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Little Nemo미국 만화가 윈저 맥케이(1867~1934)가 1905년부터 1926년까지 매주 토요일에 연재한 신문 만화.
주인공 꼬마 네모가 꿈에서 침대를 타고 다른 세계(슬럼버랜드)로 놀러가며 벌이는 온갖 여행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매편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꿈에서 깬다는 결말로 끝나며 만화 자체는 연속되는 스토리가 없는 해프닝 위주의 단편이다. 훗날 장편영화로 만들 때 기승전결이 없고 플롯이 없는 이 만화를 어떻게 한 편의 스토리 영화로 줄거리를 연결할까로 시나리오를 만드는데 고생을 해야 했다.
2. 미디어 믹스
2.1. 애니메이션 영화
2.1.1. 1911년작
자세한 내용은 리틀 네모(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2.1.2. 1989년작
작가가 죽고 50 여년이 지난 1989년에 일본과 미국의 합작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했다. 스태프가 여러 번 바뀌었으며 최종적인 감독은 하타 마사미(波多正美)와 윌리엄 T. 하츠가 되었다. 각본은 크리스 콜럼버스와 리차드 아우텐 , 콘티는 크레딧상에는 하타 마사미, 토미자와 노부오, 토모나가 카즈히데, 오오츠카 야스오 4명으로 나온다. 작화에는 토모나가 카즈히데와 토미자와 노부오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참가했다.
일본 도쿄 무비 신사(현 TMS)가 제작(製作) 프로덕션으로 크리스 콜럼버스가 각본에 참여해서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개봉해서 평은 그냥 그런 애니메이션이라는 평을 듣고 3,500만 달러 제작비 절반도 못 거두며 전세계 흥행 1,140만 달러에 그치며 망했다. 노스탤지어 크리틱도 이 영화를 리뷰했는데 영화 자체의 영상미는 볼 만하다고 했지만 전개가 매우 뜬금 없고 이상하다고 혹평하였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진전될라 치면 자꾸 주인공이 꿈에서 깨고 그 이야기는 꿈에서 일어난 것이 되는데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니까 보는 사람은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상영시간은 94분이지만 미국판으로는 84분이며 이 버전이 한국에 비디오로 나왔다. 1993년 국내 출시판 성우는 네모 역을 이선호, 플립 역을 이인성이 맡았다.
2.1.2.1. 제작 비화
도쿄 무비 신사의 사장이었던 후지오카 유타카가 세계 시장 진출을 목표로 만든 야심작. 그는 회사 창립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며 그 목표가 이 작품이었다. 장장 15년 동안 이런 대작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걸 만들겠다고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이란 회사를 차려 오랜 시간 거액을 투자해 숙련 인력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대로 결과는 흥행 대참패로 도쿄 무비 신사가 한 번 망할 뻔한 비운의 작품이 되었다.일본 측에서는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의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오오츠카 야스오, 토모나가 카즈히데, 콘도 요시후미, 야마모토 니조, 츠키오카 사다오, 스기이 기사부로, 데자키 오사무 등 당대 내로라하는 애니메이터가 관여했고, 연출조수 역할로 카타부치 스나오도 참여했다.[2]시나리오 초안은 미국의 유명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썼고, 유명 프랑스 만화가 장 지로도 각본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작화팀에는 디즈니의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팀인 '나인 올드맨'의 두 멤버가 자문역을 맡았다.
이렇듯 당시 일본측 제작팀에는 미국 LA로 건너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일본과 미국에서 최고급 인력을 끌어모으고, 미국에서의 극장 개봉을 위해 프로듀서도 미국 프로덕션과 손을 잡고, 흥행을 위해 얼굴마담격으로 저명한 인사를 고용했는데, 이 미국 측 영화 프로듀서 게리 커츠[3]가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독불장군식으로, 일본측 인력이 제시하는 아이디어나 건의는 번번히 거부하거나 거절해버렸다. 결정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이에 편집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후지오카와 게리 커츠는 공동제작을 하기로 하고 합작 회사도 만들고 미국에도 텔레콤 미국지부를 차리고 공동총지휘직을 나눠맡았는데 후지오카가 자금 관리 등의 돈줄을, 게리 커츠가 스토리의 내용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게리 커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저명한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시나리오 초안을 쓰게 하고, 각본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만들어나갔다. 다카하타와 미야자키는 그것에 불만을 품고 일본으로 돌아왔다.[4] 오오츠카 야스오는 자신의 저서 '리틀 네모의 야망'에서 게리 커츠의 만행을 고발했다.
