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6:02:52

루정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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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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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
정체 陸徵祥
간체 陆征祥
한국식 독음 육징상
영문 Lou Tseng-tsiang / Lu Zhengxiang
자흔(子欣)
출생 1871년 6월 12일 청나라 강소성 상해
사망 1949년 1월 15일 벨기에 브뤼셀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제국 파일:중화제국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북경 동문관
직업 외교관, 정치가, 사제
종교 가톨릭
국무총리
재임 기간
대행 1912년 6월 15일 ~ 1912년 6월 29일
2대 1912년 6월 29일 ~ 1912년 9월 25일
대행 1915년 10월 27일 ~ 1915년 12월 21일
1대[1] 1915년 12월 21일 ~ 1916년 3월 2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화민국 초대 외교총장2.3. 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2.4. 외교총장과 중화제국 국무경2.5. 성직에 귀의한 말년
3. 주요 경력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청나라 말의 외교관, 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 육정상, 혹은 육징양(洋)으로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청말육징상.jpg
청나라 시절의 루정샹

1871년 상하이시의 기독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육운봉(陸雲峰)은 그를 상하이의 광방언관(廣方言館)과 북경동문관(同文館)에 넣어 공부하게 했으며 졸업 후 흠차대신 허경징(許景澄)을 따라 러시아 제국 공사관 4등 비서관 겸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벨기에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네덜란드 등지에서 근무하며 번역관을 지냈다. 외국어에 능통했는데 특히 프랑스어 구사 실력이 뛰어났다. 1899년 니콜라이 2세가 주최한 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주 러시아 공사 양루의 통역관으로 후웨이더 등과 함께 참석하여 적십자 조약 가입, 헤이그 평화 회의 정식 참여에 일조했다. 이때 직업외교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웨이쥔, 옌후이칭, 뤄원간, 스자오지 등 많은 청년들에게 외교관 경험을 쌓게 하여 후학양성에 힘썼다.

1906년 네덜란드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했으며 1907년 참사관 신분으로 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 군축과 국제분쟁 해결을 논했다. 이렇게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구웨이쥔 등 여러 신흥 외교관을 발굴, 육성했다.

2.2. 중화민국 초대 외교총장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탕사오이 내각에서 초대 외교총장에 임명되었다. 루정샹은 이때 영어가 유창한 옌후이칭을 외교차장에 임명할 것, 부서 내의 인사 및 업무를 실행할 때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위안스카이의 승낙을 받았다.

외교총장에 취임한 루정샹은 외교부 개혁을 실시, 외교부의 전문화와 조직개편, 전문외교관 충원 및 육성에 노력했다. 루정샹은 프랑스 제도를 참고하여 <외교부조직장정>을 규정하여 1912년 10월 8일에 발표하였고 외교부를 총장 1인, 차장 1인, 참사 2~4인, 비서 4인, 국장 5인, 첨사 8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고 외정국, 통상국, 교제국, 서정국으로 나누었다. 루정샹은 이 중에서도 외정사를 중시하여 국계, 자문, 조약, 금령 4과로 다시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전문적 외교 인재 양성을 중시하여 3원칙을 결정하였다.
  • 1. 외교인원은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 2. 채용 기준은 성의 경계를 타파하고 외국어에 능숙해야 한다.
  • 3. 외교부 내외의 인사 추천은 이 원칙에 적합하지 않으면 접수하지 않는다.

또한 1915년 외교관영사관고시령을 발표, 외교관 선발 시험을 4개의 장으로 나누어 국문, 외국어, 헌법, 국제겅봅, 국제사법, 오교법, 행정법규,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정치학, 경제학, 재정학, 상업사, 약장성안, 외교사건, 초의문독 과목을 통과해야 외교관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시험을 통과한 외교관들은 외교부서, 해외공관에서 근무하여 외국어와 전문 지식을 수학한 후 분야에 맞는 직무에 종사하게 했다. 그리고 해외 공관 직원들도 앞선 3원칙에 따라서 외교부에서 직접 파견하였고 이로 인하여 우수한 외교관들이 많이 양성되었으며 혼란한 중화민국의 정치상황 속에서도 외교부는 독자적인 분야를 공고히하며 안정적인 부서로 남을 수 있었다.

이렇듯 외교총장으로 루정샹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국민정부 시기까지 승계되어 중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6월 17일 탕사오이 위안스카이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사직하자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되었다. 탕사오이 사직 이후 동맹회는 영미의 방식을 모방하여 정당 내각을 조직하여 내각의 모든 각료들이 동반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완전한 정당 내각을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내각은 수개의 정당이나 무소속과 공동으로 연합하여 조직하지 않으면 결코 원만한 내각을 조직할 수 없다며 동맹회의 주장에 반대했다.

통일공화당은 탕사오이의 사직을 만류하는 한편, 만약 탕사오이가 끝끝내 사퇴한다면 국무총리만 바꾸고 각료는 그대로 남게 하는 프랑스, 일본의 방식을 모방할 것을 주장했다. 공화당은 일부는 정당내각론을, 일부는 독일식 초당내각론을 주장했다. 위안스카이는 모든 정당의 요구를 듣지 않고 초당적인 총리와 혼성내각을 채택하여 무당파이며 만만하여 이용하기 쉬운 육징상을 아예 정식 국무총리로 추천하였는데 동맹회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리위안훙의 공화당과 통일공화당이 루정샹을 지지하여 6월 29일, 참의원에서 루정샹의 정식 국무총리 임명안이 통과, 루정샹은 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루정샹은 어디까지나 외교관으로만 유능한 인물이었다.

