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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굴리트의 국대 경력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 밀란의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 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1] 굴리트는 가장 전술 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골키퍼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 이상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굴리트로 시작해서 굴리트로 끝났다.
1.1. UEFA 유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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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1988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유로 1988이었다.
1.2.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끄는 서독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2]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1.3. UEFA 유로 1992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 8강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는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3] 또한 굴리트는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였다. 네덜란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었다.[4]2. 이후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하였고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반 바스텐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굴리트는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5][6][7]
[1]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요한 크루이프의 말처럼,
토탈 풋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술 이해도였다. 크루이프의 체력,
피지컬, 테크닉이 모자란건 결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토탈 풋볼에 대한 기여도가 전술 이해도에 비하면 낮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존재하는데, 1974년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를 4:0으로 박살내고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그 기세가 대단했다. 결승전 상대인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도 지금의 네덜란드에는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강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독일은
베르티 포크츠에게 크루이프를 전담마크 시켰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전담마크 보다는 크루이프와 함께 자폭해서 필드에서 사라지는 전술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크루이프는 최고의 선수도 우승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변명했으나 포크츠는 "나는 볼터치를 3번밖에 하지 못했는데 챔피언이 되었다" 라며 비웃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포크츠의 신체능력이 크루이프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말년의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에 진출한
허정무에게도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굴리트는 신체능력도 뛰어난 선수였다.
[2]
루디 푈러는
2002년 한일 월드컵때
차범근에게 아스피린 운운하던 바로 그 감독 맞다. 헌데 이날은 푈러에게도 악몽의 날이었는데, 레이카르트는 굴리트와 더불어 가장 고귀한 성품의 선수로 유명한 선수였다. 이러다보니 대회 이후에 침을 뱉은 레이카르트가 욕을 먹는게 아니라 오히려 푈러가 얼마나 까불었으면 그 착한 레이카르트가 그랬을까?'' 라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마치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은 이탈리아가 했는데, 정작 전세계 언론은
지네딘 지단은 왜
마르코 마테라치에게 박치기를 했는가?'''로 도배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3]
레이카르트는
중앙 미드필더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지만,
센터백으로도 자주 출장했었다. 정확히 독일전에서 2분만에 골을 꽂아버리면서 2년전의 한을 그대로 풀어버린다.
[4]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데니스 베르캄프를 발굴했다.
[5]
네덜란드가 전력을 온존히 보존했을때를 가정한 멤버는 루드 굴리트,
데니스 베르캄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프랑크 레이카르트,
아론 빈터르,
프랑크 더부르와 같은 정신나간 스쿼드이다. 1998 월드컵 스쿼드에 비해서 하등 꿀릴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월등하다. 굴리트의 존재감이 그러했다.
[6]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물고 물리는 관계이다. 브라질이
펠레 은퇴 후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한테 무너졌고, 네덜란드는 1994년 화려한 멤버로 브라질에게 1점차 패배를 당했고,
거스 히딩크의 1998년에는 창과 창의 대결이며, 사실상의 결승전이라 칭해진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다. 그리고 2010년은 측면을 탈탈 털어버린
아르연 로번과
웨슬리 스네이더의 활약에 브라질은 무너진다. A매치에서 실질적으로 서로 잡고 잡히며 발목을 잡은 두 팀이다.
[7]
굴리트의 대회참가 여부와 전성기 문제가 있긴 한데, 그 해에 굴리트는
AC 밀란과
UC 삼프도리아에서 경기당 0.5골의 결정력을 자랑했던 시기이다. 당시 나이는 32세, 34세의 마라도나가 해당 대회에 참가해서 2경기만에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것을 감안하면, 결코 굴리트의 폼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다시금 강조하지만 굴리트의 주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다. 물론 잘보긴 했지만, 이때는 주로 중미 아니면 공미 심지어 센터백으로도 나오기까지 했는데 경기당 0.5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아드보카트의 팀 장악력은 좋았지만, 그의 최대의 단점은 '작은 장군' 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독불장군식 운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