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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이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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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B07A><colcolor=#000000> 양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1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María Isabel de España
파일:Maria_Isabella_Infanta_di_Spagna_P.V_Hanselaere.jpg
이름 스페인어 마리아 이사벨 안토니아 호세파 아나 테레사 필리피나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María Isabel Antonia Josefa Ana Teresa Filipina de Borbón y Borbón-Parma)
이탈리아어 마리아 이사벨라 안토니아 조세파 안나 테레사 필리피나 디 보르보네
(Maria Isabella Antonia Gioseffa Anna Teresa Filippina di Borbone)
출생 1789년 7월 6일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사망 1848년 9월 13일 (향년 59세)
양시칠리아 왕국 포르티치 포르티치 궁전
배우자 프란체스코 1세 (1802년 결혼 / 1830년 사망)
프레센자노 공작 프란체스코 델 발조 (1839년 결혼)
자녀 루이사 카를로타,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카를로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마리아 안토니아, 안토니오,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 테레사 크리스티나, 루이지, 프란체스코
아버지 카를로스 4세
어머니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형제 카를로타 호아키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종교 가톨릭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왕세자비3.3. 왕비3.4. 왕대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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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카를로스 4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의 4녀.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이자 이사벨 2세의 넷째 고모다.

불과 13살[1] 양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1세와 결혼해 스페인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와 페르디난도 2세 등을 낳았다.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가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는 왕국이 출범하기 이전에 사망했고, 페르디난도 1세가 귀천상혼으로 재혼하면서 마리아 이사벨이 양시칠리아 왕국의 첫번째 왕비가 되었다.

2. 작위

  •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전하 Her Royal Highness Infanta Maria Isabel of Spain (1789년 7월 6일 ~ 1802년 7월 6일)
  • 칼라브리아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alabria (1802년 7월 6일 ~ 1825년 1월 4일)
  • 양시칠리아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the Two Sicilies (1825년 1월 4일 ~ 1830년 11월 8일)
  • 양시칠리아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Dowager of the Two Sicilies (1830년 11월 8일 ~ 1848년 9월 13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isco_de_Goya_y_Lucientes_054.jpg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데 고야 작,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중앙에 서있는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팔에 안겨 있는 아이가 마리아 이사벨이다.

1789년 7월 6일 마드리드의 궁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페인의 실권자 마누엘 고도이 총리대신이 승승장구하며 왕비의 애인이라는 추문이 날 때라 궁중에서 마리아 이사벨이 고도이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밑으로 동생이 3명 더 태어났으나 남동생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를 제외한 두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마리아 이사벨이 어릴 적 스페인은 한참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게다가 막내딸이라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최소한의 교육만을 받고 자랐다.

12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는 딸의 혼사를 백방으로 찾아봤다. 1801년 봄, 마리아 이사벨은 사촌 오빠 나폴리 시칠리아의 프란체스코 왕세자와 약혼했다. 그리고 마리아 이사벨의 오빠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는 프란체스코의 여동생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 이중약혼에는 프랑스의 개입이 있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의 동맹국인 반면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혼사를 통해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적대시하던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이 혼사를 크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마리아 이사벨이 13살이 되던 1802년 7월 6일에 마리아 이사벨과 프란체스코는 결혼식을 올렸다. 나폴리에 입성한 마리아 이사벨은 마리아 이사벨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3.2. 왕세자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큰며느리를 매우 마음에 안 들어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아 이사벨을 두고 못생기고 다리가 짧으며,[2] 4살짜리보다도 지능이 낮은 것 같다고 신랄하게 디스했다. 그러나 어리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마리아 이사벨은 나폴리에서 연극을 보거나 축제에 가면서 즐겁게 지냈다. 15살 때 첫 아이를 가진 마리아 이사벨은 12명의 아이를 낳았다.

한편 나라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왕가는 두차례 나라를 잃고 망명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합쳐진 양시칠리아 왕국이 출범하면서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가 국왕으로 복귀했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남편 프란체스코는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받았고, 마리아 이사벨은 칼라브리아 공작부인이 되었다.

3.3. 왕비

파일:Maria_Isabella_di_Borbone.jpg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라, 1829년

1825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고 프란체스코 1세가 즉위했다. 프란체스코 1세는 정치는 대체로 수상에게 일임했고, 반동주의적 성격의 통치를 하며 혁명과 암살을 두려워해 늘 군인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국민들은 이런 국왕에게 그리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왕비에게는 호의적이었는데, 친절하고 격식이 없는 마리아 이사벨은 남편보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묘사된다. 마리아 이사벨은 왕비가 된 후에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스스럼없이 극장과 무도회에 다니고 파티에 참석했다. 그러나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고 여성을 위한 기숙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기관을 지원하는 등의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시집갔지만 스페인의 가족들과 계속 연락을 취했고, 마리아 이사벨의 딸들 중 4명이 스페인 왕족과 결혼했다. 그중 큰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1세 부부는 스페인을 방문했는데, 결혼식 이후 프란체스코 1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1830년 11월 8일에 숨을 거두었다.

