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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1914)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마루야마 마사오
[ruby(丸山 眞男, ruby=まるやま まさお)] | Masao Maruyama
파일:Masao.jpg
출생 1914년 3월 22일
일본 제국 오사카부
사망 1996년 8월 15일 (향년 82세)
일본 도쿄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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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마루야마 칸지(丸山幹治) (아버지)
마루야마 테츠오(丸山鉄雄) (형)
마루야마 쿠니오(丸山邦男) (동생)
학력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사상 자유주의 ( 일본), 사회자유주의, 시민 내셔널리즘[1]
직업 정치학자

1. 개요2. 학설
2.1. 일본의 근대성2.2. 억압의 이양
3. '학계의 천황' 논란4. 주요 저서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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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서유럽 게르만족이 7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융합시킨 결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사상가 1인이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동양(東洋)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픽션일세. 그 실체가 부재한다는 나이토 고난(內藤 湖南, 1866 ~ 1934) 선생의 말을 긍정적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지. 서양(西洋)은 어찌 되었든 통체적 연속성(Monolithic continuity)을 가진 위대한 문명일세. 동양은 아직도 자고(自高)하지 말고 서양 문명의 성취를 철저히 흡수할 필요가 있네. 지금 우리가 과학 문명의 흡수를 통해 일시적 대등 관계를 이룩했다고 자만해서는 아니 될 걸세. 우리가 서유럽 계몽주의가 제시한 인간관의 요체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아직도 장구한 세월이 걸릴 걸세. 서유럽 역사가 700년의 기나긴 중세를 겪었듯이 우리 문명도 서양과의 보다 본질적인 융합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 문명을 서서히 태동시켜 나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서유럽 문명이 그리스 고전을 대했던 그러한 진지함으로 우리는 서유럽 문명을 대해야 하는 것일세. 많은 동양학도[2]들이 이 점을 착각하고 있어![3]

일본의 정치학자. 1914년( 다이쇼 3년) 3월 22일 일본 오사카에서[4]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평론가인 마루야마 칸지(丸山幹治, 1880~1955)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37년( 쇼와 1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동 대학 조수(助手)를 거쳐 1950년 교수가 되었으며, 1971년 퇴직했다. 1996년( 헤이세이 8년) 8월 15일, 향년 만 82세로 일본 도쿄에서 사망했다.

『國家學會雜志』(국가학회잡지)에 1940~1944년에 걸쳐 발표한 세 편의 논문을 묶어 펴낸 책 『日本政治思想史硏究』(일본정치사상사연구, 1952)와 46년 『世界』(세계, 세계지) 5월호에 발표한 군국주의를 비판한 「超國家主義の論理と心理」(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가 유명하다.

오규 소라이를 일본 정치의 발견자, 후쿠자와 유키치를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로 조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3년에 『福澤諭吉と丸山眞男』(후쿠자와 유키치와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비판서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는 2015년에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라는 이름으로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신좌파가 명멸하던 60-70년대에는 위선적인 아카데믹 자유주의자의 상징으로 신좌파에게 증오를 받았다. 동경대 전공투 의장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회고록을 보면 "기동대가 학생들 머리통을 깨려고 쳐들어오는 와중에 마루야마 선생님에게는 고서적이 더 중요하셨느냐"는 비아냥부터 시작해서 마루야마를 매우 다채롭게 씹고 있다. 그와 신좌파와의 갈등은 1969년 도쿄대에서 마루야마의 개인사무실이 신좌파 학생들에 의해 점거당하고 일부 물건들이 강탈당함으로써 극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마루야마는 신좌파의 반권위 폭력투쟁이 나치보다 나쁘다는 심각한 망언을 했다고만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의 평소 정견이 아니라 자신의 사무실이 공격당했을때 감정적으로 나온 말이였다.

제자로 와타나베 히로시가 있다.

2. 학설

2.1. 일본의 근대성

마루야마의 20대 파릇파릇한 시절 논문 묶음인 『日本政治思想史硏究』에서 특히 중심 주제로 다뤄진다.[5] 아래는 꽤 거칠게 요약된 감이 있으므로 원전과 관련 자료를 함께 참조하는 걸 추천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과 중국의 다름을 통해 (정체한 중국과는 달리) 일본이 서양의 근대화로 인한 계속된 발전 속에서 뒤쳐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다름이란 주자학이다.

