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7 20:08:46

루이스 전투


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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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전투
영어: Battle of Lewes
파일:루이스 전투.jpg
시기 1264년 5월 14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 루이스
원인 옥스퍼드 조례를 둘러싼 헨리 3세 시몽 드 몽포르 세력의 대립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의회파 귀족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왕자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콘월 백작 리처드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파일:300px-Arms_of_John_de_Warenne,_6th_Earl_of_Surrey_(d.1304).svg.png 존 드 워렌
파일:Blason_Guillaume_de_Valence.svg.png 윌리엄 드 발랑스
파일:330px-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시몽 드 몽포르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
파일:300px-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앙리 드 몽포르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기 드 몽포르
파일:330px-Blason_Thomas_Le_Despencer.svg.png 휴 르 디스펜서
병력 적군보다 많은 수 수천 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의회파 귀족군의 승리.
영향 잉글랜드 왕실의 무력화, 시몽 드 몽포르의 주도하에 의회 정치 실시.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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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64년 5월 14월, 헨리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 귀족군이 서식스의 루이스에서 맡붙은 회전. 헨리 3세를 비롯한 잉글랜드 왕실 인사들은 이 전투에서 참패해 생포되었고, 시몽 드 몽포르가 주도하는 의회 정치가 개막했다.

2. 배경

1258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의 관리들이 자금을 강압적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손을 함부로 대고, 뤼지낭 가문 등 푸아투 출신 귀족들이 궁정에서 설치며,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재정 압박을 가해 그들이 빚 독촉을 심하게 하게 한 것에 반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들도 왕이 자기네 교구 자금을 무제한으로 각출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해 4월, 시몽 드 몽포르, 휴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터 드 몽포르, 피터 드 사보이,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1258년 4월 30일, 로저 비고드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그 대신 국왕이 절반을, 귀족들이 절반을 선출한, 귀족과 성직자 2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왕의 선택을 받고 의회에 자리를 계속 잡자, 공모자들은 더 많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6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옥스퍼드 조례>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를 통과했으며, 헨리 3세는 압력에 직면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귀족에서만 선출되는 15명의 소규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를 통해 감시되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하급 귀족과 신사들의 압력은 헨리 3세의 관리들과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출된 위원회에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푸아투 출신 인사는 없었다. 그 후 위원회는 주요 뤼지냥파 인사들을 궁정에서 추방하고 전국의 주요 요새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모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휴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급기야 1260년 4월 리처드 드 클레어와 시몽 드 몽포르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가 당사자들을 중재해 화해시킴으로써 수그러들었다.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비밀리에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다. 1261년 6월, 헨리 3세는 교황이 자신을 맹세에서 풀어주었다고 선언하고, 즉시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모자들을 보안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여러 왕궁의 통제권을 탈환했다. 시몽과 리처드가 이끄는 반대 세력은 일시적으로 연합해 왕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전역에 경쟁적인 지방 정부 체계를 세웠다. 헨리 3세는 엘레오노르 왕비의 협조를 받아 프로방스에서 대규모 용병대를 데려와서 이에 맞섰다. 이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몹시 껄끄러웠던 귀족들은 한 발 물러섰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시몽은 프랑스로 자진해서 망명했으며, 귀족 위원회는 붕괴하였다.

이리하여 왕권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헨리 3세는 귀족들에게 <킹스턴 조례>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약은 콘월 백작 리처드를 감독관으로 선임하고, 리처드가 타협을 끌어내지 못하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지원하는 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왕과 귀족들 간의 미해결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귀족들이 이렇게 하면 프랑스 왕실의 간섭이 심해지니 철회해달라고 청하자, 헨리 3세는 킹스턴 조례를 완화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곧 인기 없는 시칠리아 정책을 재개했고, 자기에게 대항했던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뜯어내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그러던 1262년 7월 14일, 리처드 드 클레어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끌었던 급진파 편을 들었다. 여기에 웨일스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헨리 3세가 웨일스 일대에 확보했던 영토의 통제력을 상당히 잃어버렸고, 교황청마저 입장을 뒤집어서 옥스퍼드 조례가 합법적이라고 판정해 버리면서, 헨리 3세의 입지가 난처해졌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1263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옥스퍼드에서 왕실에 대항하는 귀족 의회를 소집한 후 푸아투 인사를 추방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헨리 3세가 받아들이지 않자,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이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길버트 드 클레어 등 급진파 인사들과 함께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그와 함께 한 반란군은 유대인 대출자에게 진 빚 기록을 고의로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263년 6월, 런던 시민들이 반란에 호응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0명을 학살했다.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는 반란군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혔다. 엘레오노르는 윈저에 있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런던 군중에게 발각되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263년 7월 15일, 시몽 드 몽포르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그는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헨리 3세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급진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통치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런던 탑에서 풀려난 헨리 3세는 킹스턴 조약에 규정한 대로 루이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은 킹스턴 조례를 받아들인 적 없다며 이를 따르길 기피했지만,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건 싫었기에 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사절단[1]과 함께 루이 9세가 있던 아미앵에 친히 찾아갔다.