데자키 오사무도 이 작품의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마이티 오봇츠로 가버렸다고 한다. 카타부치 스나오도 리틀 네모로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제작이 지지부진해진 사이에 마이티 오봇츠에서 연출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그게 실제 데뷔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스태프가 마이티 오봇츠로 흘러가서 마이티 오봇츠는 호화 스태프가 되었다. 마이티 오봇츠도 망했지만. [5]
- 훗날 토미자와 노부오의 인터뷰에 의하면, 원작은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미국식으로 미국에서 제작하면 스토리 담당은 프로듀서 담담이라고 한다. 그래서 토모나가 카즈히데가 말하기는, 게리 커츠가 1주일에 1번 정도 현장에 오면[6], 일본측 직원들이 그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이 아이디어는 좋다. 이 아이디어는 필요없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그가 돌아가면 타카하타 이사오는 분해서 왜 이 아이디어는 필요가 없냐고 이것을 빼면 이야기가 연결이 안되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문화적인 차이로 마찰이 있고, 일본인 스태프가 미국인하고 일을 하는 것이 싫다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일본측 인력이 반발하고 줄줄이 그만둬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일본 최고의 작화, 연출 인력을 자랑하던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은 이 사건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파벌이 회사를 집단 퇴사함으로서 반토막이 나버리고 만다.(미야자키는 초기 시나리오 초안에 반발, 오락영화가 무엇인가라는 글과 함께 자신의 기획안을 내보지만 게리 커츠가 거부해서 불만을 품고 도중하차 일본으로 귀국한다. 1982년 1월부터는 아니메쥬에서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니까 그 전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지오카 사장에게 다른 기획안들을 제시했는데 거부당하자 1982년 11월 22일 텔레콤을 퇴사, 타카하타도 각본대체안을 게리 커츠에게 제안했다가 그가 거부하자 1983년에 퇴사) 본격적인 작화 작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45억엔의 자금이 바닥이 나버렸다. 결국, 2가지 버전의 파일럿 필름(이후 1987년에 3번째 파일럿 필름이 만들어졌다.)과 수 많은 각본과 방대한 스케치와 이미지 보드, 그림 콘티 등만을 남긴 채, 1978년부터 시작한 야심찬 계획은 1984년 8월에 제작은 일단 중단됐다. 말썽이 많은 게리 커츠하고는 1983년에 계약을 해지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자 미국측 스태프도 전부 그만 뒀다고 한다. 여담으로 게리 커츠는 1986년에 만든 영화 '오즈'가 흥행 실패하고 파산하면서 영화계를 떠났다.
3가지 버전의 파일럿[7] |
콘도 요시후미와 토모나가 카즈히데가 만든 파일럿 필름(1984년)만 보아도, 굳이 미국 측과 제휴하지 않고 일본의 인력만으로 제작했더라도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이 만들어졌을 터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 이 파일럿 필름을 본 미국측 스태프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여기서 니모의 얼굴은 미국인 애니메이터가 그린 원화를 콘도나 토모나가가 수정을 했다고 한다. 오오츠카 말로는 미국에서는 원화가가 그린 그림을 타인이 수정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프로듀서가 납득할 때까지 그 원화 담당자가 다시 그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을 보고, 오오츠카 야스오는 텔레콤 회사도 그만두고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은퇴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게 맡겨두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토모나가와 토미자와에 의하면, 이후 텔레콤은 차기작으로 워너 브라더스와 합작 작업을 하면서 미국의 하청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고 그런 미국식 작화 스타일에 대해 오오츠카 야스오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했으며 그보다 나이가 어린 스태프한테 원화를 수정당한 적도 있어서 그런 것에 자존심을 상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어서 점점 현장에 출근을 하지 않게 되고 결국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기술고문직'이라는 직함으로 2010년까지 텔레콤 소속으로 남았지만 출근을 매일 하지 않는 비상근직이었다.
- 오오츠카 야스오 말로는 파일럿 필름은 콘도와 토모나가 판 외에도 츠키오카 사다오판, 데자키 오사무판이 더 있었다고 한다. 오오츠카 야스오가 츠키오카가 신인을 이상하게 교육했다고 지적했었는데 [8] 그때 신인들 가르치면서 만든 게 이 츠키오카 판 파일럿 필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츠키오카 사다오 판은 유실되어 볼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TMS에서 필름을 찾았는지 2019년 새로운 블루레이가 출시되면서 츠키오카판도 특전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완성본도 작화는 꽤 괜찮은 편이다. 스태프가 줄줄이 그만뒀지만 그래도 텔레콤 프로덕션을 떠나지 않은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남아서 제작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다만 원래 계획대로의 멤버가 모여서 만들었다면 이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오오츠카 야스오의 경우는 1984년에 만든 콘도와 토모나가 콤비가 만든 파일럿 영상을 보고 제작 현장에서 손을 뗐다고 말하는 인터뷰 영상도 있고, 스튜디오 지브리(1985년 6월 15일 창립일자)를 창립하기 전에 스즈키 토시오가 찾아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는데,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와 같이 일하면 몸이 힘들어서 싫다고 거절했고 제작 현장에서 은퇴해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사는게 좋다고 말하는 인터뷰 영상이 있어서[9] [10] , 이 때는 제작현장에서 떠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후의 작화 감수를 몇 편 한 것 빼고는 작품 활동이 없다. 하지만 1987년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의 콘티와 감수[11]로 일시적으로 복귀했었다. 하지만 리틀 네모의 제작에 끝까지 관여한 토모나가가 오오츠카의 콘티는 이전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그렸다고 말한 것 보면 새로 그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크레딧상에는 콘티를 그린 사람이 4명(하타 마사미, 토미자와 노부오, 토모나가 카즈히데, 오오츠카 야스오)이다. 오오츠카가 이 작품의 콘티를 혼자서 전부 그린 것도 아니고, 끝까지 남아서 제작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콘티는 일부가 쓰였을 수 있다. 오오츠카의 지인인 평론가 카노 세이지는 "기관차 돌격 장면이 오오츠카 씨 담당입니다." 라고 했다. #
여담으로 이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레이 브레드버리의 초안을 읽고 이래도 되냐며 "오락영화는 무엇인가?"라는 글과 함께 경영진에게 따지면서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시놉시스 원안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성공으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한 이후 천공의 성 라퓨타로 만들어졌다. 이후 NHK 측에서는 가이낙스를 기용해 이 원안을 바탕으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만든다.