중국은 계속해서 주자학이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주자학은 사상적 근원을 이치, 즉 자연적 질서에서 찾지만, 근대적인 것은 그런 자연적인 것에 대항하는 작위적인 성질의 것이므로, 중국에서는 근대성이 발달하지 못했다. 중국과 다르게 일본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고학파, 국학파와 양명학 등이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주자학의 자연적 질서에 대항하는 근대적 사유의 맹아를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마루야마가 주목하는 것이 오규 소라이 같은 유학자이다. 마루야마는 이렇게 서양사상이 도달하기도 전에 일본에서 근대성이 자생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본사회를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서양의 근대적사회를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양립시키고, 일본은 서양과 그 역사와 전통이 다르므로 서양에서 수입된 근대성 또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소위 일본주의를 비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 당시의 사상적 흐름을 읽어야 한다. 즉, 근대성을 일본에 맞지 않는 서양의 것으로 규정짓고, 전통의 것, 그러니까 메이지 이전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복고파에 대항하여, 근대성은 서양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극히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한편, 마루야마 마사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독립, 일국독립론으로부터 근대성의 귀결인 국민주의를 발견해낸다. 개인을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사회와 국가에 헌신할 수 있도록 그 주체성을 보장한다면, 그것이 곧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후쿠자와의 논리를 통해 근대성 비판에 향변한다. 당시 전시속에서 후쿠자와는 서양사상의 추종자로 비판받고 격하되는 중이었는데, 마루야마는 후쿠자와를 복권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위에서 언급된 일본주의와는 반대방향인 혁신파 계통으로부터의 비판, 특히 체제로 전향한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의 근대성 비판을 방어하고 있다. 즉, 공적이익이 요구되는 이른바 "현대사회"에서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근대성은 시대착오적이라며 그 초극을 주장했던 혁신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항하여, 오히려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국민"의 등장이야말로 근대성의 끝판이며, 그런 국민이 등장하지 못한 일본은 근대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마루야마는 1. 일본은 서양과는 달라서 근대화를 하면 안된다 2. 일본은 근대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두가지 주장에 맞섰다. 1에 대해서는 근대화는 일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반박했고, 2에 대해서는 일본은 아직 근대화를 하지도 못했다고 반박했다.

2.2. 억압의 이양

논문「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마루야마는 억압의 이양(移讓)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라는 현상을 말한다. 마루야마는 일본 국민을 오랫동안 예종적인 상황에 몰아넣었으며, 또 전세계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몰고 갔던 이데올로기적 요인의 실체를 사상구조 내지는 심리적 기반의 분석을 통해 면밀히 해부, 설명하고자 하였다. '억압의 이양' 개념은 그 과정에서 나온 설명개념 중 하나다. 쉽게 말해 내리갈굼이다.

천황제 국가인 일본의 국가질서는 권위와 권력이 일체화된 천황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그 억압적 성격은 지위의 고저에 따라 낮은 쪽으로 이양된다는 것. 국내에서는 비루한 인민이며 영내에서는 이등병이지만 나라 바깥에 나가면 황군으로서의 궁극적 가치와 이어짐으로써 무한한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된다. 시민생활에서 그리고 군대생활에서 압박을 이양해야 할 곳을 갖지 못한 대중들이 일단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모든 중압으로부터 일거에 해방되려고 하는 폭발적인 충동에 쫓기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6]

'억압의 이양' 개념은 이렇듯 '일제 치하의 일본인'이라는 특수하고 한정적인 집단의 행동양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 개념은 '궁극적 가치'의 내용 설정만 건드린다면, 얼마든지 다른 시대 다른 집단의 내리갈굼적 행동양상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때문에 현대에는 어떤 집단의 동족혐오, 수평 폭력 등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3. '학계의 천황' 논란

