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0 21:56:37

라자 농 칙


1. 개요2. 행적3. 기타

1. 개요

Raja Nong Chik bin Raja Zainal Abidin,[1] 1953.2.14 ~

말레이시아의 회계원 출신 정치인. 나집 라작 총리 시절 연방직할시도시복지부[2] 장관(2009-2013)을 지냈으며, 전직 상원의원이다. 당적은 국민전선(BN)의 실질적인 리더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2. 행적

1953년 2월 14일 페락 쿠알라캉사르에서 태어났다. 쿠알라룸푸르 감리교 남자학교를 졸업했으며,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이름난 빅토리아 학원[3]에서 수학했다. 이후 왕립사관학교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웨일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연방경지정리복원기관(FELCRA)에서 근무하면서 전무이사로 승진했으며, 부미푸트라제조사서비스산업협회 의장을 지낸 바 있다. 이외에도 말레이시아 혁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UMNO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부터 2004년까지 UMNO 름바판타이 당협위원장을 지냈다가 2008년에 복귀했다. 당협위원장직에 복귀한 2008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UMNO를 포함한 BN이 사실상 참패했는데,[4] 이 때 름바판타이 국회의원이던 샤리잣 압둘 잘릴 여성부 장관이 당시 수감 중이던 야권의 맹주이자 전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의 딸 누룰 이자 안와르에게 낙선하는 수모를 겪는다.[5] 이 때 라자 농 칙은 당협위원장직에 복귀해 름바판타이에서 지역 기반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2009년에 취임한 나집 라작 신임 총리 밑에서 연방직할시도시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을 따르는 말레이시아의 특성상 입각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직이 필수였는데, 보통 각료들이 맡는 하원의원이 아니었으므로 동시에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임명은 가히 파격적이었는데, 쿠알라룸푸르의 타 국회의원들 중 그의 출신 배경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무명에 가까웠던 사람이 입각했다는 건데,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명문 학교 출신+영국 유학파라는 탄탄한 스펙도 있었지만, 사실상 가문빽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다. 정계에서는 몇 안 되는 왕실원 출신이며,[6] 할아버지 무스타파 알바크리 하산은 초대 선거관리위원장,[7] 아버지 라자 자이날 아비딘 라자 타칙 압둘 라작 시절 보건부 사무총장을 지냈다. 삼촌 이크말 히샴 알바크리 국립 모스크, 푸트라 세계무역센터, 통일말레이국민조직 당사 등으로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국빈 건축가이며, 사촌동생 자힘 알바크리는 이름난 영화 감독이다. 참고로 자힘 알바크리의 친척 중 하나가 전 CIMB 이사 겸 현 재무장관 자프룰 아지즈라는 점을 보면, 진짜 인정을 안 받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가문 출신인 것.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배경과는 달리, 정작 선거에 도전할 때는 모조리 낙선했다. 출마한 시점에서 운이 없었다. 2013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샤리잣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라자 농 칙이 름바판타이 선거구에 대신 출마했는데, 당시 재선에 도전하던 누룰 이자와 빅매치를 벌였으나 낙선했다. 그럼에도 누룰 이자라는, 안와르의 딸이자 야권의 차기 유력 주자를 상대로 낙선했음에도 무려 48.33%의 득표율로 저력을 과시했으며, 이 때문에 졌지만 잘 싸웠다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보답 차원에서 5년 뒤 다시 차출시켰는데, 마침 누룰 이자가 쿠알라룸푸르를 떠나 풀라우피낭 퍼르마탕파우로 옮겨 출마하면서[8] 인민정의당(PKR)에서 자당의 홍보부장이었던 파흐미 파질이 대신 출마했고, 파흐미의 인지도가 누룰 이자와는 비교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라자 농 칙의 승리가 유력해 보였다.

허나 뚜껑을 열어보니 41.80%밖에 득표하지 못 해 5년 전보다 더 큰 격차로 낙선한다.[9] 해당 총선에서 BN이 독립 후 61년 만에 정권을 내준 것은 덤. 일부에서는 향후 제15대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하지만, 명문학교 출신+유학파+왕실 가문+공무원 가문+전직 장관+풍부한 경험이라는 화려한 스펙을 갖고도, 스펙이 훨씬 딸리는 경험이 전무한 후보한테[10] 낙선했다는 점은 선출직을 맡기에는 경쟁력이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거기다가 15대 총선에 2023년에 치러진다는 가정 하에서는[11] 무려 70세가 되니, 나이도 걸림돌이 되는 셈.

