜 여동생이 아니래도 법적인 여동생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휘숙옹주의 얼굴이 이쁘기도 해서 같이 끼고 논 것. 그러나 1부 막판에 누군가에 의해 원 역사에서처럼 재석이 휘숙옹주와 근친상간을 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퍼져 금위사에서 이를 수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사 도중 재석이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소문을 낸 당사자는 밝혀지지 않았다.[15]

2.2. 측근

  • 정호찬[16]
    가상인물. 본래 의금부 도사였다가 재석에게 발탁되어 정보부서인 금위사의 수장을 맡고 형조참판까지 오른다. 입도 무겁고 재석에게 절대 충성[17]하며 금위사장으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 역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대활약한다.[18] 재석이 암행을 나갈 때에도 자주 동행하며 연인인 상희의 존재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19] 다만 지나치게 우직한 면이 있어 역모와 관련이 없으면 백성들을 착취하는 악덕 상인들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을 알아도 권한이 없다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기도 한다.[20] 안타깝게도 막내 사위인 종성가가 일찍 전사하고 그 아들들도 병으로 일찍 죽었으니 말년이 편하지는 않았을듯하다. 재석과는 그야말로 서로 은혜를 입었다할 수 있다.[21] 여담으로 외모는 풍채가 좋고 수염이 길며, 금위사에서는 서릿발같이 냉혹하게 직무를 수행하나 사적으로는 매우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 부인과의 금슬이 매우 좋아 늘 부인과 같이 자며 딸이 셋이나 있으며 말년까지 첩을 하나도 들이지 않았다.[22] 한편 부하들에게도 좋은 상사였는데 무종의 명령대로 면신례를 철저하게 뿌리 뽑아서 금위사는 무종 사후에도 면신례가 없는 유일한 관청이라고 한다. 2부 시점에선 이미 고인이므로 과거 이야기할 때 잠깐 거론되는 정도였는데 3부에서 이 이름을 쓰는 자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재석의 측근인 건 같지만 본관은 연일 정씨이고 성격도 원판과는 다르게 능글맞다.
  • 고다지
    가상인물. 여자 백정 사냥꾼 출신이다. 여자에 백정 출신임에도 무예가 매우 뛰어나[23] 여러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운다. 원래는 성씨 없이 그냥 다지였으나 재석이 고씨 성을 내리고[24] 전속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닌다.[25][26] 매우 당돌한 성격이며 외모도 현대적 기준의 미녀에 가깝고 몸매도 좋다고 한다. 재석도 처음에는 다지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신분 차이가 너무 컸고 산 타고 말 타며 자유롭게 살던 다지를 궁궐에 가둬두는 것은 다지에게도 좋지 않다 생각하여 마음을 접는다. 재석의 중매로(둘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중매라기보다는 공개 허가이다) 이장곤과 결혼하게 된다.[27] 결혼 후 내금위에서는 은퇴하지만 이장곤과 함께 말을 달리며 데이트하고 자식도 많이 낳는 등 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경성군 집권 초기까지 장수한다. 말년에 이장곤이 사망한 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평생 전장에서 자신이 죽인 이들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현대가 되면 다지를 재석으로 장편 드라마 몇 개 정도는 나올지도... 1부에서 상희가 워낙 욕을 먹고 실패한 캐릭터라는 평가가 많은지라 어찌 보면 1부의 진 히로인이라 할 수 있다.[28]

