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1 20:41:38

로버트 드 페러스

성명 로버트 드 페러스
Robert de Ferrers
생몰년도 1239년경 ~ 1279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터트버리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아버지 윌리엄 3세 드 페러스
어머니 마거릿 드 퀸시
형제 윌리엄, 아그네스, 조안, 엘리자베스
배우자 마리 드 뤼지냥, 엘리노어 드 보훈
자녀 존, 토머스, 엘리노어
직위 제6대 더비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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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서서 헨리 3세에게 대적했다.

2. 생애

1239년경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터트버리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윌리엄 3세 드 페러스는 제5대 더비 백작이며, 어머니 마거릿 드 퀸시는 제2대 윈체스터 백작인 로저 드 퀸시의 딸이자 여동생 엘렌, 엘리자베스와 함께 공동 상속녀였다. 형제로 윌리엄[1], 아그네스[2], 조안[3], 엘리자베스[4]가 있었다.

1249년, 헨리 3세는 왕비 앙굴렘의 이자벨의 주선에 따라 10살된 로버트를 이자벨의 친척이자 라마르슈 백작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딸 마리와 약혼시켰다. 7월 26일에 계약이 체결되었고,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254년 3월 24일 또는 28일에 아버지 윌리엄이 사망한 뒤, 터트버리 성을 중심으로 북부 스태퍼드셔, 남부 더비셔, 서부 노팅엄셔에 걸친 광활한 영지와 연간 1,500파운드 상당의 수입 및 더비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로버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헨리 3세는 그의 소유물에 대한 후견인을 임명하기로 했다. 그는 처음에 윌리엄 드 윈튼을 후견인으로 지명했지만, 곧 장남인 에드워드 왕자를 로버트의 후견인으로 세웠다. 1257년, 앙굴렘의 이자벨과 그녀의 삼촌인 피에트로 2세는 왕이 로버트의 영지 통제권을 자기들에게 넘기는 대가로 6,000마크를 지불했다. 1260년 성인이 된 로버트는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로버트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재정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차틀리 성을 포함한 영지 1/3은 어머니 마거릿이 미망인 자격으로 소유했다. 또한 다수의 토지가 로버트의 남동생인 윌리엄과 로버트의 아내 마리 드 뤼지냥에게 할당되었다. 또한 로버트의 아버지는 그에게 800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남겼고, 그는 1262년 이전에 이를 재무부에 반환해야 했다. 그가 유대인에게 대출받아야 했던 건 바로 이 빚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튼 연대기에 따르면, 로버트는 성인이 되어 영지를 직접 경영하게 된 직후 페러스 가문의 후원을 받던 터트버리 수도원을 파괴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다수의 페러스 가문 봉신들의 특권을 불법적으로 침해했으며, 조부와 아버지가 확보한 것보다 더 많은 숲과 마을의 수입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이는 로버트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점, 경험이 부족하고 성격이 다혈질인 점,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통풍에 시달렸던 점에서 기인했다. 이렇듯 자기 영지에서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하며 재산을 모으는 데 급급했던 그는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등 대귀족들의 정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다.

그러나 1263년 4월 25일 망명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시몽 드 몽포르가 본격적으로 헨리 3세와 대결하면서, 그가 중립을 유지하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던스턴블 연대기에 따르면, 로버트는 1263년 5월과 6월에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에드워드 왕자 소유의 3개 성을 점령하고 반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성들은 기록상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데, 학자들은 사우스 웨일스 변경지대에 설립된 왕실 성인 그로스몬트, 스켄프리드, 와이스였을 거로 추정한다.

1264년 1월 말 헨리 3세와 대귀족들의 대립을 중재한 루이 9세가 시몽 드 몽포르 등이 강요한 옥스퍼드 조례를 폐지하는 등 헨리 3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이에 분개한 시몽 드 몽포르 등이 봉기했다. 그는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고, 그해 2월 우스터를 점령한 뒤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거나 투옥했으며, 유대인 지구를 약탈했다. 그는 나중에 유대인에게 빌린 돈을 갚는 걸 회피하기 위해 채무자 기록이 포함된 많은 문서를 터트버리로 가져갔다. 그 후 세번강을 따라 글로스터로 진군한 뒤,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 앙리 드 몽포르와 합세하여 글로스터를 점령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웨일스에 있었기 때문에, 웨일스에서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길목인 글로스터를 장악한 두 사람이 에드워드 왕자를 잡는 건 시간문제인 듯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우스터 성으로 접근한 뒤 우스터 주교의 중재를 통해 앙리 드 몽포르와 휴전 협정을 맺고 로버트를 피해 옥스퍼드로 이동해 아버지 헨리 3세와 합세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 글로스터의 로버트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로버트를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1254년 에드워드 왕자에게 주어졌던 페베릴 성에 대해 로버트가 소유권을 주장한 것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1264년 3월, 에드워드 왕자의 부하들은 스태퍼드셔에 있는 더비 백작의 영지를 습격해 차틀리 성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끌고 갔으며, 재물을 약탈했다. 그해 4월, 에드워드 왕자는 더비 백작령의 중심지인 터트버리 성을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더비 백작의 봉신들로부터 돈을 갈취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로버트가 이에 맞서 자신을 지원해 줄 거라 여기고,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로버트가 에드워드의 공세를 피해 농성하느라 오지 않자, 단독으로 원정을 떠났다.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승리하면서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이 생포된 뒤, 로버트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았다.

