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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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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향력2. 영향을 준 아티스트

1. 영향력

스릴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음악 형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롤링 스톤/ THE 40 MOST GROUNDBREAKING ALBUMS OF ALL TIME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흑인으로서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고 흑인음악의 저변을 넓혔다.
2.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 음악 산업의 격변을 이뤄냈다.
영국 대학 연구팀이 1만 7천개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롤링스톤즈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1983년(마이클 잭슨,더 폴리스,유리스믹스 등의 팝 스타와 신기술의 유행),1991년(힙합)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영국 연구진 발표…1964년·1983년 포함해 모두 3차례 혁명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 롤링 스톤 1983년을 음악의 해로 규정하며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이 로큰롤 역사에서 흑백 인종의 벽을 부쉈으며 'Billie Jean'이 특히 큰 역할을 해냈다며 잭슨을 흑인음악의 선봉장이라 평가했다. 또 LA 타임스의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는 펑크, 소울, 재즈, 록, 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경계를 완벽히 허물며 팝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놨다고 평가했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새로운 사운드로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2009년 KBS 인터뷰)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2009년 한겨례 기고문)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뉴팝을 발명했다'라는 평을 받거든요. 여기서 뉴팝이란 것은 당시 팝음악계 내부에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인종적 취향의 벽 자체를 아울렀다는 얘기거든요.(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박은석 음악평론가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스릴러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ㄷ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웅진뮤직 기고문)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은 음악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입니다. 마이클과 함께 소울팝, R&B팝이 궤도에 올랐고 프린스,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휘스턴은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악 장르는 컨트리 팝이었지만, 마이클이 우뚝 솟으면서 완전히 음악의 양태가 바뀌었습니다.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세련된 흑인음악, 재즈나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음악마저도 등장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잭슨의 노래는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 스릴러 앨범의 편곡은 록인지 펑크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규정짓기 힘든 리듬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강력한 조합과 어우러져 그의 하이톤 목소리에 딱 들어맞는다.
1984년 뉴욕 타임스/ MICHAEL JACKSON AT 25: A MUSICAL PHENOMENON
앨범의 모든 수록곡은 지금 발표되는 곡들과 섞어 틀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는 펑크, 포스트 디스코와 같은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록의 어프로치를 붙여 넣었으며, 동시에 퍼커션 운용으로 곡의 특색을 키우고 자신의 창법과 음색으로 전체를 아우르며 팝 음악을 새롭게 정의했다고 해도 될 정도의 성과를 이뤄냈다. 음악 자체의 결 또한 다양한 장르를 섞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완성해냈다.
박준우 음악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록큰롤이라는 음악이 흑인에게서 백인에게 전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은 록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흑인음악인 소울과 R&B를 바탕으로 백인음악인 팝과 록이 완벽히 결합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비틀즈 이후 영국 뮤지션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던 미국의 대중 문화계에 미국적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고... (생략) 인종적 경계와 장르를 통합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그동안 흑과 백으로 나뉘었던 미국의 대중문화가 흑백의 구분없이 함께 화합하여 세계 시장을 선두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로 1980년대와 1970년대에 명확한 선을 그으며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렸던 셈이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잭슨 집안은 흑인 사회의 케네디가이며 흑인 가수들을 주류 TV쇼에 출연시켜 인종에 관계없이 대중에게 표를 팔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제임스 워커 연예계 전문 변호사/ 2009년 CNN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 발표 훨씬 이전에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1972년 영화 Ben을 상영했던 극장의 상당수는 흑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들이 장악했던 할리우드의 영화 주제곡 'Ben'을 불렀다.
워싱턴 포스트 2009년
가수가 되고 나서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느꼈다. 아무래도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안 받은 가수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음악을 듣고 자라서 중간에 들어가는 추임새 등 창법이 비슷하다.
박재범, 2014년 9월 2일 정규 2집 <EVOLUTION> 쇼케이스 현장에서
로큰롤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의해서 대중화됐습니다. 그런데 로큰롤 뮤직은 흑인의 음악에서 출발했어요. 리듬 앤 블루스라고 하는. 디스코 음악 역시 흑인의 펑크, 소울 음악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음악을 가지고 대중적 스타가 된 뮤지션들은 다 백인들이었어요. 1950년대 선(Sun) 레코드의 샘 필립스 사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죠. "로큰롤 음악은 너무 젊은이들에게 사랑받을 음악인데 그래서 흑인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 청년 한 명만 있다면 단번에 대중들의 스타가 될 텐데.." 그때 등장한 게 엘비스였습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한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비록 시대가 좋아졌다고 하나 80년대는 인종간의 차별이 심했을 때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대놓고 MTV는 백인 중심주의라고 씹었을 정도 ...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 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King Of Pop으로 대접받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빌리 진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게 잭슨의 'Beat it' 뮤직비디오를 주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MTV는 한 때 마이클을 거부했지만 MTV와 마이클이 뗄 수 없는 사이가 됐고 1991년부터는 평생공로상인 'Michael Jackson Video Vanguard Award' 상까지 만들어 현재까지도 시상하고 있는걸 보면 참 묘한 셈.
