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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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7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츠구 徳川家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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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09년 8월 8일 |
사망 | 1716년 6월 19일 (향년 6세) |
신체 | 135cm[1], A형[2] |
원호 | 유쇼인(有章院) |
재임기간 | 1713년 ~ 17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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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의 제7대 쇼군. 정덕의 치(正德之治, 쇼토쿠노치, 쇼토쿠의 치)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일본 역사상 제일 어린 나이에 쇼군에 취임하여 일찍 죽은 탓에 '쇼넨 쿠보'(少年 公方) 또는 '쇼넨 쇼군'이라고 불린다.2. 생애
'이에츠구'라는 이름은 당시 상황(上皇)이었던 레이겐 덴노가 직접 하사한 이름이었다. 상황이었던 레이겐 덴노가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살아있을 적, 후지와라(藤原)씨 고셋케(오섭가)의 우두머리이자 후지와라씨 전체의 종가였던 고노에 모토히로[近衛基熙]를 통해 이에츠구와 요시코 내친왕(吉子内親王, 1714~1758)의 혼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일찍 사망하자 요시코 내친왕(吉子内親王)은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만일 오래 살았으면 최초의 '공무합체'는 도쿠가와 이에츠구와 요시코 내친왕(吉子内親王)이 되었을 거라고.도쿠가와 이에노부와 오키요(1658 ~ 1752)[4]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넷째 아들이었으며 1709년 출생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나베마츠'(鍋松). 이에츠구 위와 아래로도 형제, 남매들이 있긴 했지만 정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토요히메는 1681년, 세 형과 남동생 그리고 성별은 전하지 않는 동생이 1699, 1707, 1708~1710, 1710, 1711이라는 짧은 생을 산 데다 심지어는 양녀까지 6세에 사망한다. 살아남은 자식이 나베마츠(이에츠구) 밖에 없었다.
1712년, 제6대 쇼군에 취임한 지 4년째 되던 해에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병으로 쓰러졌고, 가신인 아라이 하쿠세키(1657 ~ 1725)와 마나베 아키후사(1666 ~ 1720)를 불러 후계를 지시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너무 어렸던 탓에 쇼군 이에노부는 오와리에 있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인 도쿠가와 무네하루(徳川宗春, 1696 ~ 1764)를 후계로 지명했다고 하며, 이후 또 다른 유언으로 이에츠구를 쇼군으로 세우고, 무네하루가 섭정으로 정무를 대행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이에노부는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후계를 놓고 마찰이 일었다고 한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오와리에서 무네하루 공 가신들이 오면 막부의 신료들과 갈등이 생겨서 천하가 소란해진다. 차라리 이에츠구 공을 쇼군으로 세우고 우리들이 후견을 하는게 낫다."
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다른 이들은 "이에츠구 공은 아직 어리다. 게다가 후계자 없이 돌아가시면 그 뒤는 어떻게 하나?"
라는 반박이 일었다. 이에 아라이 하쿠세키가 "그렇게 되면 그때 요시미츠 공을 옹립하면 된다."
라고 설득해서 1713년 어린 이에츠구가 쇼군의 직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겨우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쇼군이 된 탓에 정무는 아라이 하쿠세키와 마나베 아키후사가 전담해 쇼토쿠의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인 겟코인(月光院)과 마나베 아키후사 사이에 불륜설이 돌았고, 1714년에는 오오쿠에서 에지마 이쿠시마 사건이 일어나 어머니의 세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에츠구는 제왕학 교육을 받아 아라이 하쿠세키도 이에츠구의 영특함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라이 하쿠세키와 마나베 아키후사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1716년 3월에 감기가 악화되어 병석에 누운 끝에 결국 8세의 나이로 4월 30일에 사망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죽음으로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핏줄은 쇼군에서 끊기게 되었고, 키슈 도쿠가와 가문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제8대 쇼군으로 뒤를 잇게 되었다. 다만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는 딸인 치요히메가 있었는데, 치요히메의 손자가 오와리 도쿠가와 당주인 도쿠가와 요시미츠였다. 즉 이에미츠 아들들의 후손은 단절되었으나 가계가 끊긴 것은 아닌 셈이다.[5]
도쿠가와 이에츠구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촌수는 요시무네가 재종조(6촌 대숙부)에 해당했다고 한다.
3. 기타
재위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후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 이르는 역대 쇼군들 가운데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지 못한 유일한 쇼군이 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에츠구에 대한 언급이 나오긴 했다.[6]재임기간이 짧아서 큰 의미는 없지만 그의 치세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 후반과 일치하며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 재위기와도 일치한다.
[1]
위패로 추정한 사망 당시의 키다. 사망한 나이를 감안하면 오히려 굉장한 장신으로
거인증으로 추정된다. 2022년 현재 일본의 6세 남아, 여아 평균 신장이 115cm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전전대 쇼군은 성년에도 키가 130cm 미만의
왜소증 환자였다.(...)
[2]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혈액형.
[近衛基熙]
1648 ~ 1722.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인 덴에이인의 아버지였으며 "타이코(태합)"로 불린 적이 있었다.
[4]
서민 출신으로 이에노부 사후에 '겟코인'(月光院)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이전 설명에는 오오쿠에 들어와서 얻었다고 되어 있었으나 오오쿠에 들어가기 전부터 있었던 첩이었다.
[5]
치요히메의 후손은 21세기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
일본 황실.
[6]
숙종실록 53권, 숙종 39년 5월 30일 병오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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