헨리 3세는 아미앵에서 자신이 장관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가 있는데 귀족들이 이를 거부했으며, 왕의 성이 파괴되고 왕의 땅이 황무지로 변해버렸다고 호소했다. 그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30만 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황이 맹세를 취소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으니, 귀족들이 조항을 강요하는 걸 못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귀족들은 분쟁의 배경을 설명했고, 헨리 3세 본인이 옥스퍼드 조례를 수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자신들이 실시한 개혁은 왕국에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헨리 3세 본인이 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둬들이는 바람에 왕의 영지가 황폐해지고 성이 파괴된 것이며,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으며, 정의를 타락시켰다고 규탄했다.

루이 9세는 1264년 1월 23일에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잉글랜드가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며 결의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이 이미 조항들을 무효로 했기에, 왕이 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귀족들에게 넘겨진 성은 왕에게 돌려줘야 하며, 헨리 3세는 장관들을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다만 갈등에 연루된 귀족들은 전원 사면받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루이 9세는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침해하는 선례가 세워진다면 자신과 후손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거라 보고, 헨리 3세 편을 들기로 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등은 루이 9세의 판결이 왕에게 유리하고 귀족에게 불리한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여기고,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1264년 2월,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앙리와 시몽이 마르케에 있는 왕당파 귀족 로저 모티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자, 엘레오노르를 파리에 남겨둬서 용병 지원군을 추가로 모집하게 한 뒤, 본인은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갔다.

1264년 4월 3일, 헨리 3세는 옥스퍼드에 왕의 깃발을 계양한 뒤 부하들을 소집했다. 그 후 노샘프턴으로 진군한 왕실군은 노샘프턴 공방전에서 이틀 만에 노샘프턴 성채를 공략하고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을 생포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프랑스로 가는 잉글랜드 남동부의 5개 항구를 점거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우스터, 런던, 캔터베리 및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으며, 로체스터 성을 포위했지만 8일 만에 왕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1264년 5월 초, 헨리 3세의 군대는 서식스의 루이스에 도착한 뒤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국왕은 보병대와 함께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고, 에드워드 왕자는 북쪽으로 500야드(460m) 떨어진 루이스 성에서 기병대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시몽 드 몽포르가 사절을 보내 옥스퍼드 조례를 왕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할 의사가 있으니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헨리 3세는 시몽의 반역을 용납할 수 없다고 봤기에 거부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런던에서 파견한 시민 의용대와 합세한 뒤 왕과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루이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루이스 마을은 우즈 강 서쪽 강둑에서 다운스까지 이어지는 경사지의 바닥에 자리잡았다. 우즈 강은 루이스까지 조수 간만의 차가 컸고, 마을 남쪽 지역은 만조 때마다 침수되어 광대한 습지가 형성되었다. 우즈 강의 동쪽 기슭에는 '카번 힐'로 명명된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마을 북쪽에는 루이스 성이 있었고, 남쪽에는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이 습지 가장자리에 넓은 벽으로 둘러싸였다.

1264년 5월 14일,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는 플레칭 시에서 루이스로 동진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양군의 규모를 크게 과장한 데다 천차만별로 기술했기에, 루이스 전투에 투입된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모든 연대기는 왕실군이 몽포르의 반군보다 많았다고 밝혔다. 왕실군은 반란군이 설마 왕과 정면 대결하려고 접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 사이, 시몽 드 몽포르는 야간 행군을 이어간 끝에 루이스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마일 떨어진 오펌 힐에 군대를 배치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군대를 4개 부대로 나눴다. 3개 부대는 최전선에 배치했고, 4번째 부대는 예비대로 뒀다. 우익 부대는 시몽 드 몽포르의 두 아들인 앙리와 기가 지휘했다. 중앙 부대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지휘했으며, 좌익 부대는 런던 시민 의용대와 니콜라스 드 세그라브가 지휘하는 기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시몽 드 몽포르 본인은 예비대를 이끌었다. 그렇게 군대를 편성한 뒤, 그들은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을 내려다보며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윽고 날이 밝았을 때, 왕실군에 소속된 마부들이 풀을 먹이기 위해 말들을 평원으로 데려갔다. 그러다가 오펌 힐에 반란군이 배치된 걸 보고 기겁해 본진으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접했다. 헨리 3세의 군대는 이 소식에 화들 놀라며 다운스 평원으로 서둘러 달려간 뒤 3개 부대로 편성했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예비대를 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왕실군 우익 부대는 에드워드 왕자가 지휘했는데, 숙련된 군인 다수가 그와 함게 했다. 중앙 부대는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가 지휘했으며, 좌익 부대는 헨리 3세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이 지휘했다.