2.3. 중화민국 2대 국무총리

오랜 외국 거주 경험과 외교에 능숙하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 루정샹이었지만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한방에 신뢰를 잃고 만다. 7월 중순, 육군총장 돤치루이, 내무총장 자오빙쥔, 해군총장 유관웅을 제외한 모든 총장이 사퇴했고 루정샹은 사퇴한 여섯 총장을 대신하여 재정총장에 저우쯔치(周自齊), 사법총장에 장쭝샹(章宗祥), 교육총장에 손육균, 농림총장에 왕교인, 공상총장에 심병곤, 교통총장에 후웨이더를 임명하여 국회에 제출하고 외교총장은 자신이 겸임하기로 했다. 루정샹이 통일공화당과 공화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각료 임명안은 손쉽게 국회를 통과하리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참의원에 출석한 루정샹이 각료 임명안을 제출한 다음에 실시한 시정연설에서 시정방침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일, 요리 얘기만 하는 등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아 의원들의 눈총을 사게 된 것이다. 루정샹을 불신임한 국회는 루정샹이 제출한 각료 임명 동의안을 부결하였다. 참의원에서는 동맹회가 루정샹의 탄핵안을 제출하며 쑹자오런을 새로운 국무총리로 추대하려했다. 공화당과 공화건설토론회도 잠시 동맹회의 쑹자오런 총리 임명안에 동의하는 등 국회에서는 루정샹 사퇴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는 군경과 어용단체를 풀어 참의원을 협박하여 루정샹의 각료 임명 동의안을 통과시키도록 강요하는 한편 전단지를 살포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말을 잘 듣는 의원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강온양면책을 서서 참의원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또한 루정샹에게 2차 각료 임명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1차 각료 임명안이 부결된 이후에 심약한 루정샹은 충격을 받아 칭병하고 병원에 들어가 각료 명단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루정샹을 대신하여 내무총장에 자오빙쥔, 육군총장에 돤치루이, 해군총장에 유관웅, 재정총장에 주학희, 사법총장에 허세영, 교육총장에 범원염, 농림총장에 진진선, 공상총장에 장작빈, 교통총장에 저우쯔치를 임명, 이를 국회에 제출했는데 공상총장 장작빈만 부결되어 유규일로 교체되었고 마침내 루정샹 내각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루정샹은 여전히 병원에 드러누워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고 루정샹이 세번 연속으로 휴가를 내며 집무를 거부하자 위안스카이는 루정샹이 안되겠다고 여기고 외교총장에 양여호를 임명하고 내무총장 자오빙쥔에게 국무총리를 대행하게 하면서 짧았던 루정샹 내각은 끝을 맺었다.

2.4. 외교총장과 중화제국 국무경

이후 루정샹은 자오빙쥔 내각에서 정치에 복귀, 1913년 선후대차관 사건의 체결에 참여했으며 1915년 1월, 외교총장 쑨바오치 21개조 요구에 저항하여 사직하자 쉬스창 내각에서 다시 외교총장에 임명되어 1915년 21개조 요구에 대해 외교차장 차오루린(曹汝霖)과 함께 일본 제국 공사 히오키마스과 협상하였는데 교섭 경과를 언론과 열강에 폭로하며 일본의 무리한 요구에 저항했다. 21개조 요구 중에 가장 무리수였던 5조라도 반박된 것에는 루정샹의 공이 있었다.

한편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루정샹에게 압력을 넣어 열강이 제제에 찬성하고 있다면서 제제 추진 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정작 각국 공사들은 루정샹에게 제제에 대해 반대하는 뜻을 전해왔다. 이후 1916년 5월,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국무총리 쉬스창 홍헌제제에 반대하여 사퇴한 이후 국무경에 임명되어 1916년 3월까지 재임하다가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가 사태 수습을 위해 쉬스창을 다시 국무경에 임명하면서 교체되었다.

1917년 11월, 왕스전 내각에서 다시 한번 외교총장에 임명되었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출두하여 구웨이쥔, 왕정팅, 스자오지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국의 인구 규모, 오랜 역사, 근공검학 프로그램을 통한 공헌을 들어 중국의 대우를 2등국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3등급 대우를 받아 구웨이쥔과 함께 할당된 2명의 대표로 참석했다. 강화회의에서 루정샹과 구웨이쥔은 7개조 의견서를 제출하여 21개조 요구가 무효임을 주장하고 불평등조약 개정을 요구했으나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에게 묵살당했다.

결국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대표단은 이를 정부에 보고했다. 이때 조약 서명 거부를 촉구하는 5.4운동이 일어났고 파리에 있을 때 조약에 서명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교포들과 유학생들에게 숙소가 포위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8월 외교총장에서 사퇴했다. 이후 1922년부터 1927년 국제연맹의 중국 대표로 재직하다가 스위스 공사로 이임했으며 1927년 아내가 사망한 이후 실의에 빠져 모든 공직 생활에 은퇴하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2.5. 성직에 귀의한 말년

1927년 벨기에 브뤼셀의 베네딕토회의 생 앙드리스 성당[2]에서 피에르-셀레스탱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성직을 얻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으며 193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21개조 조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위안스카이의 강요였으며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8월, 교황 비오 12세가 그의 독실한 신앙심을 높이 사서 그를 생 앙드리스 수도원의 명예원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 가톨릭 선교사로 활동하고자 했으나 국공내전이 일어나 계획을 미루었고 1949년 1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외교총장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중화민국 건국 초대 2대
루정샹
( 1912년 3월 30일 ~ 1912년 9월 22일)
양여호
2대 3대 대행
양여호 루정샹
( 1912년 11월 15일 ~ 1913년 9월 4일)
차오루린
4대 5대 서리
쑨바오치 루정샹
( 1915년 1월 27일 ~ 1916년 5월 17일)
차오루린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네이버 지식백과 육징상 문서

5. 관련문서


[1] 중화제국 [2] 한자로는 성안덕은수원(聖安德隱修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