그 이후 나온 흑인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MTV에 자연스럽게 비디오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의 후광 효과를 본 거죠.
ㅡ바브 슬레이드 Kiss FM 뉴스 국장/ 2009년 CNN 인터뷰
1980년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음악계에서 흑인들은 항상 2인자였다. 흑인 노예들의 음악인 블루스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로큰롤은 물론이고, 스탠더드 팝, 포크 음악, 하드 록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백인들이 주류를 점했다. 소수의 흑인 가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주류에 전면 등장하면서 흑인들의 정상 등극도 활발해졌다.
ㅡ안재필 음악평론가/ Pop's World '혁명을 노래하는 흑인 여가수 트레이시 채프먼'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항상 흑인 스타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 흑인 스타가 1등은 못했어요. 항상 백인한테 뒤졌죠. 그런데 마이클 잭슨에 와서 흑인이 제대로 톱이 된 겁니다.(2015년 JTBC 인터뷰) 마이클이 왜 중요하냐, 마이클이 등장한 83년에 드디어 서러움 당하던 흑인음악이 진짜 1등으로 올라섰거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마이클은 이곳저곳에서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의 흑인들의 정서를 온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도 사실 마이클에게 채무자다 이런 표현을 써요. 마이클이 없었으면 미국 흑인들이 무슨 희망을 갖고 살았겠어요. 그니까 마이클은 흑인음악이 제대로의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고 어떻게 보면은 미국에 적어도 음악에 관한 한 계급 질서를 바꾼 거죠. 댄스음악이 세계적 주도권을 갖게 된 것도 마이클과 함께라고 볼 수 있고요.(2017년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스타들의 분발로 설움과 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은 자신감을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전이던 사후던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1980년대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의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백인들의 사랑을 받은 흑인은 없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
임진모 음악평론가
당시 음반 시장은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음반 판매량은 5,000만장이나 감소했다. 1980년대 들어 디스코 시대가 저물면서 흑인음악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크게 맞추는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점점 자취를 감춰 갔다. 차트에서 흑인음악의 후퇴는 얼마나 드라마틱했던가? 1982년까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흑인음악의 비중은 거의 80%나 감소했다. 이것은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이 거의 바닥이었음을 말해준다.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빌보드/ Michael Jackson's 'Thriller' at 30: How One Album Changed the World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당시(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은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가장 큰 영향력은 마이클이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는 거다. 뮤직비디오와 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2014년 기사에서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Dangerous World Tour 때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빌리 진과 비트 잇,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춤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비트 잇과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집단 군무는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최초의 집단 군무로 소개되고 있으며 잭슨 파이브의 멤버일 때는 로봇 춤 등을 유행시켰고 문워크라는 획기적인 춤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 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데인저러스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국회에 등재돼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비디오가 마이클의 스릴러! 마이클의 이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비디오와 보는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즉, 마이클이 음악 산업에서 뮤직비디오를 독립적인 상품으로 내놓은 첫 주자였고 대중음악을 연예사업으로 돌린 주인공인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 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3년 5월 16일, 모타운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그의 넘버원 싱글 Billie Jean 공연을 선보였다.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ㅡ 앤서니 디커티스 음악평론가/ 저서 'Present Tense'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ㅡ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누구도 잭슨만큼 댄스라는 예술 형식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ㅡ타비아 닌고 문화평론가 / 2009년 NY Daily News
MTV가 처음 개국했을 때 뮤직비디오는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음악을 듣기 위해 MTV를 틀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좀비들과 함께 춤을 추는 ‘스릴러’를 10분이 훌쩍 넘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 뮤직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ㅡ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1981년 8월 1일, MTV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직비디오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 초기에 MTV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이었다. 1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히고 있었지만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MTV가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지게 된 건 1983년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수많은 기록을 세운 이 곡의 오리지널 비디오는 13분짜리 단편영화의 컨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최초의 뮤직비디오였고 MTV를 비로소 대중적인 채널이자 광고 효과가 높은 채널로 자리 잡게 만든 1등 공신이었다.