비둘기 집의 비둘기들과 함께 서서 지붕 위에서 트럼펫을 부는 미국 소년 니모 그 지붕 위에 비행선이 착륙, 타고 있던 사람은 해적 프릿프 프랏프 비행선이 찾아 간 곳은 공중에 떠 있는 왕국 슬램버랜드. 그 곳은 황폐해졌고, 오래된 수많은 로봇들이 버려져 있었다. 왕국의 군주는 프린세스 나우시카. |
2.2. 게임
아케이드판 | 패밀리컴퓨터판 |
일본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게임이다. 일단 일본 현지화를 했지만 애니가 일본에서 망해서 게임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패밀리 컴퓨터 판은 재미를 갖춘 수작이며 서양에서는 정상 유통되어 서양에서는 추억의 게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서도 숨은 명작으로 통하며 2023년 기준 중고 양품이 8000엔 대 가격으로 거래된다.
패미컴판은 주인공에게 포켓몬 모래두지 스킨을 씌운 해적판이 있다.
3. 기타
- 꼬마펭귄 핑구의 Pingu's Dream 에피소드에서 오마주된 적이 있다.
[1]
한국에서는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도 '네모'라고 읽지만,
영어 발음은 '니모'라고 발음한다. 《
니모를 찾아서》의 그 니모이다.
[2]
당시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토미노 요시유키는 "
미야자키 하야오도
오오츠카 야스오 씨도 모두 미국으로 가버렸네요. 하지만 전 일본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었다.
[3]
Gary Kurtz,
청춘낙서,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등의 제작에 참여했었다. 후지오카 사장이 미국으로 가서
조지 루카스에게 찾아가서 공동제작을 부탁했는데, 그가 스타워즈 시리즈,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등으로 바쁘다고 프로듀서직을 거절하면서 소개해준 인물이 게리 커츠였다. 2018년에 78세로 사망했다.
[4]
이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잠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갔었는데 자신의 작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때 디즈니의 한 신인이 난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게
존 라세터였다. 둘은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친해진 것이다. 후지오카 사장이 미국 업계 사람들에게 일본의 기술력과 작품성을 자랑하기 위해 자사가 제작한 칼리오스로의 성과 자린코 치에의 상영회를 가끔씩 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애니메이터나 업계 사람들은 일본의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술을 우습게 보고 일본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이때만 해도 일본 애니가 미국에서 극장 애니로 성공한 경우는 없었기에 대중적으로 일본 애니
양덕이 아닌한 모르는게 당연했다. 아니면 TV 애니조차도
로보텍같이 미국 업체에게 난도질당해 미국에서 대박을 거둠에도 이걸 미국애니로 알던 경우가 대중적으로 그때만 해도 흔했던 시절이다. 나중에서야 포켓몬스터 극장판이 미국에서 꽤 대박 흥행을 거두면서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5]
당시 도쿄 무비 신사는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해외에 진출하겠다고 야심을 불태우며 무리와 실패를 반복하던 시절이라 암흑기였다.
[6]
게리 커츠는 당시 다른 작품도 동시 진행중이라서 바빠서 제작 현장에 자주 오지 않았다
[7]
순서대로
츠키오카 사다오 판.
콘도 요시후미&
토모나가 카즈히데 판.
데자키 오사무 판이다.
[8]
츠키오카 사다오 항목과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 서술되어 있다.
[9]
출전: ドキュメンタリー『飄々~拝啓、大塚康生様~』 Hyohyo -Dear Mr.Yasuo Otsuka-(2019) 51분 49초부터
[10]
토모나가 카즈히데도 이 다큐멘타리 영화에서 출연해서 파일럿 필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오츠카 야스오씨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그림콘티를 그렸는데 미국인하고는 테이스트의 차이라고 할까 생각의 차이로 잘 안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캐릭터 개발 단계에서도 그 외 여러가지 것에서 미국인과는 "컬쳐 갭"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오츠카는 일본식으로 이미 완성된 사람이라서 못 참았을 것이다. 자신들은 아직 젊어서 아직 확고한 스타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미국 합작이니까 미국인이 말하는 것도 받아들이자는 분위기였는데, 오오츠카 씨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11]
콘티는 작화팀이 각각 분담을 해서 오오츠카는 약 20%정도를 그렸으며, 작화는 오오츠카가 전부 체크했다. 원래 감독이 도망가서 대타로 일시 복귀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