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루이 주르당 Louis Jourd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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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 로베르 쟝드르 Louis Robert Gendre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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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6월 19일 |
프랑스 마르세유 | |
사망 | 2015년 2월 14일 (향년 93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 | |
묘지 |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우드 빌리지 추모 공원 묘지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39년 ~ 1992년 |
배우자 | 베르트 프레데리크 "키크" 주르당(1946년~2014년 사별)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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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출신의 배우.2. 위상
유럽 출신 미남들이 이국성을 무기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시기에 유럽풍의 우아한 외모와 낭랑한 목소리로 활약했다. <패러딘 부인의 사랑>(1947),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 < 지지>(1958), < 예기치 못한 일>(1963) 등이 유명하다. 그레이스 켈리, 레슬리 카롱, 엘리자베스 테일러, 조운 폰테인 등 쟁쟁한 여성 탑스타들의 상대역을 했다.3. 생애 및 활동
미국에선 루이 조단(혹은 조당)으로 불렸다.1921년 아버지 앙리 쟝드르(Henry Gendre)와 어머니 이본 주르당(Yvonne Jourdan) 사이에서 장남 루이 쟝드르(Louis Gendre)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칸 등 프랑스 주요 도시에 여러 호텔을 거느린 호텔 경영인이었다. 아버지의 호텔에 손님으로 묵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등 20세기 예술계 유명인사들과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알게 되면서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어졌다.
남동생 피에르[1]와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드라마티크(Ecole Dramatique)에 입학해 저명한 연극 교육가 르네 시몽[2]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38년 감독 마크 알레그레[3]의 작품 <Entrée des artistes(무대관계자 전용 출입구)>(1938)에서 제작부 보조로 일하면서 업계에 발을 디뎠다. 해당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루이 주베[4]가 루이 쟝드르에게서 배우로 대성할 가능성을 발견하고 알레그레에게 배우로 쓸 것을 추천했다. 배우로 일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인 주르당을 활동명에 쓰게 되었다. 주르당의 말에 따르면 주베는 주르당에게 "그런 얼굴을 갖고 있으면 카메라 뒤에 있을 게 아니라 그 앞으로 뛰어들어야지!"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대스타가 돼있던 샤를 부아예는 프랑스 영화계 복귀작으로 알레그레의 <Le Corsaire(해적)>을 택했고, 루이 주르당은 이 영화를 찍으며 영화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영화 제작은 중단되었고 주르당을 비롯한 배우들은 병역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해당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를 장악하기 시작할 즈음 주르당은 <Untel père et fils(한 아버지와 아들)>을 찍으며 다시 영화일을 시작했다. <La Comédie du bonheur(행복의 희극)>(1940), <L'Arlésienne( 아를 여자)>(1942) 등을 통해 주연급으로 자리를 잡았다.
프로파간다 영화에 출연하라는 독일 당국의 요구를 거절해 강제노동형에 처해졌지만 탈출했고, 칸에서 게슈타포에게 붙들려있던 아버지도 탈출시켰다. 동생 둘과 함께 레지스탕스가 된 주르당은 반나치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고 라 보엠이 원작인 <La Vie de bohème(자유분방한 생활)>(1945) 등 출연작들이 극장가에 활발히 걸리게 되면서 할리우드에서도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1946년 데이비드 O. 셀즈닉의 구애를 받아 할리우드에 당도한 주르당은 셀즈닉이 제작하고 그레고리 펙, 찰스 로튼이 주연한 앨프리드 히치콕의 <패러딘 부인의 사랑>(1947)에서 살인사건 재판의 희생양이 되는 하인 역으로 할리우드 데뷔를 했다.
이 작품은 미묘한 평가를 받았으나 바로 조운 폰테인과 나온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가 성공하면서 소위 라틴 연인의 일종인 프랑스인 연인(French Lover)의 전형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주르당이 틀에 박힌 인물들만 일감으로 주는 셀즈닉에게 항의하며 거듭 출연을 거부하자 셀즈닉은 벌칙으로 주르당에게 여러 번 활동 정지를 먹이기도 했다. 1950년 셀즈닉에게서 주르당의 계약을 사들인 명제작자 대럴 F. 재넉 역시 주르당을 이국적인 연애 상대 정도로만 활용할 뿐이었다.
결국 주르당은 스튜디오 계약에서 빠져나와 배역 중심으로 일을 고르기 시작했다. 1953년 브로드웨이의 "The Immoralist(부도덕가)" 초연에선 게이 고고학자로 나와 연기로 큰 찬사를 받았다. 제럴딘 페이지가 아내, 제임스 딘이 그를 이용해먹는 하인 역이었다. 1955년엔 브로드웨이 연극 "Tonight in Samarkand(오늘밤 사마르칸트에서)"에 출연했다.
이후 전성기가 찾아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배역들을 맡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주연한 < 백조>(1955)에선 순진한 가정교사를, 도리스 데이가 나온 <줄리>(1955)에선 아내에게 광기 어린 집착을 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를 연기했다. < 지지>(1958)의 매력적인 바람둥이 연기로는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뮤지컬 <캉캉>(1960)에선 프랑스 파리 캬바레 주인인 셜리 맥클레인에게 반하는 올곧은 판사, 군상극 < 예기치 못한 일>(1963)에선 재벌 리처드 버튼의 트로피 와이프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연인으로 나왔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입지가 좁아져 1960년대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전형적인 조연 연기와 TV에 집중하게 되었다. 1975년 조르주 페도[5]의 "13 rue de l'amour(사랑의 13번가)"[6] 시카고 알링턴 파크 시어터(Arlington Park Theater) 공연에선 레슬리 카롱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1979년엔 노엘 카워드의 "Present Laughter(현재의 웃음)" 뉴욕 무대에 올랐다.
1980년대초부터 다시 웨스 크레이븐의 SF 스릴러 < 늪지의 괴물>(1982), < 007 옥토퍼시>(1983) 등 화제작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84년엔 무대 뮤지컬판 " 지지"에서 오노레 라샤이유 역[7]으로 미국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했다.
피터 예이츠의 <Year of the Comet>(1992)에 나온 것을 마지막으로 1992년 은퇴했다.
2010년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는데, 친구 시드니 푸아티에이, 커크 더글러스 등이 참석했다. 배우로서 프랑스의 영예를 드높인 점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애국적인 행동 등이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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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앓다가 2015년 2월 14일 베벌리힐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4. 여담
- 비시 프랑스 시절 만난 아내와 평생 함께 했다.
- 외동아들 루이 헨리는 10대 시절부터 각성제, 진정제, 환각제, 술에 빠져들었고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해 1981년 2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주르당과 아들의 관계가 좋았다는 말도 있지만, 주르당이 이런 아들을 용납하지 못해 가혹하게 몰아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 말년에 프랑스와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