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홀즈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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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428A> 뉴욕 닉스 No. 613 | |
<colcolor=#fff> 윌리엄 "레드" 홀즈먼 William "Red" Holz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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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8월 10일 |
뉴욕주 브루클린 | |
사망 | 1998년 11월 13일 (향년 78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볼티모어 대학교 뉴욕 시립 대학교 |
신장 | 178cm (5' 10") |
체중 | 79kg (175 lbs)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소속 팀 |
로체스터 로열스 (1945~1953) 밀워키 호크스 (1953~1954) |
지도자 |
밀워키 호크스 (1954~1957, 감독) 뉴욕 닉스 (1957~1967, 어시스턴트 코치) 레오네스 데 폰세(BSN[1]) (1964~1966, 감독) 푸에르토리코 농구 국가대표팀 (1967, 감독) 뉴욕 닉스 (1967~1977 / 1978~1982, 감독) |
등번호 |
16번 - 로체스터 10번 - 밀워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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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현역 시절 로체스터 로열스 소속으로 1946년 NBL 우승, 1951년 NBA 우승을 경험했으며 이후 감독으로서 뉴욕 닉스의 2회 우승을 견인했다.2. 일생
2.1. 선수 시절
1946/47 시즌 당시 로체스터 로열스의 선수단. 맨 앞줄 세 번째 16번 선수가 홀즈먼이다.
1948년 당시의 모습
1950/51 시즌 NBA 우승 당시의 선수단. 앞줄 가운데 선수가 홀즈먼.
1920년에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계 이민자 집안에서[2] 태어난 홀즈먼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농구에 흥미를 지니기 시작해 볼티모어 대학교를 거쳐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당대 명장인 냇 홀먼(1896~1995) 감독에게 농구를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1942년 이후 해군으로 참전해 3년 간 복무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당시 NBL 소속이었던 로체스터 로열스에 입단, 첫 시즌인 1945-46 시즌에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BAA가 NBL을 흡수하여 현재의 NBA로 리브랜딩된 이후인 1950/51 시즌에도 우승에 기여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1954년에 밀워키 호크스를 끝으로 은퇴했다.
2.2. 감독 시절
애제자인 윌리스 리드와 함께.
1953-54 시즌 도중 앤드류 레밴 감독이 쫓겨나자, 곧바로 밀워키 호크스의 감독을 겸했다. 1954-55 시즌부터 감독직에 전념했으나 임기 3년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 1번밖에 못 하고 1956/57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 이후 뉴욕 닉스의 스카우트 겸 코치로 10년간 근무하면서 비시즌 기간 푸에르토리코에서도 잠깐 감독으로 활약했다가 1967년 12월에 전임 딕 맥과이어 감독이 스카우트부장 겸 코치가 되자, 자신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대장' 윌리스 리드를 중심으로 베테랑인 딕 바넷과 데이브 드부셔, 그리고 월트 프레이저와 필 잭슨, 빌 브래들리 등의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황금 라인업을 이루어 리빌딩에 착수했고, 특히 프레이저가 급성장하면서 취임 첫 시즌에 플옵 2년 연속 진출을 달성하여 임기 10년 중 8년 연속 플옵 진출에 파이널 진출 3회를 달성했다. 1969/70 시즌 정규시즌에서 60승 22패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둔 후 파이널에서 엘진 베일러-제리 웨스트-윌트 체임벌린 삼총사가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4승 3패로 꺾어 팀에 첫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1971-72 시즌에는 52승 30패를 거두고 다시 파이널에 올라 또다시 LA 레이커스와 맞붙었지만 베일러가 없어서 그런지 1승 4패로 졌다. 그러나 1972-73 시즌에는 데이브 코웬스- 존 하블리첵-조조 화이트를 축으로 한 보스턴 셀틱스에 밀려 57승 25패로 플레이오프 2번 시드로 밀려났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셀틱스를 7차전만에 꺾고 파이널에 올랐다. 이번에도 또 상대는 레이커스. 이에 닉스는 4-1의 스코어로 비교적 가볍게 잡아내며 두번째 우승을 이루게 되었고, 윌리스 리드는 다시 파이널 MVP를 탔다.
그러나 윌리스 리드가 1974년에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고 프레이저도 점점 노쇠화하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고, 다시 기약없는 암흑기를 향해 걷게 된다. 이로써 홀즈먼은 힘이 부쳤는지 1977년에 자신의 애제자인 리드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잠정 은퇴했으나 리드가 감독으로 별 활약을 못하고 이듬해에 쫓겨나자 바로 감독직에 돌아와 빌 카트라이트, 밥 맥아두 등을 중심으로 리빌딩을 했으나 더 이상 1970년대 초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히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2.3. 말년
레드 아워백과 함께
1985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 해에 닉스는 홀즈먼을 기리기 위해 그의 통산 승수인 '613'이 적힌 유니폼을 영구 결번했다.
말년에는 백혈병으로 고생해오다가 결국 1998년 11월 13일, 뉴욕 뉴 하이드 파크에 있는 롱아일랜드 유대인 의료센터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