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04:21:46

더 후 콘서트 압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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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더 후 콘서트 압사 참사.jpg
▲ 사고 이후 현장에 남겨진 피해자들의 신발과 소지품.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4. 유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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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Who Concert Tragedy

1979년 12월 3일 미국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열린 더 후 콘서트에서 일어난 압사사고.

2. 사고 당시

당시 더 후는 드러머인 키스 문의 사후에 반등을 위해 미국 투어를 다니고 있었다. 키스 문이 없었더라도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답게 인기가 엄청났기에, 신시내티의 리버프론트 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티켓 18,343장도 2시간 만에 완판이 되었다. 문제는 당시 티켓에 좌석이 정해져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티켓 판매 방식은 선착순이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원하는 좌석을 차지하고, 마지막에 온 사람이 남은 자리를 차지하는 식이었다. 거기다 공연장에 좌석은 17,000개였으니, 1,343명은 서서 공연을 봐야했다.

그렇게 1979년 12월 3일, 오후 1시에 사람들이 공연장에 도착했다. 오후 3시가 되자 경찰이 와서 대기중이던 사람들을 정리하려 했다. 오후 7시가 되어서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의 발도 못볼 정도로 엄청나게 온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사람들에 눌려 숨을 못쉬고 기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공연장에서 로저 달트리가 마이크 체크를 하면서 살짝 노래가 흘러나왔고, 이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흥분해 문을 밀기 시작했다. 밀다 못해 아예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사람들도 나왔다. 사람들은 문에 병을 던지며 유리를 깼고, 더 밀어붙이자 문이 열렸다. 그렇게 공연장의 6개 문 중 2개가 열리자, 사람들은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공연장 내 직원이 어떻게든 사람들을 말려보려 했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막을 순 없었다. 사람들은 문을 부숴가며까지 들어왔고, 부서진 문에 부상을 입는 사람, 넘어지는 사람, 그리고 넘어진 사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모여 그 사람들이 내뿜는 수증기가 보일 정도였고, 사람들의 사이에 낀채 몸이 뜬 채 떠밀려 이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직원들은 사람이 너무 몰린 것은 봤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았다 보니 사망자가 나온 사실을 몰랐다. 사태가 진정되고, 사람들이 빠져 나간 뒤에야 사망자가 나온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신히 부상만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사람들에게 끼이면서 신발이 벗겨지거나 지갑등의 소지품들을 잃었다. 사망자에게서 나온 핏자국, 그 핏자국을 밟은 사람들의 발자국도 바닥에 가득했다. 공연장 내엔 의료시설이 있었는데, 이 의료시설도 부상자들로 가득 차 모두 수용을 못했고, 남은 부상자들은 인근 5곳의 병원으로 이송됐다. 부상자 상당수는 다리에 큰 멍이 들었다.

사고를 파악한 직원들은 지금 상황에서 콘서트를 취소했다간 1만8천여명의 관중들이 또다시 압사사고를 일으킬수도 있단 생각에 취소하지 않았고, 공연은 그대로 진행됐다. 시신은 현장에서 옮겨졌고,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결국 이 사고로 11명이 사망했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15세, 가장 나이 많은 사망자는 27세였다. 사망자 상당수는 오하이오 출신이었고, 2명은 켄터키 출신이었다. 부상자도 많았고, 그 중 8명은 중상이었다.

해당 사건은 똑같이 위대한 밴드인 롤링 스톤스의 공연 중에 벌어진 사건인 알타몬트 공연 사건과 함께, 미국 공연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남았다.

3. 사고 이후

더 후 멤버들은 공연이 끝나기 전 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건 소식을 접한 뒤 당연히 충격을 받아 다음 공연의 취소까지 고려했으나, 이미 예매한 팬들을 위해 취소하지 않고 공연을 계속했다. 대신 다음 공연 당시 이 압사사고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말과 함께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장의 문이 열린 곳은 2곳이었으나, 그 중 1곳에서만 압사사고가 일어났다. 때문에 반대편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가 일어난 것도 모른 채 공연을 즐겼고, 공연이 끝나고서야 사건을 알게 된 사람들이 다수였다.

언론에선 당시 사망자들을 물어뜯기에 바빴다. 희생자들이 약에 취해있었다, 술에 취해있었다며 몰아가기도 했다.

사고 이후 선착순 좌석 제도는 중단됐다. 지정된 좌석이 있는 표를 팔아야만 콘서트를 열수 있게 됐다.

리버프론트 공연장은 헤리태지 뱅크 센터(Heritage Bank Center)로 이름을 바꿨고, 2015년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명패가 설치됐다. #

2022년 5월, 더 후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신시내티를 찾아와 다시 공연을 펼쳤다. 공연을 하면서 당시 사망자 11명의 이름을 언급하며 추모하는 시간이 있었다. #

4. 유사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