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와 조선 대에 전시나 변란이 발생했을 때 제수하던 전시 군사·행정 사령탑.2. 설명
조선시대에는 의정부의 재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1품 정승이 겸직하는 전시 군사·행정의 사령탑격 직위였다. 주로 전시에 맡은 각 도의 군권과 행정권을 총괄했다. 조선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다.[1]고려말 공민왕 대 이후 왜구의 침략이 심해진 상황에서 도순찰사(都巡察使)·순찰사(巡察使)·도찰리사(都察理使)·찰리사(察理使) 등과 함께 제수되어 군을 통솔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조선 세종 대에는 북계(서북면)와 동계(동북면)에 행성(行城)의 축조를 주도하기 위하여, 세조 대에는 보법(保法) 실시에 따른 군적(軍籍) 개혁과 진관제(鎭管制) 정비를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려와는 다르게 파견되는 관리의 품계에 따라 칭호가 구분되었다. 1488년(성종 19)에 정1품관은 도체찰사, 종1품관은 체찰사, 정2품관은 도순찰사, 종2품관은 순찰사로 규정되었으며, 추가로 정3품관은 도찰리사, 종3품관은 찰리사로 칭하였다.
1510년(중종 5)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된 후로 도체찰사가 군령관의 정점이 되어 군령과 행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후 4인의 도체찰사( 류성룡, 이원익, 정철, 윤두수)가 임명되어 각 도들의 전시행정을 맡다보니 도원수 김명원에게 4인의 도체찰사가 제각각의 군령을 내리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에 도체찰사를 남과 북을 각 총괄하는 2인으로 감하여 혼란을 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부의 4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도원수 권율을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북부의 4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도체찰사 유성룡은 병조판서 이항복과 함께 후방지원에 전념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0년(선조 33)에는 좌의정 이항복이 남부 4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를 겸직하였고, 동년 이원익이 다시 남부 4도 도체찰사를 맡은 후 병으로 물러나자 판중추부사 이덕형이 남부 4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는 이원익이 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도원수 장만과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2]을 비롯한 정부군을 지휘했다. 친정을 청했으나 연로하여 공주로 피난가는 왕을 호종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이원익이 또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도원수 장만을 지휘했다. 이쯤 되면 전문 도체찰사 수준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전문 도체찰사 이원익이 사망한 터라 김류가 도체찰사였지만 아들인 강도검찰사 김경징이 강화유수 장신과 야기한 갈등과 지휘권 혼란이 너무 커 묻힌 감이 있다. 게다가 도원수 김자점과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 심기원[3] 또한 지휘권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더군다나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김류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때 호종하여 들어간 뒤 외부와 연락이 끊겨 뭘 해 볼 수도 없었다.
이 도체찰사 제도는 전후에도 이어저 숙종대까지 이르렀다. 제수되는 관리의 품계에 따라 정1품 도체찰사, 종1품 체찰사, 정2품 도순찰사, 종2품 순찰사[4], 정3품 도찰리사, 종3품 찰리사 등으로 나뉜다.
[1]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합동참모의장 겸 계엄사령관의 직책쯤 된다.
[2]
당시 기존의 도원수는 장만이었으나 장만이 평양 전투에서 패하고 연락이 끊기자 심기원을 도원수로 제수한 듯 하다.
[3]
당시 기존의 도원수는 김자점이었으나 김자점이 토산 전투에서 패해 연락이 끊기자 심기원을 도원수로 제수한 듯하다.
[4]
주로 각 지역의
관찰사가 겸임하였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감영을 순영이라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