    2부에서 양반가의 제사를 보고 싶다고 하는 코르나로 추기경과 교황청 사신단이 중전 김씨의 주선으로 다지의 제사를 참관하게 해줘서 재석이 죽어서도 도움을 준다고 감개무량해한다. 전쟁이 마무리 된 후 한양에 세워진 서양식 상설극장에서 외손녀인 중전이 직접 집필한 대본으로 그녀의 일대기인 고다지전이 공연되는데 양반, 백성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어서 후대에 영원불멸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 이장곤
    원 역사처럼 홍문관 교리를 지내다가 계해사화 때 연루되어 잡혀가지만 이장곤을 알아본 재석이 사면하고 북방으로 무관직을 주어 보낸다.[29] 여기서 고생하며 공을 세워 한양으로 복귀하고 재석의 총애를 받는다. 여진족 정탐 임무를 맡을 때 한양에서 파견 온 다지와 서로 호감을 갖게 되고, 그 후 부여주 개척, 대마도 정벌 등에서 다지와 함께 참전하면서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재석이 대신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다지와의 결혼을 명하여 짝지어준다. 문무겸전의 영웅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무종의 요절 후에도 인종을 보필하여 무종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게 지킨 공로가 컸다. 최종 관직은 나오지는 않았으나 다지가 정경부인으로 불린 것을 볼 때 1품 정승을 지낸 것은 확실하다. 사후에 정도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무묘에 배향되고, 그의 막내아들인 이영송이 영의정을 지내고 외손녀인 김씨가 왕후가 되는 등 가문도 크게 번창하였다.
  • 박원종
    재석이 미륵교 광신도들에게 암살당할 뻔 했을 때 암살자를 활로 쏘아 제압하여 목숨을 구한 것을 계기로 신임을 얻는다. 여기에 무장으로서 유능하고,[30] 재석이 처음 개발한 조총을 목숨을 걸고 테스트했으며, 조총 전문가가 되어서 조총수들을 훈련시킨다. 원래 역사에서는 중종반정을 주도하니 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재석이 측근으로 우대해주다 보니 엄청난 권신이 된다.[31]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성격이라서 일본이나 여진족 원정에서 발암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횡령을 심하게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32] 무종 사후에는 인종이 즉위했을 때 무종의 처남이자 인종의 외숙인 신수근, 원 역사의 반정 3대장이며 같은 공신인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권력을 틀어쥐며, 현실적으로 무종의 정책이 이어지는 편이 권력유지에 더 유리했기에 무종의 정책을 이어간다. 또 포경, 모피 교역에 진출하는 등 돈을 벌기 위해 횡령해서 모은 돈으로 상공업을 부흥시키는 등 결과적으로 그의 탐욕은 긍정적 효과를 잔뜩 불러일으켰다.[33] 무종 사후에는 권력을 더욱 강하게 쥐려는 욕망으로 자신의 조카를 중전으로 삼으려고 계획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 그 자리는 유순정의 손녀의 차지가 되며 무공이 많음에도 평판이 워낙 나빠서 유순정과 달리 무묘에 배향되지 못한다. 또 박원종의 포경 및 모피 교역 회사는 서자 박웅이 물려받았으나 박원종이 생전에 적을 워낙 많이 두었기에 곧 부정이 탄로 나서 내수사에 몰수된다. 재석에게는 참 고마운 측근이었지만 역사적 평가는 원 역사랑 크게 다르지 않게 나쁠 것으로 보인다.
  • 임사홍
    현실주의적 성향이었던 것을 기억한 재석에 의해 중용된다. 권력을 위해 아들을 희생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 임희재는 원 역사처럼 무오사화 때 연루되어서 조사를 받았는데, 원래는 무릉도에 유배형을 보내야 했으나 재석이 특별히 사면해줬다. 그런데 또다시 사림과 붙어서 재석을 씹다가 계해사화 때 잡혀왔다. 재석은 임사홍의 다른 아들이던 임숭재가 재석의 여동생 휘숙옹주의 남편에 재석의 술친구이기도 해서 임사홍이 용서해달라고만 한다면 임희재는 지난번에 사면 받았던 유배형을 이번에 보내는 셈치고 살려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임사홍이 강력히 처벌할 것을 주장해서 임희재는 결국 사형당했다. 이 모습을 본 재석은 절대 상종하지 말고 토사구팽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후 능력이 워낙 출중해 병조판서로 중용된다. 재석에게 충성하고 유능하지만 싸이코패스 급으로 잔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2부, 3부에서 간간히 언급되기로는 공신으로 대접받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다만, 신수근, 남곤 등과 달리 잔혹한 행보들 때문에 후세의 평가가 좋지 않다고.
  • 신수근
    중전 신씨의 오빠로 재석에게는 손위처남. 대간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 전에 재석의 적극적인 개혁 및 팽창 정책이 가진 명분상 허점이나 현실성을 지적하면서 재석이 이를 보완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재석은 '악마의 변호인'이라고 생각하며 껄끄러워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이고 중전의 오빠여서 끝까지 중용한다. 작중에서는 중종반정이 없어서 죽지 않았다.[34] 무종 사후에는 무종의 죽음의 비밀을 숨기고[35] 수습을 맡아 왕실 위신의 추락을 막는 공을 세우며 외조카인 인종 이황을 보좌했다. 이후에도 80세까지 장수하면서 정국을 주도, 무종이 쌓아올린 업적을 지켜냈다. 사실상 무종에 의한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이며 재석에게도 숨겨진 최고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세의 평가도 매우 좋게 남을 것이며 가문도 번창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때 정국을 같이 주도하던 같은 공신들이 바로 원 역사의 중종반정의 3대장들이었다. 원 역사에서 신수근을 살해하는 중종반정의 주역들과 신수근이 변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한 배를 타게 된 셈.
  • 유순정
    무종의 총신 중 한 명. 규슈 원정 등의 대외정벌에서 크게 활약한다. 규슈 원정 중에는 이장곤과 다지가 서로 썸타는 걸 눈치채고 다지가 전장에 나가지 않게 배려도 해줬다. 무종 사후에도 일기도, 대마도를 침공한 쇼니씨를 격퇴하는 공을 세운다.[36] 원 역사에서는 박원종과 더불어 반정 3대장이라 불린 이후 탐욕스럽게 변한 것과 달리 둘째 손녀가 무종의 아들 인종의 중전이 되었고[37] 평판이 워낙 좋아서 같은 공신이며 호적수격인 박원종을 제치고[38] 손녀가 중전이 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사림 중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이지만 무종에게 충성했고 규슈의 쇼니 씨를 정벌하는 원정군 총대장이 되어 큰 승리를 거두고 많은 쇼니군 포로를 잡아오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있는 편이었기에 중용되었음과 동시에 유순정의 손녀를 중전으로 삼는 것은 인종이 사림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39] 박원종, 성희안, 신수근과 함께 군공공신으로서 권력을 장악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40] 무종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가는 현상유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원종이 병으로 죽고 둘째 손녀가 중전이 되면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바로 다음해에 사망, 무묘에 배향되었다.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원 역사와 달리 큰 군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원 역사 못지않게 누릴 만큼 누리고 아예 중전의 외조부가 된데다 명예를 잃지 않고 무묘에까지 배향되는 등 사실상 무종에 의한 최고 수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유자광
    재석의 측근 중 하나이자 재석을 위해 더러운 일은 다 맡아서 한다. 명나라에 조총의 존재가 알려져서 바쳐야 할 때, 강선이 없는 조총을 바치자고 제안해 재석의 고민을 덜어줬다. 능력도 제법 뛰어난 편이고 재석에게 적극 충성하여 재석도 끝까지 중용한다. 이후 조정의 중신으로 잘 먹고 잘 살다가 간다. 다만 이 세계에서도 간신으로 욕먹는 건 똑같다고 한다.