ㅡ 차우진 음악평론가/ 네이버 뮤직 매거진 '뮤직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
MTV와 뮤직비디오 발전의 1등 공헌자.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MTV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이 내놓은 싱글들은 대부분 뮤직비디오를 동반했고,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놀라운 영상 미학을 구현했다. 마이클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음악 팬들을 MTV 앞으로 이끌었다. 그의 뮤직비디오는 단순히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쇼트 필름이라 말할 정도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은 영화다. 쟁쟁한 영화 감독들을 초빙해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특수효과를 갖춰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ㅡ고영탁 음악평론가/ 오이뮤직 2003년 3월호
스릴러 앨범이 팝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면 확실히 Dangerous 투어는 팝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한상철 음악평론가/ 인터파크 '댄저러스 투어 Live In Bucharest' 리뷰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가수들도 마찬가지다.
ㅡ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속출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이다. 한국도 이전엔 댄스음악, 댄스가수라는 수식이 없다가 마이클 잭슨 시대를 맞아 일반화됐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 마이클 잭슨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매체 환경의 변화입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이전 유력 매체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을 알게 된 것은 뮤직비디오에서였습니다. 당시 마이클의 뮤직비디오는 미국의 유선방송인 MTV에서 상영했습니다. 개국 당시 MTV는 '뮤직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그룹 버글스의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연일 틀었습니다. 이 곡을 통해 이제는 뮤직비디오 시대임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이러한 MTV의 의지외 욕구는 1982년 마이클에 와서 마침내 실현됩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어떤 밴드를 좋아한다 해도 얼굴도 모르고, 밴드의 리더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가수 얼굴도 모르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고문이죠. 이와 같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출하고 주도한 사람이 바로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덕분에 마돈나, 컬쳐 클럽도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의 주요 매체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MTV로 확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뮤직비디오가 얼마나 멋있게 만들어졌나를 통해서 음악을 접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다매체 시대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마이클이 처음 시도하여 대중적으로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이전 1980년~1982년 사이 음반 시장은 망해가고 있었고, CBS 에픽의 1982년 8월 13일은 직원들의 주요 해고가 있던 날로 검은 일요일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모든 걸 바꾸었다.
빌보드 2009년
마이클의 앨범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레코드 업계는 상업 침체로 크게 망해가는 분위기였는데 잭슨의 충공깽한 앨범 판매량이 이들에게 도움이 됐다. 사람들은 잭슨의 앨범을 사면서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도 사갔고 타임지는 레코드 업계 최호황인 78년 이후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고 설명했으니 참고로 'Dangerous' 앨범 발매 당시 레코드 업계에서는 건스 앤 로지스의 앨범을 사는 소비자들은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을 사가지 않지만 마이클의 앨범을 사는 소비자들은 다른 아티스트도 사간다고 말했었다.

이 외에도 잭슨이 입는 옷도 불티나게 팔렸고 'Thriller 25th' 기념 앨범에 포함된 동영상에 잘 나와 있는데 스릴러가 한참 유행일 때 개나소나 잭슨이 비트 잇 때 입은 레드 자켓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일부 학교에서는 잭슨의 복장을 금지하기도 했고 이런 현상을 보고 매체는 그 어떤 톱스타도 잭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버클과 지퍼가 많이 달린 그의 옷 덕택에, 한국의 지퍼 생산 업체가 전에 없던 수출 대박을 맞았다는 기사가 당시 국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마이클은 사운드 측면에서도 극찬을 받았는데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잭슨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엔지니어들은 반드시 잭슨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Ice J 음향엔지니어는 잭슨의 앨범 사운드를 현대 음악의 기준,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1991년 Dangerous 앨범부터는 사운드에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됐다.
당시 최고 인물들을 앨범 작업에 참여시킨다는 원칙은 지금까지도 여전한데, 그래서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당대에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간 사운드로 여겨진다.
장호연 음악평론가/ 웹진 weiv, Thriller 앨범 리뷰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 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고영탁 음악평론가/ 웹진 izm, 아티스트 리뷰 '마이클 잭슨'
음반을 들으면 이건 소리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마이클의 음반은 스튜디오에서 들으면 사운드가 다른 음반과는 다릅니다. 정말 보통 소리가 아닌거죠.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유행을 선도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음악과 함께 전 세계를 끌어안은 자원봉사자이자 흡입력 있는 넘버원 뮤지션은 잭슨 이후에는 만나보기 어려울 거에요. 중학교 때 방구석에 처박혀 며칠을 밤새며 들었던 앨범인데, 사운드 퀄리티에 가장 많이 놀랐어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믹싱 실력이라고 할까요. 퀸시 존스와 결별한 잭슨이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와 만나 최고의 앨범을 탄생시킨 셈이죠. 전곡이 모두 타이틀곡 같은 느낌에다 한발 앞선 음악 기술을 통해 1990년대 팝계에 도장을 찍어버린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이로써 90년대 팝 시장이 정립된 게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보죠. '음악은 가장 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명반이에요.
