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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국왕 에리스포에 Erispoe |
||
이름 | 에리스포에(Erispoë)[1] | |
출생 |
820년 즈음 브르타뉴 |
|
사망 |
857년
11월 12일 브르타뉴 왕국 탈렉삭 |
|
재위 | 브르타뉴 왕국의 왕 | |
851년 ~ 857년 | ||
아버지 | 노미노에 | |
배우자 | 마르모헤크 | |
자녀 | 코난, 성명 미상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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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브르타뉴 왕국의 국왕으로 처음 인정받은 인물. 그러나 857년 테레삭 교회 제단에서 암살당했다.2. 행적
노미노에의 아들로, 843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블리앵 전투에서 낭트 백작 르노를 주살하고 랑베르 2세가 낭트 백작으로 군림하게 했다. 851년 아버지가 방돔으로 진격해 약탈을 자행하던 도중 사망한 뒤 브르타뉴군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이후에도 랑베르 2세와 함께 공세를 이어갔다.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더 이상 이들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형제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로부터 색슨족 파견대를 접수받은 뒤 4,000 ~ 6,000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브르타뉴군을 쳐부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리스포에는 랑베르 2세와 함께 브르타뉴로 회군한 뒤, 빌랭 강변의 쟁란트에서 진영을 세우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851년 8월 22일, 샤를 2세가 이끄는 프랑크군이 쟁란트에 도착했다. 이날 샤를 2세는 군대를 두 줄로 배치했다. 프랑크군은 후방에 배치되었고, 색슨 용병들은 전면에 배치되어 강인하기로 소문난 브르타뉴 기병대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에리스포에는 색슨 용병대를 향해 투창을 퍼부어서 프랑크 전선 뒤로 후퇴시키게 했다. 이후 브르타뉴 기병대는 프랑크군을 향해 투창을 퍼붓다가 적군의 대열이 흐트러졌을 때 돌격해 타격을 입히고, 반격하려 하면 후퇴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이에 참지 못한 프랑크인들이 대열을 이탈해 자기들을 추격하면 즉시 재집결한 뒤 이들을 포위섬멸했다. <앙굴렘 연대기>(Chronicon Aquitanicum)에 따르면, 브르타뉴 기병대는 앞뒤에서 투창을 능숙하게 다뤘다고 한다.
전투는 8월 23일까지 이틀간 이어졌고, 프랑크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브르타뉴군의 피해는 지극히 미미했다. 샤를 2세는 공포에 사로잡혀 8월 23일 밤에 군대 전체를 내버려두고 도주했다. 다음날 새벽에 왕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된 프랑크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브르타뉴군은 숙영지르 들어가서 보물과 무기를 탈취한 뒤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해 가능한 한 많은 탈주병을 학살했다. 이날 투르 백작 비비앵, 궁정백 힐메라드 등 프랑크 측 고위인사들이 피살되었다. 이제 브르타뉴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샤를 2세는 앙제에서 에리스포에와 회담했다.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는 이 회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미노에의 아들 에리스포에는 앙제로 와서 샤를에게 왕족의 상징과 그의 아버지의 샘물을 섬물로 받았으며, 렌, 낭트 및 레츠를 수여받았다."
이때 체결된 앙제 협정에서, 샤를 2세는 에리스포에를 브르타뉴의 왕으로 인정하고 렌, 낭트 및 레츠가 브르타뉴의 땅이라는 데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에리스포에는 자신의 주교좌를 액타르 주교에게 돌려줬으며, 서프랑크 왕국을 더 이상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853년, 낭트가 고드프리드가 이끄는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에게 약탈당했다. 이에 에리스포에는 덴마크 국왕 호리크 1세의 조카인 시그트리크와 연합하여 노르웨이군이 자리잡고 있던 그랑데 비세 섬을 공동으로 포위했다. 노르웨이인들은 곧 항복하고 승자에게 선물을 바쳤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시그트리크는 바다로 돌아가다가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시로 상륙했다가 샤를 2세의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856년, 샤를 2세의 아들인 루이 2세와 에리스포에의 딸간의 약혼이 이뤄졌다. 샤를 2세는 이 결혼을 성사시켜서 브르타뉴인들과 더 이상 갈등을 벌이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는 에리스포에의 딸에게 파리에서 투르로 이어지는 르망 공국을 지참금으로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혼이 성립되기 전인 857년 11월 12일, 에리스포에는 탈렉삭 교회 제단에서 사촌 살로몬을 포함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피살당했다. 암살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서프랑크 왕국과의 결혼 동맹이 이뤄지면 더 많은 영토를 탈취하고 재물을 획득할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고 여긴 브르타뉴 귀족들이 이를 막기 위해 암살을 감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사후 살로몬이 브르타뉴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 마르모헤크: 브르타뉴 귀족의 여식이라고만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