2.3. 조정

  • 남곤
    여진족 정벌할 때 종사관으로 종군. 박원종의 휘하에 있으면서 물자 출납을 철저히 기록해 노획물 등을 못 빼돌리게 막는다. 다른 사람에게 박원종의 횡령에 대해 듣고는 "주상도 그걸 아시냐?"고 물으니 "높은 분들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라는 대답을 듣고, 박원종을 제거할 순 없지만 횡령은 못하게 견제하려고 자신을 보낸 것이라 짐작하고 더욱 충실히 관리한다. 이 때문에 박원종이 보복으로 미끼 임무에 내보내 같이 투입된 이장곤과 죽을 고생을 한다.[41] 부여주가 생기고는 부병마사로 임명된다. 동청례가 까막눈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업무를 총괄하며, 명나라와의 국경협상에도 대표로 나선다. 그러면서 주상이 하는 일이 원성은 많이 사지만, 분명 나라에는 도움이 되고, 절대 성군은 못 되겠지만 태종이나 세조 같은 명군은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일을 적극 돕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별 언급은 없지만 실제보다 일찍 죽은 게 아니라면 인종조의 중신이 되어 사림파 숙청의 주역이라는 오명 쓸 일도 없이 무종의 정책기조가 이어지는 걸 도왔을 듯하다.
  • 유담년
    재석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아이누인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를 느껴서 북해도로 가게 된 탐해사. 1차 탐험에서 아이누인들과 접촉해서 교역을 하는 것에 성공하자 승진한다. 활쏘기 대회에서 1등을 한 자신이 2등을 한 박원종에 비해 특별히 못나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박원종은 도성에서 지내면서도 승진을 잘만 하는 것에 비해 자신은 혹한을 견디면서 일하는 것에 다소 불만스러워 하며[42] 2차 탐험에는 더 좋은 성과를 내어 박원종을 앞지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탐험에서 아이누어를 통역할 수 있는 일본인을 납치해오고 아이누인을 데려옴으로써 명을 완수했고 말린 해삼과 해달 모피를 얻어와서 제법 좋은 결과를 내었다. 이후에도 북해도 탐해사로 여러번 임명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계속 추위에 떨면서 일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43]
  • 김처선
    내관으로 재석을 따라다니면서 보좌한다. 주로 재석이 중전을 공주님 안기를 하거나 체통 없는 행동을 할 때 태클을 거는 역할. 재석이 지나치게 전쟁광스러운 면모를 보이자 전쟁을 그만하라고 간언을 하며 듣지 않자 일부러 사냥에 나선 재석의 앞에서 수풀 속에 숨어 총에 맞고 죽는다. 왕좌에 앉아서 전쟁하라고 명령만 내리는 재석에게 '매일같이 만나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갑자기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려고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유서가 발견되었으나 재석은 읽어보지 않고 불태운다. 그래도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는지 내심 후회하며 전쟁은 방어전만 하기로 결심했으니 그의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사냥 중의 '사고'로 죽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신하들은 임금이 바른 말을 하는 김처선을 총으로 쏴 죽였다고 생각한다. 4부 시점에 가서도 재석이 100여년의 삶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내관 중 하나로 기억한다.
  • 내관 아저씨
    김처선의 전임자로 재석이 처음 빙의하자마자 만난 인물. 빙의라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의심한 재석이 라면을 달라던가 이성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던가 해서 크게 당황한다.[44] 빙의한 재석을 계속 모시다 몇 년 후 사망한다. 4부 시점에서 재석이 100여년의 삶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내관 중 하나이긴 한데, 하도 오래돼서 도저히 이름이 기억나지를 않는다며 안타까워한다. 본명이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애초에 이름 설정이 없었을 듯.
  • 박헌
    포도청 포교로 홍길동 패거리에 신분을 숨기고 잠입 수사를 하여 홍길동 패거리를 일망타진하는 공로를 올린다. 보고서를 읽은 재석이 이거 완전히 신세계 무간도를 보는 거 같다고 감탄했을 정도. 욕심 없이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수사관으로, 홍길동과 숙의 홍씨의 커넥션을 함께 수사하던 정호찬도 능력을 인정해 금위사에 스카우트 제의를 건네고 혹하긴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금위사의 살벌한 면모와 종친을 상대하는데도 정호찬이 거침없이 수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 배후에 있는 인물의 존재감에 두려움을 느껴 고사한다. 그러나 계해사화 때 뛰어난 수사력을 보인게 재석의 눈에 들었고, 금위사에 수사 조직을 만들어주면서 결국 의금부로 전속된다. 대를 이어 수사관이 된 그의 증손자 박희성은 2부에서 금위사장에 오르게 된다.
  • 김완구
    정읍 현감. 탐관오리로 정읍에 부임하자 공납하는 차의 양을 3배나 올린다. 이때는 차를 재배하지 않아 산에서 야생 차나무를 찾은 뒤 잎을 뜯어야 하는데 공납 양을 늘리니 백성들이 차나무를 찾아 산 속에 깊숙이 들어가다 호환을 당하고 그렇다니 차를 바치지 않으면 매 맞고 재산을 빼앗기고 만다. 이런 방법으로 늘린 차의 대부분을 조정의 중신들에게 뇌물로 바치다가 정읍으로 행차하는 재석이 정읍의 백성의 격쟁으로 김완구의 악행을 알자 겸사복장을 시켜 그를 체포한 뒤 봉고파직을 선고한다.
  • 장호석
    선전관. 재석이 정호찬을 만나기 이전 암행을 나갈 때 호위를 맡던 인물. 암행 시에는 속에 납을 부어 굳힌 대금을 무기로 쓰며 이걸로 왈패들을 순식간에 때려눕힌다. 1부 초반에는 암행 장면마다 꼬박꼬박 등장했으나 1부 중반에 지방에 사또 자리를 맡아 떠나는 것으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 박성근
    군기시 야장. 증기기관을 만들겠다는 재석의 계획에 그야말로 갈려나간다. 증기기관 개발이 늦어지자 빡친 재석이 그 이유를 묻자 "지금이라도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이라고 말하니 재석이 "변명은 죄악이란 걸 알고 있겠지!"라고 갈구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고 의아해한다. 사실 관련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쥐어짜내 결국 증기기관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여 기술 우위를 달성하고 이후 생에서 재석도 마냥 공밀레하긴 야장들에게 미안함이 들었는지 과다하게 실적을 강요하진 않는다. 증기기관의 프로토타입을 만든 공로로 3부에서도 박성근의 공밀레 설화가 있을 정도.
  • 김병천
    다지가 처음 등장한 백정 사냥대회에서 재석에게 칭찬받은 또 다른 백정 사냥꾼. 쇠뇌와 조총이 특기인 다지와 다르게 창과 도끼를 주로 사용한다. 본래 이름은 성 없이 그냥 병천이었으나 대마도 정벌에 투입되어 공을 세우고 다지를 포함한 다른 백정들과 함께 성을 하사받아 김병천이 된다.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유담년의 북해도 탐해사에 동행한다. 임금이랑 암행도 다니고 양반가 마님까지 된 다지와 다르게 비중이 적다. 그래도 그의 후손은 포수대장이 되는등 나름 출세했다.