자유주의자로서 전후 학계의 사상적 구심 역할을 하였으므로 일본 학계 내에서 '학계의 천황', '마루야마 덴노'로 불릴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라는 한국 학계 내에서의 통설이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흔히 마루야마 마사오는 "마루야마텐노오"(丸山天皇)라고 불리운다. 지금 이 시점에 생존해계신 마루야마선생께서 이 말을 좋아할리 만무하고 또 학계에서 누구나 다 이런 감정으로 그를 대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내가 70년대 동경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시절에만해도 이미 그는 은퇴한 후였건만 학생들이 마루야마선생을 말할때는 흔히 "마루야마텐노오"라고 불렀다. 일본사회에는 맥아더의 실책으로 인한 것이었든 일본역사의 구조적 연속성에 기인한 것이었든 천황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때, 그 천황이 차지하는 절대적 구심점의 역할을 학계에서는 마루야마선생이 차지하고 있다는 존엄성에 대한 호칭이 "마루야마텐노오"라는 말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7]
가장 구체적이고 발언 시기가 오랜 증언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지금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세일 교수였다(서울법대출신, 동경대학 경제학부 연구생, 코넬대학 박사, KDI연구원, 서울법대교수). 그런데 내가 "마루야마텐노오"라는 외경스러운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바로 박세일군으로부터였다. 75년 어느 시절 신쥬쿠 와세다대학근처에서 있었음직한 그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당시 경제학부의 스미야 교수 밑에서 청강생의 자격으로 동대입학을 시도하고 있었던 박세일군은 나보다 동대체류기간이 길었다. 선배로서 사상사를 전공한다고 하는 나에게 건네주는 충고였다. "일본사상은 마루야마로부터 출발하지. 일본에서는 마루야마를 마루야마텐노오라 불러. 그만큼 일본사상에 있어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야. 일본에 유학와보니까 누구든지 마루야마를 얘기하더군. (후략) "[8]
이같은 '마루야마 덴노' 설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요 저서들을 사실상 전담하여 번역한 김석근이 해당 역서들의 역자 서문 또는 후기에서 거의 빠짐없이 언급하는 바이고( ex. 일본의 사상,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전중과 전후 사이), 마루야마 마사오 사거 당시 김석근이 그를 추모한 글에서도 거론한 바이다. 또한 마루야마 마사오 관련 책들이 한국에 소개될 때마다 서평, 기사, 출판사 책 소개 등에 상투적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일본인이 이 설을 증언한 사례는 적어도 김석근의 마루야마 관련 역서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 위키백과 마루야마 마사오 항목에서도 이 설을 찾아볼 수 없고, 천황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있는 일본 사회 내에서(비록 당시가 메이지·쇼와 전중 풍조에서 상당 부분 벗어난 70년대이며 그런 풍조에서 비교적 더욱 자유로웠을 학계 내에서라도) '마루야마 덴노'라는 노골적인 별칭이 대대적으로 유행했으리라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한 '마루야마 덴노', 그 이전에 '마루야마 마사오'가 한국 일반에 소개되기 시작한 기점은 다름 아닌 1996년, 일본정치사상사연구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그 시점인데(이 이전에 마루야마 마사오에 관한 교양서는 고사하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저서의 번역서조차 한 권이 나오지 않았다), 김석근은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국어판 역자 후기에서는 예의 설을 언급하지 않다가 이후의 역서 역자 서문 또는 후기에서부터 그 설을 언급한다(ex. 일본의 사상,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전중과 전후 사이). 그리고 마루야마 관련 서적의 각종 서평, 기사, 출판사 책 소개 등에서 '마루야마 덴노'의 '신화'가 '상식'으로 언급된 것은 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국어판을 제외하면 2000년대 이후이다.

이상으로써 종합하여 한 번 섣불리 미루어 본다면, 한국 학계와 일반에 퍼진 '마루야마 덴노'의 설은 75년 김용옥이 박세일로부터 들은 증언에 기초한 증언을 96년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국어판의 해제에서 내보임으로써 한국 학계와 일반에 최초 제시가 되었고, 해당 서의 역자인 김석근이 이 설을 수용함으로써 이후의 역서에서도 지속적으로 제시가 되었으며, 그 파급으로 인해 오늘날 학계와 일반의 '상식'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진실로 그렇다면 위에 인용된 바로 저 박세일의 증언에 기초한 도올의 증언이 '마루야마 덴노'의 설 상식화의 시발점이 되는 셈이며, 이 증언 내용의 보다 구체적인 규명이야말로 '마루야마 덴노' 설의 입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건의 근원적 당사자인 박세일 교수는 2017년 초에 사망하였다. 때문에 박세일 교수가 증언한 바, "일본에서는 마루야마를 마루야마텐노오라 불러. 그만큼 일본사상에 있어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야. 일본에 유학와보니까 누구든지 마루야마를 얘기하더군." 이 문장 내에서의 '일본에서는'의 '일본', '누구든지'의 '누구(들)'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곧 어떤 범위의 어떤 개개인들을 지목하는지 알기 힘들게 되었다. 만약 박세일 교수가 생존하여 이를 밝힐 수 있었다면, 범학계적인 '마루야마 덴노' 인식의 실체성의 입증까지는 물론 무리였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인식 조류가 특정 규모 내에서 분명 존재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박 교수의 허풍이나 과장이었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을 터이다.