가수 데프콘/ 네이버 뮤직 매거진 '나를 노래하게 만들어 준 음악들' Dangerous 앨범
국내 가요의 역사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뉘듯이 팝 음악의 역사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뉜다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판매량과 더불어 마이클 잭슨의 '팝의 황제' 등극, 팝 음악의 흑백 장벽 붕괴, 심지어는 음반 산업과 카세트테이프 제조업의 호황 등등으로 이어질 만큼 수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음반이기에 오히려 이 음반의 녹음 상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가 들어본 1980년대 앨범 중에서 이 앨범만큼 녹음 품질이 좋은 앨범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녹음 품질이 대단히 뛰어납니다. 예를 들어 'Thriller'를 들어보면 도입 부분에서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열리면서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룻바닥을 걸어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마치 영화처럼 그려지죠. 지금 2017년에 녹음된 앨범들도 이 정도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앨범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 세계의 모든 청소년들을 뒤로 걷게 만들었던 'Billie Jean'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이 곡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녹음하기 어려운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대중음악에 쓰이는 악기 중에 가장 듣기 어려운 악기가 베이스 기타라는 건 누구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곡은 곡 전체에 흐르고 있는 베이스 라인이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곡이기 때문에 그 베이스 기타 소리가 묻히면 안 됩니다. 여기에 마이클 잭슨이 입으로 내는 소리지만 음표에는 그려지지 않는 소리, 이를테면 바람 소리나 딸꾹질 소리 등의 소리가 정확히 표현되어야 하죠. 게다가 어느 정도 해상도를 보장할 수 있는 모니터 계열의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좁은 녹음실에서 녹음을 한 후 믹싱 과정에서 리버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잔향이 남게 녹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eat It'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어보면 후렴구로 반복되는 'Beat It' 이라는 가사가 한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리를 옮겨가며 소리가 나서 여러 명이 코러스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앨범이 발매된 시기가 1982년임을 감안하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이 곡의 기타입니다. 이 곡에는 메인 리프를 치는 기타와 펑키 리듬과 솔로를 치는 두 대의 기타가 있는데요. 헤비메탈처럼 보컬보다는 기타의 볼륨이 큰 장르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마이클의 앨범처럼 보컬이 중심이 되고 기타 연주는 반주가 되는 음악에서는 기타 소리가 엉키거나 묻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곡에서는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가 크지 않은 볼륨에서도 선명하게 잘 들립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연주가 너무 훌륭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곡의 메인 기타와 베이스 기타는 Toto의 스티브 루카서가, 기타 솔로는 에디 반 해일런이 연주했습니다) 믹싱을 잘 한 덕이지요. 그리고 그 뒤에는 전설적인 프로듀서가 아니라 그냥 전설인 퀸시 존스가 있습니다. 비단 [Thriller] 앨범뿐만이 아닙니다. 퀸시 존스와 결별하고 테디 라일리와 작업한 첫 번째 앨범인 [Dangerous] 앨범은 마치 이문세 4집처럼 거의 모든 곡이 싱글 커트된 앨범이죠.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학생 시절이라 변변한 오디오도 없이 그냥 싸구려 이어폰으로 들었는데요. 그래서 이 앨범이 그렇게 녹음 상태가 좋은 앨범인지 몰랐습니다. 한참 후에 오래된 CD를 정리하다가 이 앨범이 눈에 띄어서 CD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요. 그렇게 감은 눈은 1분도 안 돼 동그랗게 떠졌습니다. '아니 이 앨범이 이렇게 녹음이 잘 된 앨범이었나?' 하는 생각에요.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음악은 후배들에게 교본이 되고 있습니다... 팝의 황제라는 명성에 가려진 그의 음악과 놀라운 사운드 퀄리티는 멜론 Hi-Fi의 무손실 음원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2. 영향을 준 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이 팝 스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잭슨과 견줄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잭슨의 혁신성을 그들 각자의 작품에 적용할 제자들만이 앞으로도 꾸준히 생겨날 뿐.
롤링 스톤/ 2009년 7월 '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현 세대의 모든 팝 뮤지션들이 마이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2010년 AMA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에서 남자 가수상 수상 소감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 누구도 마이클 잭슨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마무리 했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마이클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인성 흐레기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 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때[1]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 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추모 영상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춤과 노래를 커버한 적도 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팝 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마이클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 Z,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더 위켄드, 테일러 스위프트 등 주요 팝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진영이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을 듣고 자신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고 빅뱅, BoA, 문희준, 박재범, 장우혁 등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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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이디 가가는 원래 'This is it' 투어의 오프닝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마이클이 신인이던 레이디 가가를 보고 자신이 직접 투어의 오프닝을 맡을 가수로 추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