2.4. 정적

  • 배목인(裵目仁)[45]
    전라도 구례에 근거한 사이비 교주로 자신이 미륵이라고 칭하고 있다. 말기 당뇨로 인해 혈뇨가 나온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실제로는 신부전증이지만)라며 지금 임금을 죽이면 자신이 임금이 될 것이라 망상하여 재석을 두 차례나 암살하려 한다.[46] 그러나 상희의 활약으로 일당이 붙잡혀 다 같이 처형당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역모로 인해 재석은 이후 미륵신앙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를 갖게 된다.
  • 홍길동
    충청도에서 악명을 떨친 서자 출신 도적으로 한동안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 충청감영에서 위장 잠입시킨 포교 박헌이 1년 동안의 정보를 보내고 이를 바탕으로 추격을 하자 결국 붙잡힌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로 4살 꼬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는 잔인무도한 도적. 붙잡힌 후 홍씨 일가 관계자들은 줄줄이 붙잡혀가게 되며 홍길동 본인도 처형된다. 죽기 직전까지도 재석에게 자기 능력을 보았을 테니 외국으로 보내주면 나라를 세우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등 배짱 하나는 대단하다. 홍길동 사건을 계기로 재석은 서얼금고법을 무력화하게 된다. 또한 홍길동을 비호한 홍길동의 조카이자 성종의 후궁인 홍씨와 그 소생 왕자들을 엄벌하면서 철권통치를 강화한다. 연산군의 폭정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미화가 되지 않아 허균은 소설 재석 이름으로 홍길동 대신 홍희동을 쓴다.
  • 윤필상
    훈구파 대신의 원로였지만 재석의 급진적 진보 개혁에 불만을 품다 대마도 정벌 이후 공신전을 손볼려하자 폐위시킬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자신처럼 불만을 가진 훈구파, 억압을 받던 사림파, 성종의 후궁 소생 왕자들까지 끌어모았으나 결국 금위사에 들켜 이세좌를 시작으로 계해사화가 터져 본인은 참수되고 만다. 원 역사에서 연산군에게 죽은 건 동일하나 복권된 원 역사와 달리 역사에 반역자라는 틀을 평생 쓰게 되었다.
  • 이세좌
    재석의 통치에 사석에서 불만을 토로하던 사대부들 중 한 명. 이 사실은 금위사를 통해 재석에 전해졌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던 재석은 연회에서 이세좌에게 커다란 사발을 주고 술을 따라 줘서, 다 못 마시고 흘린 걸 빌미삼아 하옥시킨다. 여기까지는 주변에선 그냥 혼 좀 나고 말줄 알았지만, 재석의 목적은 사림 숙청이었기에 함께 이세좌는 금위사의 심문을 받아 같이 뒷담화하던 사대부들을 불었고 결국 계해사화의 시발점이 된다. 관련 인사들을 모두 실토한 대가로 연좌에서 제외되어 아들들이 귀양가는 선에서 끝났고, 참형 대신 스스로 목을 매 시신을 보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재석은 사림 숙청의 명분이 필요할 뿐 폐비 윤씨의 일은 아무 감정 없지만, 세간에선 무종이 생모의 복수로 이세좌를 죽인 것으로 여기고, 수십년 후 바다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을 정도다.
  • 숙의 홍씨
    성종의 후궁. 서숙 홍길동이 체포되었을 때 자식들이 연루되었음에도 자신이 선왕의 후궁이니 절대 건드릴 리 없다고 생각하여 '엄마만 믿으라.'며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재석이 원래부터 홍씨 일가를 숙청할 계획이었기에 이는 역효과를 불러 아들 견성군은 사사당하고 다른 아들들은 유배를 가는 등 집안이 몰락한다. 원래 재석은 홍씨도 죽일 생각이었으나 반대가 심해 시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해사화에 연루되어 후궁 직책을 박탈당하고 자신도 유배된다.

2.5. 기타

  • 장녹수
    연산군의 애인인 그 장녹수 맞다. 여기에선 제안대군의 초대를 받고 잔치에 참석한 재석 앞에서 가무를 공연하며 처음 등장한다. 재석이 첫 눈에 반할 뻔했지만 장녹수임을 알고는 경계하면서 이후에는 그냥 궁에서 잔치를 열 때 초대가수 형태로 부르기만 한다. 장녹수도 재석을 유혹하려 하지만 끝까지 넘어가지 않아서 포기한 채 그냥 무희 신분으로 남는다. 재석이 사망한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지만 재석이 권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그냥 황진이처럼 유명한 가수로 살다 무난하게 삶을 마쳤을 듯. 여담으로 나이에 비해 동안인 것과 별개로 현대 기준으로는 미녀인데 당시 조선 기준으로는 추녀인 듯하다.[47]
  • 폴쇄
    재석의 애마. 내수사 자금으로 명에서 구입해온 한혈마다. 상희와 데이트할 때 꼭 타고 나가는 등 자주 등장하며, 폴쇄(乶鎖, 회령부 행영 볼하진을 막아 지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그 포르쉐. 재석이 2부에서 본 기록에 따르면 재석이 죽은 이후에는 아무도 탈 수 없었고, 안장 지우는 것까진 괜찮은데 누가 타기만 하면 날뛰어서 떨어트렸다고 한다. 박원종이 탔다가 허리 부러질 뻔한 뒤로 아무도 못 탔고, 주인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면서 대비가 된 신씨가 매일 갈기를 빗으로 빗어줬다고 한다. 무종을 전설로 만든 일화 중 하나인 듯. 2부에서는 패라리(覇懶吏, 최고로 게으른 관리)라는 누르하치가 선물한 말이 이 포지션을 잇는다. 패라리가 늙어 죽은 후로는 뱀배(㖱杯)라는 오이라트에서 선물한 한혈마가 재석의 애마가 된다. 재석의 말에 따르면 폴쇄는 간혹 난폭했고 패라리는 애교가 많았으며 뱀배는 순하고 얌전하다고.
  • 황주댁
    재석이 상희에게 내려준 관노로 상희의 가족 같은 존재. 상희가 여자임을[48] 알게 된 뒤에도 나리라고 부르며 상희를 엄마처럼 잘 돌봐준다. 1부 결말 직전에 금위사의 끄나풀이었음이 밝혀진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불명이며 이로 인해 재석이 죽기 전 정호찬을 불신하게 되어버린다.[49] 재석 사후, 정호찬 집에 상희와 들어가 상희가 난산으로 죽기 전까지 돌봐주었다고 한다.