결국 2018년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았다. 언급된 대로 신인한테 지역구를 물려주겠다고 밝힌 것은 덤.

그 후 모든 SNS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등 잠적한 것처럼 보였으나, 2020년 모처럼 근황을 드러냈다.

3. 기타

부인 나페사와의 슬하에 두 자녀(라자 파르하나, 라자 함자)를 두고 있다.

[1] 말레이어 위키백과 문서에는 중간에 "나즈무딘(Najmuddin)"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나오고, 구글에도 해당 이름이 언급된 경우가 나오나, 다른 쪽이나 영어 위키백과 문서에는 없다. 즉 이 이름이 있는지 없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상황. 다만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어판보다 영어판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지라(당장 말레이어판은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어판과 비교해도 넘사벽 차이로 문서 수 등 여러 면에서 부실하다), 영어판 쪽이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만... [2] 현 연방직할시부 [3] 단순히 가장 오래된 학교가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도 상당히 손꼽히는 명문 학교다. [4] 외견상으로는 과반 의석을 차지해(140/222) 정권을 유지하는 데 문제는 없었으나, 1974년 이래 BN이 원내 개헌선 이상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점을 감안하면(특히 2004년 11대 총선에서 원내 9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정도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뼈저린 패배인 거나 마찬가지. 당장 수도권은 인민동맹(PR)에게 패했으며,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총리의 연고지 풀라우피낭 주도 PR에게 함락당했다. 결국 이 여파로 압둘라 총리는 사임하고 말았다. [5] 하지만 이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어 내각에 잔류할 수 있었고, 2009년 UMNO 여성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정치 활동은 계속 했으나, 선거에는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8년 총선에서 UMNO/BN이 정권을 상실하자 이 책임으로 지도부가 총사퇴하면서 본인도 덩달아 사임했고, 이로서 그의 정치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6] 이름에 있는 Raja(왕)가 이를 반증한다. [7] 이포 그의 이름을 딴 거리(Jalan Mustapha Al-Bakri)가 실존한다. [8] 본디 퍼르마탕파우는 부친 안와르의 지역구였는데, 2015년 유죄 판결로 직을 상실하면서 모친 완 아지자 완 이스마일이 대신 출마해 당선된 곳이었다. 2018년에는 완 아지자가 수도권(정확히는 슬랑오르)의 판단으로 내려오는 대신 누룰 이자가 퍼르마탕파우로 올라간 것. [9] 물론 파흐미의 인지도가 약했는지, 파흐미는 누룰 이자의 51.39%보다 조금 낮은 50.24%를 득표했다. 득표수를 보면 5년 전 누룰 이자와 비교했을 때 파흐미는 약 2천 표 정도 더 득표한 반면, 라자 농 칙은 약 1,400표 덜 득표했다. 즉 득표수 차는 적어 보이지만, 문제는 득표율로 환산할 경우 3.03%에서 8.44%로 더 벌어진 것. 사실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후보로 출마한 파우지 아부 바카르가 7.96%를 득표해 표를 갈라먹기는 했지만, 이미 파흐미가 턱걸이라도 과반을 득표한 관계로 아무런 의미는 없다. [10] 파흐미도 라자 농 칙과 마찬가지로 유학파 출신이나(다만 영국 유학파 출신의 라자 농 칙과는 달리 파흐미는 미국 유학파이다), 정계 입문 전에는 배우로 활동한 게 전부고(그마저도 대단하게 활동한 건 아니다), 정치권에서도 PKR 홍보부장을 맡았을 뿐이다. [11] 다만 2020년 정치 위기, 코로나 19 등을 겪으면서 조기 총선설이 나돌고 있고, 무히딘 야신 현 총리도 코로나 19가 종식되는 대로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고 밝히면서 조기 총선에 무게를 싣는 중이다. 문제는 코로나 19가 언제 끝날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