어찌 되었든 오에 겐자부로도 "나는 마루야마 마사오 선생이 일본의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듯이 마루야마가 전후 일본의 사상적 호수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근현대 제 학자 및 지식인의 공통된 견해이며 주류 견해이므로, 그 가운데 숭앙심이 지나쳐 '마루야마 덴노'와 같은 신화적인 관점에까지 밀고 나아간 인식 조류가 있었을 공산은 없지 않다.

좌우지간, 이 설의 사실 또는 과장성 여부는 어떻든 간에, 헤겔리언(넓은 의미로)이며 자유주의자였던 마루야마 본인은 이러한 별명의 존재를 의식했다면 그닥 좋아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마루야마가 자신의 '천황' 별명을 실제로 듣고 싫은 반응을 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 역시 별다른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마 앞서 인용한 도올의 발언이 와전된 결과일 것이다.

4. 주요 저서

  • 일본정치사상사연구 (1952년)
    • 한국어 번역본은 1995년 통나무 출판사가 같은 제목으로 출판했다. 옮긴이는 김석근(金錫根)이며 도올 김용옥의 해제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 절판 상태
  •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956~1957년)
    • 한국어 번역본은 1997년 한길사가 출판했다. 옮긴이는 김석근이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가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 일본의 사상 (1961년)
    • 한국어 번역본은 1998년 한길사가 출판했다(1998년 제1판, 2012년 제2판). 옮긴이는 김석근이다.
  • 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 (1976년)
    • 한국어 번역본은 2011년 휴머니스트에서 출판했다. 옮긴이는 김석근이다.
  • 『문명론의 개략』[9]을 읽는다 (1986년)
    • 한국어 번역본은 2007년 문학동네에서 출판했다. 옮긴이는 김석근이다. 현재 절판 상태.
  • 충성과 반역: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 (1992년)
    • 한국어 번역본은 1998년 나남출판에서 출판했다. 옮긴이는 박충석(朴忠錫)과 김석근이다. 현재 절판 상태.

5. 같이 보기


[1] 천황 중심 '국가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온건한 형태의 서구적 '국민주의'는 지지했다. [2] '동양학도'의 의미가 동양학을 하는 학도들인지, 동양의 학도들인지는 분명치 않다. 도올이 워낙에 웬만하면 띄어쓸 것도 붙여서 쓰기를 좋아하는지라... [3] 마루야마의 대표작인 『日本政治思想史硏究』의 한국어판에 수록된 김용옥의 해제(解題)에서 소개되는, 김용옥이 마루야마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한글 맞춤법에 맞고 이해가 쉽도록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하고 몇몇 부분에 한자를 병기하였다. 하여튼, 이런 마루야마에 대한 김용옥의 평은 "기모노를 입고 태어난 헤겔리언(Hegelian)." [4] 현재의 오사카부 오사카시 아베노구 [5] 헤겔주의 역사철학적인 관점에서 근세 일본 사상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근대 일본의 주요 담론들, 즉 부국강병론, 존황양이론 등을 분석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며, (당시 기준으로) 현대 일본의 미래를 논하는 책이다. 당장에 펴 보면 초장부터 헤겔의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역사 속의 이성/역사철학강의)를 인용해 소위 '중국의 정체성(停滯性)'을 까내리면서 시작한다. 이는 물론 우리 일본은 쫌 달랐다는 얘기로 연결된다. [6] 강준만. 「미국사산책7」 p.54 [7] 김용옥,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국어판, 해제, 11쪽 [8] 김용옥,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국어판, 해제, 14쪽 [9] 후쿠자와 유키치의 중기 저서. [10] 다만 그의 성향상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이였던 일본사회당도 씹어댔다. 오늘날의 입헌민주당(2020년)과 비슷한 포지션의 지식인이였으나, 당대 일본 정치판에서는 보수주의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만 주요 정당이였기 때문에, 좌파 자유주의자였던 마루야마 특성상 정치적으론 모두까기 인형에 가까웠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