3. 일본

  • 종성순(소 모리노부)[50]
    대마도주 종재성(소 키모리)의 장남. 재석의 대마도 정벌 이후 동생 종성가와 함께 조선에 볼모로 잡혀와 내금위 군사로 복무하게 된다. 본명은 종의성이었으나 이때 종성순으로 개명당하며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 것에 분노한다.[51] 조선에 협조적이고 조선인 아내(정호찬의 막내딸)까지 맞은 동생과 달리 재석을 평화로운 대마도를 침략한 악당으로 여기고 있다. 부친 종재성이 쇼니 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자 이를 조선 임금이 대마도의 모든 군사력을 빼간 탓이라고 원망한다. 규슈 정벌 때도 야인 기병들이 규슈 민간인들을 약탈·학살·강간하는 것을 보고 조선 임금이 동포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며 원한을 더더욱 쌓는다. 게다가 친하게 지내던 미륵교 노승[52]을 왕이 역적으로 몰아 의금부에서 잡아가고, 자신 대신 동생 종성가를 대마도주로 임명한 것에 폭발하여 술 마시고 궁 수문장으로 근무하던중...암행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온 재석을 칼로 베어 죽인다. 궁으로 돌아온 재석을 보고서 무단침입을 한다며 갑자기 칼을 빼드는데, 술기운을 풍기긴 하나 눈빛은 제정신이라는 묘사로 보아 술기운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왕을 알아보고도 벤 모양. 재석이 뺀질나게 암행을 다닌지라 내금위 병사들은 왕을 다 알아봤고, 일을 저지른 직후 본인도 그 자리에서 척살되었다. 이 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어 당시 비변사에 소집된 고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종은 병으로 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3] 이 인물에게 죽은 트라우마로 2부에서 재석은 외출 때마다 반드시 옷 안에 갑옷을 입고 호위를 대동하여 다닌다고 하며 일본인과 단둘이 있는 상황은 피하려고 한다. 상희 역시 왜란에 친정을 나가는 재석을 말리기도 한다. 종성순이 벌인 암살 이후, 2부에서 재석은 남에게 원한을 살 일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부주의함에 무종 시대를 너무 일찍 끝내버린것을 무척 아까워하며, 정적은 반드시 처리하고 자신의 편은 최대한 늘리려 한다.
  • 종성가(宗盛家, 소 모리이에)
    대마도주 종재성의 차남. 형 종성순과 함께 조선에 볼모로 잡혀와 내금위에 복무하게 된다. 형과 달리 조선에 협조적인 태도이며 붙임성이 좋고 인정이 있는 성격이다. 정호찬의 막내딸과 혼인했다. 종성순보다 종성가가 도주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한 재석에 의해 대마도주로 임명된다. 인종 3년에 쇼니 스케모토가 대마도를 침공했을 때 맞서싸우다 전사한다. 아들 둘을 두었지만 모두 요절해서 대마도주 지위는 숙부인 종우마의 후손에게 넘어간다.
  • 쇼니 스케모토
    규슈의 영주로 쇼니 가문의 16대 당주. 어린 나이에 당주에 올라서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조선 영토인 대마도를 공격해서 도주 종재성을 살해하고 섬을 점령하지만 조선의 보복 원정으로 졸렬한 지휘를 펼쳐 대패하여 병력 대부분을 잃고 영토도 초토화된다. 인종 3년에 다시 대마도와 일기도를 공격하지만 이때에도 실패한다.
  • 스에 오키후사
    박원종으로부터 조총과 야포의 설명을 듣고 전장에서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감탄함과 동시에 이에 대해 분석을 한다.
  • 오우치 요시오키
    규슈의 영주로 오우치 가문의 당주. 조상이 백제 왕자 임성태자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과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조선의 보복원정 때 조선군과 동맹하여 쇼니 가문을 격파하고 조선과의 무역 이권을 크게 가져간다. 그러나 조선군의 화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조선군을 견제하고자 조선군 화약고 일부를 폭파시키는 등 사보타주를 벌인다.
  • 동고로
    도호쿠 지방과 북해도를 오가던 일본 상선의 선원. 성도 없고 이름이 고로(다섯째)인 가난한 천민으로 아이누어와 한자를 할 줄 아는 통역 역할이었다. 유담년이 북해도를 탐험하러 갔을 때 아이누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 때문에 유담년에게 납치당해 조선으로 끌려온다. 이후 일본에서 별 볼일 없는 선원으로 사느니 조선에서 결혼도 하고 벼슬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도호쿠 방언 통역관이 되기로 하였고 재석에게 동씨 성을 하사받는다. 이후 2부부터 4부에 이르기까지 동고로의 후손들은 크게 번성해서 통역, 외교, 무역 등에 종사하는 것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4부에서 재석은 그의 후손인 동씨 가문은 아마 자신이 빙의하면서 가장 팔자를 고친 가문이라고 평하기도 한다.[54]

4.

  • 효종 홍치제 주우탱
    만주에 있던 한인농민들을 통해 조선이 새로운 병기를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조총을 조공하도록 하여 다운그레이드판 활강조총을 얻게 된다. 황궁 뜰에서 벌인 시연에서 그 성능에 감탄하여 복제를 지시하고 조공으로 받은 총과 이를 복제한 총으로 몽골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린 뒤 조선에 모든 조공을 조총으로 바꾸도록 한다. 명에서 복제한 조총이 다운그레이드판 활강조총보다도 성능이 훨씬 떨어졌기 때문. 이 지시 덕에 재석은 조총 생산 설비도 늘리고 명과의 해상 교역로도 얻는 이익을 본다. 조선에 부여주와 연해주를 할양하는 정계 회담이 진행되던 도중 사망한다. 원 역사대로 후궁을 들이지 않았기에 재석이 후궁 좀 더 들이라는 잔소리에 핑계로 이용하기도 한다.
  • 무종 정덕제 주후조
    홍치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2부에서 재석은 이 사람도 무종이라는 묘호를 얻었기 때문에 만일 자신이 좀 더 오래 살았으면 무종 묘호를 얻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 김보(金輔)
    홍치제가 보낸 칙사의 정사로 조선 출신 환관이다. 명나라에서 출세한 덕분에 10여 년 전(성종시기) 사망한 부친인 김순복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고, 아들과 조카들도 벼슬생활을 했다. 조선으로부터 견본을 받아 복제한 조총이 북원과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보인 것에 만족한 홍치제가 성능문제를 일으킨 복제품을 대신하여 조공으로 바치는 조총의 수량을 늘리면 이외의 조공물량을 줄이거나 면제하겠다는 명을 전달하고자 조선을 방문한다.
  • 장위덕
    계급은 참장으로 북원과 전쟁하던 명군의 치중대 지휘관으로 있었다. 2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군량과 마초를 실은 2백여 대를 이끌고 이동하며 소수의 기병들을 모두 주변 척후로 보낸 상황에서 1천여 명의 북원 기병대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척후의 보고를 받자마자 차분하게 지시를 내리며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던 신형병기인 조총[55]으로 무장한 1500명을 송나라 병서 속 노궁부대 배치를 원용하여 3열로 배치시키고 보급 수레를 늘어세워 방벽을 형성하며 나머지 방패수들을 수레 틈과 양 측면으로 배치하여 방어진을 형성한다. 휘하 병력이 정예병인데다가 북원 병력이 해를 등진 상황에서 말이 일으킨 먼지를 더해 시야를 가리고자 서쪽으로만 진격하고 서풍이 불어 조총 사격으로 생긴 매연을 치우는 유리한 상황 덕분에 십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100여명의 북원 병력을 사살, 군마 30여필 노획, 포로 17명을 얻은 대전과를 세운다.