그 후 보복에 나선 로버트는 더비셔의 볼소버와 호스턴, 요크셔의 틱힐 등 왕실 및 에드워드 왕자가 소유한 성들을 강제로 접수했다. 또한 노팅엄셔의 포더링헤이 성 공방전을 벌이던 볼드윈 웨이크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며, 6월 말 또는 7월 초에 에드워드 왕자의 주요 성채인 페베릴 성을 접수했다. 그해 가을, 그는 군사 작전을 지속해 서쪽으로 진군해, 에드워드 왕자의 또 다른 주요 요새인 체스터를 접수했다. 그 결과 에드워드 왕자는 미들랜드 북서쪽을 상실했다.

1264년 12월, 에드워드 왕자를 풀어주는 안건을 고려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에드워드 왕자가 페버릴과 체스터를 포함한 영지 상당 부분을 타 지역의 덜 가치 있는 토지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풀어주려 했다. 그는 이를 추진하기 위해 로버트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로버트가 1월 중순에 런던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을 때 페버렐 성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강요했다. 로버트가 이에 불응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그를 불법으로 왕실의 영지를 빼앗은 혐의로 기소해 런던 탑에 가뒀다. 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탈옥에 성공한 에드워드 왕자와 맞서야 했고,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자에게 패사했다.

그 후 권력을 되찾은 헨리 3세는 로버트를 석방했고, 1265년 12월에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는 벌금 1,500 마크와 금컵을 왕에게 바치는 대가로 사면받았고, 후계자가 그의 영지를 물려받는 것도 인정받았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모조리 몰수당했던 것에 비하면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266년 5월 스터필드 영주 볼드윈 드 웨이크를 포함한 이전의 몽포르 지지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더필드 성에서 견고한 방어를 갖추며 토벌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이에 헨리 3세의 조카이며 콘월 백작 리처드의 아들인 알메인의 헨리와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왕실군은 터트버리에서 더필드 성을 우회해 체스터필드로 진군해, 북쪽에 있는 반군 지휘관 존 데이빌의 부대를 격파하려 했다. 이 움직임을 알게 된 로버트는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고, 당시 범람했던 엠버 강을 어렵게 건너 1266년 5월 15일 체스터필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존 데이빌은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더필드 성으로 남하했고, 양군의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중도에서 마주치지 못했다.

그 후 반군이 체스터필드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토머스 와이크스[5]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왕실군이 덮개가 있는 마차를 사용하여 마을에 진입했다고 기술했다. 와이크스는 여기에 더해 로버트 페러스가 전투 당시 통풍에 시달렸고, 전투 후 비열하게 잡혔다고 서술했다. 이로 볼 때, 그는 전투가 끝난 뒤 교회에 숨었다가 억지로 끌려 나온 듯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마을의 한 여성에게 배신당했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동시대 기록은 없다.

로버트는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패배해 체포된 뒤 쇠사슬에 묶인 채 런던으로 끌려갔고, 1266년 말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석방되는 대가로 상속권을 몰수당했다. 그의 영지는 헨리 3세의 차남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에게 넘어갔다. 이후 반군 잔당이 모인 케닐워스 성에서 농성할 때 가담했지만, 나중에 토지 가치의 5배를 벌금으로 지불한 후 영지 소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로버트는 더비 백작을 맡은 에드먼드에게 50,000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 및 작위 반환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기에, 자신과 상속인을 위한 일부 영지만 회수할 수 있었고, 에드먼드는 더비 백작 직위를 유지했다.

1273년, 로버트는 형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십자군을 떠났다가 귀환한 에드먼드를 상대로 무력을 동원해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으려 했다. 그는 체틀리 성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에드먼드가 반격을 가해 몰아냈다. 이후 로버트는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1273년 5월, 로버트는 클레어와 일련의 계약을 체결해 라비와 미저리 사이의 체스터셔에 있는 토지 대부분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지를 클레어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글로스터 백작은 로버트의 몸값을 합리적으로 책정할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법정에서 로버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재판은 에드워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직후인 1274년 10월에 시작되었다. 로버트는 케닐워스 협정에 따라 7년 이내에 자신의 재산을 상환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헨리 3세가 로버트로부터 50,000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 및 직위 반환을 포기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받았지만, 실제로 그 돈을 내지 못했으니 영지 소유권 및 작위는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는 자기가 투옥 중이었고, 압력을 받았기에 그 조건에 억지로 동의했다고 주장했지만, 에드먼드는 그 계약은 총리의 면전에서 체결되어 완전한 법적 유효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에드워드 1세는 동생 에드먼드가 더비 백작을 칭할 권리가 있으며, 영지도 계속 소유할 거라고 선언했다.

1275년, 로버트는 체틀리 영지를 돌려받기 위해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성채는 에드먼드의 소유로 남았지만, 토지는 로버트에게 넘어갔다. 4년 후인 1279년에 사망했을 때, 로버트는 채틀리만 남았다. 그의 유해는 스태퍼드셔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리 드 뤼지냥(1242 ~ 1266): 라 마르슈 및 앙굴렘 백작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딸. 자녀를 낳지 못했다.
  • 엘리노어 드 보훈(? ~ 1314): 브레컨 남작 험프리 드 보훈의 딸.
    • 존 페러스(1271 ~ 1312): 초대 체틀리 남작.
    • 토머스 페러스(? ~ ?): 기사.
    • 엘리노어 페러스(? ~ 1308): 초대 피츠월터 남작 월터스 우드햄의 로버트 피츠월터의 부인.


[1] 1240 ~ 1287, 그로비 기사이자 지주 [2] ? ~ 1290, 로버트 드 무스케그로스의 아내 [3] ? ~ 1310, 초대 버클리 남작 토머스 드 버클리의 아내 [4] ? ~ 1297,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과 초혼, 웨일스 공 다비드 압 그루퍼드와 재혼 [5] 1222 ~ 1292, 옥스퍼드 인근 오세니 수도원의 수도자, 연대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