왕실군의 배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을 때, 반란군이 왕실군을 향해 경사면을 따라 돌격했는데 좌익 부대는 나머지 군대보다 앞서 달려갔다. 왕실군도 이에 맞서 경사면을 따라 올라갔는데, 에드워드 1세의 우익 부대가 앞서 갔다. 이윽고 양 세력은 격렬하게 맞붙었다. 니콜라스 드 세그라브가 지휘하는 좌익 기병대는 에드워드 왕자가 지휘하는 기병대보다 수적으로 앞섰지만, 에드워드 왕자와 왕실 기병대의 강력한 돌격에 압도되어 장교 몇 명이 순식간에 제압되어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나머지는 런던 의용병 부대로 도망치면서 그들의 대열에 혼란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왕자는 지난 해에 어머니가 런던에서 자기와 만나려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런던 시민들에게 추격당해 세인트 폴 성당으로 피신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던 걸 똑똑히 기억했기에, 런던 시민들에게 적의를 강하게 품었다. 그는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런던 의용병대를 몰아붙였고, 런던 의용병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전장에서 달아났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들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하고, 3마일이나 추격하여 런던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후 전장으로 돌아오다가 반군이 후방에 쌓아놓은 짐과 수레를 약탈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는 사이, 반란군 중앙과 우익부대는 몇 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왕실군의 중앙과 좌익부대를 완전히 제압했고, 여러 기사와 귀족들이 생포되었다.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는 아군이 무너지자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풍차에 숨었다가. 반란군 병사들은 나중에 그를 발견한 뒤 "내려와, 내려와, 사악한 밀러야!"라고 조롱했고, 결국 그는 풍차에서 끌려나온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 한편 헨리 3세의 기마는 전투 중에 사살되었고, 신하들은 그를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으로 데려간 뒤 일부 장병들과 합세했다. 패주한 왕실군 대부분은 남쪽으로 쫓겨났고, 일부는 습지로 말을 타고 도망치려 했다가 익사했다. 또다른 이들은 루이스 마을을 통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날이 저물 무렵,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우익 부대가 전장으로 돌아왔다. 이에 몽포르의 군대는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에드워드 왕자는 항전하려 했지만, 대다수 병사가 전세가 기운 걸 눈치채고 달아났고, 소수의 추종자만이 그와 함께 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사절을 각각 보내 항복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은 다음 날 별 수 없이 받아들였다.

4. 이후

루이스 전투가 종결된 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루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으며, 왕으로서 군림하는 걸 보장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의 인질이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유대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많은 빚과 이자를 모조리 취소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주에 평화 유지군을 보냈고, 1264년 6월 23일에 런던에서 새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주의 기사 4명과 전국의 모든 공동체 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는 왕과 국민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향후 의회에서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된 감독 기관을 구축하여 왕을 대신해 법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오직 의회 만이 이들 위원회 인사를 변경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는 시몽 드 몽포르 본인 외에도 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티드 주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하지 못했다. 당초 그와 함께 왕실에 대항했던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이 권력을 온전히 독점한 것에 반감을 품었으며,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캔터베리 근처에 군대를 모집했고, 불로뉴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접견해 새 정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교황청은 1264년 10월 20일 시몽 드 몽포르와 길버트 드 클레어, 그리고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를 파문했다. 1264년 겨울, 웨일스 변경 지대에 배치된 일부 기사가 월링포드 감옥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시도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에드워드를 케닐워스로 이송해 자기 아내의 감독을 받게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압력을 받고 1265년 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새 의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다. 의원들은 주로 교회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요크와 링컨의 각 주와 도시에서 각각 백작 5명과 기사 2명, 그리고 다른 모든 '자치지역'에서 각각 시민 2명이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에서 각각 4명이 선임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귀족과 성직자 외에 하급 기사 및 평민들이 활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하원'의 창립으로 간주한다. 이 의회는 포로 상태에 놓인 에드워드 왕자의 석방 문제를 다뤘다. 3월 31일, 에드워드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과 런던 시민들을 사면하고 향후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주교 10명 등은 더 이상 외국인 남자를 고문으로 두지 않으며, 교황이 잉글랜드 문제에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265년 5월 28일, 에드워드 왕자는 길버트 드 클레어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탈출했다. 그 후 길버트 드 클레어와 함께 군대를 소집한 그는 런던으로 진군해 케닐워스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 시몽을 격파했다. 시몽 드 몽포르도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고, 양자는 8월 4일에 이브샴에서 격돌했다.
[1] 시몽 드 몽포르 본인은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어서 함께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