5. 기타 1부 인물

  • 동청례(童淸禮)
    부친은 야인 오도리 부족의 귀족, 모친은 조선인인 혼혈인으로 오도리 부족 내에서 세력이 큰 귀족이며 조선에 충성하는 친 조선파 야인의 대표격이다. 재석이 크게 신임하고 부여주 개척에 앞장서게 하며 본인도 재석의 신임에 충성으로 보답하여 초대 부여주 병마사로 임명된다.[56] 원 역사에서는 중종반정때 능지형을 당했지만 여기에서는 무종에 의한 수혜 덕분에 사후에도 오도리 부족은 조선에 충성하며 조선군의 기병 전력의 상당수를 담당하고 있다. 심지어 2부에서는 오도리 기병들로 스페인 장인들이 만든 흉갑과 김지가 만든 플린트락 권총으로 무장한 퀴레시어를 편성하여 전투에 투입할 정도. 물론 조선 조정도 오도리 부족은 그만큼 많이 챙겨주고 있다. 오도리 부족은 왜인여진과 더불어서 계속해서 전쟁에서 조선 측으로 큰 공을 세우고 있기에 앞으로도 특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금산적하
    1부 시기 내내 조선을 괴롭힌 여진족 추장. 조선에 7촌 아저씨와 아들 5명을 잃은 원한으로 조선을 연달아 약탈했으나 이장곤에게 사로잡혀 거제도로 유배된다.
  • 석호랑
    북해도 아이누인. 조선이 보낸 북해도 탐사대가 그동안 아이누인들을 등쳐먹던 일본인들을 일방적으로 박살내는 것을 보고 조선으로 공부하러 가기를 결심한다. 본명은 호로케우라고 하며 재석이 석씨 성과 호랑이라는 이름을 내렸다.[57] 한국어와 학문을 배운 뒤 북해도로 돌아가서 반왜 아이누 연합을 만들려다가 일본인들과 싸우던 중 전사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조선에서 벼슬을 산다.[58]