3.4. 왕대비

장남 페르디난도 2세가 양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몇몇 신하들은 보수적인 페르디난도 2세에 반발해 음모를 꾸몄는데, 정치에 무관심한 대비를 섭정으로 세우고 자신들이 국정을 휘두르려 했다. 이 음모는 빠르게 발각되어 중지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의심하기 시작한 페르디난도 2세와 마리아 이사벨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모자의 관계는 마리아 이사벨의 남자 문제로 더더욱 냉각되었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였던 마리아 이사벨은 남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놀러다니길 좋아하고 왕의 어머니라는 지위에 있는 그녀에게 여러 잘생긴 귀족들이 접근했다. 이는 왕의 정적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어 모자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후 페르디난도 2세의 왕비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둘의 사이를 중재하면서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었다.

1835년에 마리아 이사벨은 오스트리아 장교 출신의 페테르 폰 슈무커라는 유부남 귀족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가 사망하자 마리아 이사벨은 슈무커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슈무커는 결혼 조건으로 온갖 특권을 요구했고, 그에게 질린 마리아 이사벨은 슈무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자꾸 어머니가 남자 문제로 곤란하게 하자 페르디난도 2세는 아예 결혼하기 좋은 귀족 남성 목록을 만들어주었다. 1839년 1월 15일, 50살의 마리아 이사벨은 16살 연하의 잘생긴 귀족 청년과 재혼했다. 부부는 나폴리 궁을 떠나 카포디몬테에서 조용히 살았다. 마리아 이사벨은 1848년 9월 13일에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Infanta María Isabel of Spain)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로스 4세
(Carlos IV)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펠리페 5세
(Felipe V)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3]
(Maria Josepha of Austria)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
(Felipe, Duke of Parma)
펠리페 5세
(Felipe V)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Elisabeth of France)
루이 15세
(Louis XV)
마리아 레슈친스카[4]
(Maria Leszczyńsk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비 루이사 카를로타
(Luisa Carlota, Infanta Francisco de Paula of Spain)
1804년 10월 24일 1844년 1월 29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5]
슬하 5남 6녀[6]
2녀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 Queen of Spain)
1806년 4월 27일 1878년 8월 22일 페르난도 7세
슬하 2녀[7]
제1대 리안사레스 공작 아구스틴 페르난도 무뇨스
슬하 5남 3녀
1남 페르디난도 2세
(Ferdinando II)
1810년 1월 12일 1859년 5월 22일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8]
슬하 1남[9]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10]
슬하 8남 4녀[11]
2남 카푸아 공 카를로 페르디난도
(Carlo Ferdinando, Prince of Capua)
1811년 11월 10일 1862년 4월 22일 페넬로프 스미스[12]
슬하 1남 1녀
3남 시라쿠사 백작 레오폴도
(Prince Leopoldo, Count of Siracusa)
1813년 5월 22일 1860년 12월 4일 사보이아의 마리아 비토리아
슬하 1녀
3녀 토스카나 대공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Grand Duchess of Tuscany)
1814년 12월 19일 1898년 11월 7일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13]
슬하 5남 5녀[14]
4남 레체 백작 안토니오
(Prince Antonio, Count of Lecce)
1816년 9월 23일 1843년 1월 12일
4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왕자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Infanta Sebastian of Portugal and Spain)
1818년 2월 25일 1857년 11월 6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15]
5녀 몬테몰린 백작부인 마리아 카롤리나 왕자비
(Infanta Maria Carolina, Countess of Montemolin)
1820년 11월 29일 1861년 1월 14일 몬테몰린 백작 카를로스 루이스[16]
6녀 브라질의 황후 테레자 크리스티나
(Teresa Cristina, Empress of Brazil)
1822년 3월 14일 1889년 12월 28일 페드루 2세
슬하 2남 2녀[17]
5남 아퀼라 백작 루이지 카를로
(Prince Luigi, Count of Aquila)
1824년 7월 19일 1897년 3월 5일 브라질의 자누아리아[18]
슬하 3남 1녀
6남 트라파니 백작 프란체스코
(Prince Francesco, Count of Trapani)
1827년 8월 13일 1892년 9월 24일 토스카나의 마리아 이사벨[19]
슬하 2녀[20]


[1] 아무리 조혼이 흔했다지만 13살에 결혼은 중세나 근세 초기에나 있던 일이다. 근세 후기이자 근대 초기에 살았던 마리아 이사벨의 시대엔 빠른 나이였다. [2] 선입견이라고 하기 힘든 게 카를로스 4세의 딸들은 하나같이 인물이 안 좋았다(...). 마리아 이사벨은 그래도 그중 나은 편이었으나 통통하고 키가 매우 작았다. [3] 요제프 1세의 장녀이다. [4]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차녀이다. [5]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이다. [6]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등. [7] 이사벨 2세, 몽팡시에 공작부인 루이사 페르난다. [8]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막내딸이다. [9] 프란체스코 2세. [10] 레오폴트 2세의 3남 카를 대공의 장녀다. [11]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형 프란체스코 2세의 후계자),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안눈치아타,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피아 등. [12] 귀천상혼 [13] 레오폴트 2세의 손자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자이다. [14] 페르디난도 4세 등. [15] 카를로스 3세의 증손이자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외손자이다. [16] 카를리스타 왕위요구자, 페르난도 7세의 동생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장남. [17] 명목상 제위 계승권자 이자베우 등. [18] 마리아 2세의 여동생이자 페드루 2세의 누나이다. [19]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5녀다. [20] 카세르타 백작부인 마리아 안토니에타(페르디난도 2세의 4남이자 왕가의 후계자인 알폰소의 부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