[A]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성렬왕대비 문정왕후에 대응해서 추정. [A] [3] 성렬은 원 역사 성렬왕대비 문정왕후의 존호로 나머지 두 글자는 여기에 대응해서 추정. 원 역사에서 중전 시절 존호인 제인원덕(齊仁元德)은 1505년 받은 것으로 작중 존호 묘사 없음. [A] [B]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와 동일하게 추정. [6] 작중 묘사 없음. 추정. [B] [8]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와 그 자식들의 반역 사건 때 그들을 살려달라고 빌기까지 했었다. [9] 조선시대 기준으로 미인이어서 재석 눈에 그렇게 예쁘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보다보면 제법 괜찮은 외모인 듯. [10] 재석의 말인 폴쇄를 직접 돌볼 정도였다. [11] 특히 불교를 탄압하던 아들 성종과 달리 손자인 무종은 불교를 옹호하진 않아도 방치하는 수준이라 탄압하진 않았기에 독실한 불교신자인 인수대비의 마음이 편해진 것도 있다. 또한 인수대비가 아플 때, 원각사에서 불공을 하기도 했는데 신하들은 처음에 반대하나 "과인은 불교를 신봉하지 않으나, 대비마마께서 믿으시니 하는 것이고, 효를 위한 것이며 차후에 이런 일 없을테니 양해해달라."라고 하자 효를 위한 것이라며 이렇게까지 양해를 구하자 납득하고 넘어간다. 성균관은 무종에 대한 반감으로 반발하나 간관들은 불교를 신봉하지 않고, 방치하는 재석의 성향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 자순대비 앞에서 진성대군을 죽일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한 적은 있지만 그 이후로는 진성대군이 무종을 보고 겁먹을 때 대놓고 "너는 대군이니 일개 군들과는 다르다."라며 특별대우를 강조하는 등 높이 대우해줬다. 당장 후궁 소생들은 진짜 동생으로도 취급하지 않고 한갓 후궁 소생이라고 비하하지만 중전 소생인 진성대군은 비록 어머니는 다르더라도 자신의 진짜 동생이라고 강조하며 사적인 장소에서는 신이라고 칭하지 말고 소제라고 칭하라고 하면서 동복동생으로 취급하며 대우해준 덕분에 작중 잘 묘사되지는 않아도 대군이라는 점에서 자순대비의 생존, 그리고 무종의 비호로 왕족 중에서 위상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고, 무종도 외로운 탓에 진성대군과 형제로서 좀 더 가까워지길 바랐다. 당장 나뭇갓을 왕족들에게 몰수할 때, 대군들은 자식에게 세습할 수는 없어도 이를 몰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진성대군을 친형제라 언급하며 신료들 앞에서도 적통 대군과 나머지가 어떻게 같냐고 구분했다. [13] 이렇게 된다면 무종의 총신들은 세자라는 명분과 정통성까지 있는 인종을 내세워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가 무종에 의해 강화되어 조총과 화포까지 보유하고 있는 군사에 무관들을 잘 대우해준 성향까지 합쳐지면 세자라는 명분이 있는 이상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간 불안을 품은 무종의 총신들과 무관들에 의해 바로 끌어내려지고 역적으로 몰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세자라는 명분은 조선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편이다. [14] 이 덕분에 무종의 총신들이 폭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무종이 펼쳐놓은 정책을 이어가는 현상유지에 만족했다. 대신 박원종이 상업적으로 이득을 챙기기는 했지만, 이것은 재석도 오히려 칭찬해줄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으니 좋게 된 셈. 특히 총신들끼리도 서로 협력관계면서도 어느 정도 견제가 되는 구도가 되었지, 한 명의 권신이 장악하는 구조가 아닌 덕분도 있었으며 운 좋게 독보적 최고 권력자가 될 뻔한 유순정이 박원종의 뒤를 이어서 중전의 외조부가 된지 1년 만에 병사하는 등 행운도 겹쳐졌다. [15] 작가의 말에 의하면 배목인 패거리 잔당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16] 슈타인호프 작가의 소설에는 꼭 정호찬이라는 이름의 가상인물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 지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17] 재석이 죽은 뒤에도 손자 정일한(=사실은 재석과 상희의 손자)에게 무종은 백성들을 아낀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늘 말해주었다고 한다. [18] 재석이 잘은 모르지만 주워들은 소련·나치·일제 등의 심문 기법을 대강 알려줬더니 이를 직접 죄수들에게 실습해보며 습득해서 수백 년을 앞서가는 심문의 달인이 된다. [19] 무종에 대한 충성이 깊고 상희와도 좋은 사이여서 재석이 죽은 뒤 기밀누설로 사형당할 수 있음에도 상희에게 재석의 죽음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상희가 난산으로 죽기 전까지 잘 돌봐주고, 재석과 상희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해 승지까지 오를 정도로 잘 키워준다. 참고로 딸 셋의 아버지라 행동거지에서 티가 나서 남장여자란 것을 금방 눈치챘는데, 재석은 이미 아는줄 알아서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뒤늦게 알아채고 정호찬을 추궁한 재석은 바보가 되었다(...). [20] 그러나 정보는 철저하게 수집해서, 정보를 건네받고 수사에 나선 한성부와 포도청이 금위사를 견제하려고 다른 건수를 찾아내려고 했으나 삽질만 했다. [21] 재석에게 발탁되지 않았다면 출세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관리 중 하나로 남았을 것이고 재석 역시 정호찬이 없었다면 배목인이나 계해사화 등 역모로 살해되거나 폐위되었을 것이고 재석과 상희의 아들은 신분이 들켜 살해당하거나 천민고아로 비참하게 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2] 말년에 들인 첩은 상희와 그녀가 임신한 재석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첩이라고 위장한 것이다. 상희는 잠시 정호찬의 집에 지낸 적이 있어 부인과도 아는 사이니, 정호찬이 아내에게만은 어느 정도라도 사정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을 것이다. 절대로 상희를 NTR한 게 아니다. [23] 사냥꾼 시절에는 일부러 가죽 값을 잘 받기 위해 짐승의 눈알을 노려 쏠 정도로 활솜씨가 좋았고 조총을 얻은 뒤에는 몇 차례 전란에서 원샷원킬의 무쌍을 펼친다. 사격 솜씨 외에도 덩치도 작은 편이라는데 남자 한둘은 가볍게 때려눕힐 정도로 몸싸움도 잘한다. [24] 재석이 '꽃다지'가 연상되는 고다지로 운을 맞추기 위해 고씨를 택했다. 대마도 정벌에서 다지와 함께 공을 세운 다른 백정들 중 몇 명도 함께 성을 받았다. [25] 이 덕분에 고향에선 양반들도 다지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딸이 왕의 지근에 있다고 위세를 부렸다간 왕이 집안을 풍비박산 낼 거라는 걸 다지도 잘 알기에 절대 위세 부리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가족들도 오만한 성격이 아니라서 문제가 될 처신은 하지 않았다. [26] 백정에 여자임에도 내금위에 들이는 것에 별 반발이 없었던 이유는 신하들이 보기에는 그저 임금이 미녀를 가까이 두고 싶어서 군복을 입혀 데리고 다니는 괴상한 취미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 사실 진짜 이유는 재석의 신뢰도 있지만 다지가 상희는 왜 남장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는데(본인이 여성이고 명사수답게 눈썰미가 좋아서 눈치챈 것으로 보인다) 당황한 재석이 술술 불어버렸다는 것. 그나마 미래 얘기까지 떠벌리진 않았고, 재석은 입을 막으려고 지근에 두고 있다. 2부에서 보면 재석이 죽은 뒤에도 칠십대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것 같다. [27] 재석은 원자 황이가 혼인할 나이가 되면 이장곤과 다지 사이에서 낳은 딸과 짝지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백정 여자가 양반가 부인이 된 것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그 딸이 중전이 된다면 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능력 위주 사회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 비록 이른 죽음으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다지의 외손녀가 중전이 되었다. [28] 중반부터 등장하고 가상 인물임에도 캐릭터성도 성공적이고 인기캐릭터여서 2부에서는 캐릭터 성을 일부 계승한 다지의 외손녀가 중전으로 등장한다.(다지가 양반집 딸인 버전이라 보면 된다.) [29] 이장곤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순 없으니 명분상으로는 원래는 처벌해야 하지만 그를 추천해준 이극균의 체면을 보아 북방에 좌천으로 봐준다고 하였다. 당시 이극균이 신임받는 고위 중신이라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30] 상술한대로 급하게 쏜 화살로 한방에 암살자 얼굴을 맞춰서 죽였다. 여진족 원정 때는 방책 위에서 엉덩이를 까고 도발하는 여진족의 엉덩이를 맞추려고 쐈는데, 전투가 끝나고 보니 영 좋지 않은 곳이 날라가서 죽어있었다. [31] 물론 중종반정에 대해 알 리 없는 다른 사람들은 "박원종은 주상을 어릴 때 양육한 월산대군 부인의 동생이라서 잘 대우해준다."라고 생각한다. 연산군이 어릴 적에 월산대군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이 신경쓰던 문제는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은 최측근이었다는 것이었다. [32] 물론 전리품만 횡령하지 군량에 손을 대지 않는 선은 지키고 있다. 재석도 박원종의 비리를 기록은 해두되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덮어주고 있다보니, 덮어줄 수 있는 잘못은 왕이 직접 덮어주고 있다보니 대놓고 횡령을 하더라도 일정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유지된다. 그리고 이만큼 박원종은 누나를 잘둬서 주상의 총애를 받는 행운아로 여겨진다. [33] 훗날 재석은 이 사실을 알고 훈장이라도 주고 싶은 기분이라고. [34] 이때 신수근으로서는 원자 황이나 진성대군 중 아무나 밀어도 입신은 무조건 보장되었다. 누이동생의 아들이 왕이니 왕의 외숙부가 되거나 딸이 중전이니 국구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 이황을 민 이유는 이황의 정통성과 무종의 총신들이 실권을 쥐고 있다는 명분과 실리, 무종에 대한 충성심 때문으로 추정된다. [35] 무종의 죽음의 비밀을 아는 궁인과 내관들은 모두 의문사당하고 어의는 관례대로 당시 내금위 당직군사들 호송 하에 북평으로 유배가던 길에 여진족의 습격으로 전멸당한 것을 보면 영 좋지 못한 방법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36] 이 사건은 '양도왜란'이라 불리고 있다. [37] 이 때 유순정의 손녀가 한 번 딸로 잘못 언급되는 오류가 있다. [38] 물론 박원종이 조카딸을 내세웠지만 급사한 것도 있다. [39] 무종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비록 사림이지만 군공을 세운 공신이며 무종에게 중용되었던 탓에 자신들의 동지로 인정하며 받아주었고, 사림 측에게는 사림의 성골이라는 점으로 대표격이 되는 등 유순정은 양대 세력이 불만을 품지 않을 대상이었다고 한다. [40] 원 역사의 중종반정의 3대장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이 추가된 것이다. [41] 박원종도 죽일 생각까진 없었고 그냥 고생 좀 해 보란 심보였는데, 뜻하지 않게 많은 적군을 만나 진짜 죽을 뻔 했다. [42] 유담년은 박원종이 누나를 잘 둬서 출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원 역사에서는 삼포왜란 진압 때 활약했고 야인 속고내를 사로잡자는 회의 중 조광조가 야인을 계책을 써서 잡는 것은 왕도가 아니라며 반대하고 중종이 이에 동조하자 "예로부터 밭을 가는 건 종에게, 길쌈하는 것은 여종에게 물으라고 했는데 이런 문제는 저희 무신들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중종에게 항변하기도 했다. [44] 노산군(단종)을 아냐고 하는 재석에게 노산군은 안평대군과 측근들에게 휘둘렸다고 말했다. [45] 원 역사에서 전라도 구례 일대에서 미륵을 자처하던 사이비 교주였다고 한다. [46] 상희가 남사당패 시절 이 자를 치료해준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병세가 원 역사보다 나아져 더 큰 망상을 벌인 나비 효과라고 한다. [47] 1부에서는 현대와 미의 기준이 달라 지금 기준으로 미인은 추녀라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2부 시점에서 미의 기준은 현대 한국과 거의 같아졌다. 재석의 처남 임숭재가 장녹수와 별개로 재석 취향의 미모를 가진 무희들을 모아 여성 아이돌 그룹을 조직한 적도 있는데, 아마 이 때문에 재석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이 후대에 영향을 준 듯하다. [48] 상희가 자신이 미래인이란 것만 빼고 모든 사정을 말했다고 한다. 재석이 임금인 것은 모르며 상희와 불륜관계인 팔자 좋은 한량 정도로 생각하는 듯. [49] 이전부터 분명 돈이 궁할 텐데 재석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복선은 있었다. 사실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임금이 수시로 만나는 여자에 대해 감시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0] 실제 소 모리노부는 중종 4년부터 대마도주였고 삼포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51] 강제개명을 한 이유는 본래 이름 종의성의 성(盛)자가 부친 종재성의 성 자와 겹쳐서 피휘를 지키라는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피휘를 하는 관습이 없고 반대로 통자라 하여 조상이나 주군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대대로 물려쓰는 관습이 있다. 때문에 종성순은 원래 이름의 통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 쪽에서 문화적 고려 없이 그 글자를 뺏어버린 것. [52] 이 노승이 종성순의 부친 종재성을 암자에 봉해줬기 때문. 의심병에 걸린 재석은 이 노승을 배목인패의 잔당으로 생각하고 증거도 없이 잡아들이지만 묘사되는 것을 보면 배목인과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승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53] 작가가 밝히길, 실록에는 병사라고 기록되어 있다지만 금위사 문서에는 암살 사실이 그대로 적혀있다고 한다. 2부에 재석도 눈 뜨자마자 2주 동안 책 뒤적거린 걸로 스스로 알아냈고, 경성군 뒷담을 까던 사림들도 무종의 암살 사건을 안다는 식의 언질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공표만 못했을 뿐 정설로 취급받고 있다. 금위사 문서가 후에 소실된다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종성순의 실종, 뒤이은 몇몇 내관과 궁인들의 의심스러운 죽음, 이후 암행이 중단되고 내금위에 외국인 복무가 금지되었다는 것을 실록을 통해서 알 수 있을테고, 승정원일기 전반부가 소실되지 않는다면 그날의 내금위 군사들이 유배가던 어의를 호송하다 여진족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는 것도 알 수 있을테니 무종 암살설은 미래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정설로 통할 것으로 보인다. [54] 따지고보면 이름없는 소금장수에서 중원 황제국 시조가 된 후송 황실이 가장 떡상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비효과가 아닌 재석이 직접 은혜를 베푼 가문 중에서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다. [55] 명에서 처음 복제한 총기로 처음 생산된 수량 전부가 성능 실험을 위해 보급이 되었는데 일선 고위 장수들이 조총성능을 의심하여 치중대에 전부 지급이 된 것이다. [56] 글을 한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 고심했었지만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어 그대로 임명하고, 대신 남곤을 부명마사로 임명해 단점을 보완한다. [57] 재석 스스로 작명 센스가 구리다고 생각한다. [58] 하지만 후손인 석탈왜의 시대에 와서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이 터지고 조선의 최종 승리로 북해도의 독립이 보장되어 석탈왜는 대추장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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