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문화탄압과 관련 사건 일지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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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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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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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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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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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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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좌익소아병의 두 가지 전술>을 판매한 서점주 2명을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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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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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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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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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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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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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 어린이 만화모니터 모임이 지난해 12월부터 동년 1월까지 초등학생 자녀를 둔 서울시내 어머니 228명을 대상으로 <
보물섬>, <
소년중앙>, <
새소년> 등 3개 어린이 잡지에 실린 만화들을 조사한 결과
유익한 내용을 지닌 만화는 59편 중 19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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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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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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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1심에서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에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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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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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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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법 시행령이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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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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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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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1심에사 친구출판사의 대표 이상경 씨에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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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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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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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은 6월 1일에 학생회관 라운지 2층에서 6.10 남북학생회담에 앞서 조통특위가 투쟁선언식장에서 인공기를 휘날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학생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사실 문제의 인공기는 북한 인공기가 아닌 연극 <통일밥>에 쓰일 1946년 조선인민공화국 깃발임이 밝혀졌다.
당시 기사
반박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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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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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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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서울대학교 오월제에서 개최될 희곡 <통일밥> 소품 중 인공기 발견 건으로 대본작가인 주인석과 연극반 회장을 연행해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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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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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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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조국통일학생추진위원회(이하 통학추)'가 편집한 책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를 펴낸 도서출판 남풍을 압수수색하여
책 1천여권을 압수하고 영업부장 박완규 씨를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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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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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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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희곡 <통일밥>의 내용과 관련하여 필자인 주인석 씨와 서울대 연극부장을 불러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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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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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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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잠들지 않는 남도(노민영 엮음)>, <제주민중항쟁(아라리연구원 엮음)>, <해방조선> 등 7종에 대해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여
검찰에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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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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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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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민중항쟁>, <해방조선> 등 6종의 사회과학서적에 국보법에 저촉되는지를 심사해달라는 문화공보부의 사법심사의뢰를 받고
'불온좌경서적' 여부의 검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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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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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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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민주정의당이 발표한 '미수교국 예술작품 국내개방' 시책에 따라 북한, 일본, 남아공을 제외한 중국, 소련, 동구권 등 준적성국가의 음악 등 순수 예술작품들이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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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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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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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 특별조치의 후속조치로 문화공보부는
백석,
박태원,
임화,
이태준 등 1백 20여명에 달하는 월/납북 문인들의 작품들을
해금 조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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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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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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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통일밥>의 작가인 주인석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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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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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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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YWCA, 대한어머니중앙연합회, 전국주부교실중앙회, 한국청소년도서출판협의회, 한국소비자연맹 등 7곳의 시민/사회단체가
불량도서 추방운동을 동년 10월부터 연말까지 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 주관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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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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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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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항소심에서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에 대해 원심대로 징역 1년 6개월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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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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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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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서울 종로구 당주동 소재 '논장서적'에 대해 영장 없이 압수수색을 실시하여 <김일성사상비판> 2권, <조직전략전술> 2권, <해방조선 II> 2권 등을
압수했다. 이날 숙명여대 앞 창조서점과 젊은예수서점에서 <김일성사상비판> 2권, <민족해방철학> 2권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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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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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도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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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는 교도소 내 재소자들의 일일 TV시청 허용, 신문구독 허용, 도서반입 자유화 등의 내용을 담은 '행형제도개선방안'을
국회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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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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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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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남 검찰총장은 국회 법사위원회 감사에서 북한의 실상을 단순 소개하거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객관적으로 해석해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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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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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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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김순남,
안기영, 이건우 63명의 작곡가와 김주경, 길진섭 등 미술인 41명 등 총합 104명의 월/납북 예술인들의 작품들을
해금 조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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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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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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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착용 등이 완전 합법화되었다. 아울러 '유언비어 유포금지' 조항 역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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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탄압과 관련 사건 일지 1989년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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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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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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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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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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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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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윤리위원회는 공연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무대공연물/대본에 대해 사전심의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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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9일 ~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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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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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 만화 모니터 모임은 '만화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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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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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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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16mm 소형영화 <오, 꿈의 나라>를 만든 홍기선 감독 등 제작진들에 영화법 위반혐의를 씌워
경찰에 고발했다. 이러한 탄압 조치에 대해 영화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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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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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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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소형영화 <오, 꿈의 나라>를 상영한 '예술극장 한마당'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 "반사회성이 드러나지 않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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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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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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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독일문화원은 당일부터 2월 2일까지 개최하려던 소형 독립영화제 '민족영화를 위하여'를 "한-독 문화협정에 어긋난다"는 당국의 상영금지 요청에 따라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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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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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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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월북 뒤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1988년 해금 조치에서 제외된
홍명희, 조령출,
이기영,
한설야 등 5명이
해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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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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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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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당시 '20대 힘전'에서 발생한 경찰의 압류사태에 대해 법원은 '유언비어 유포금지' 조항 폐지를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압류되었던 작품은 그해 3월에 경찰이 반환의사를 밝히면서 당사자들에게 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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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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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도서출판 한길사가 수입/판매예정이던
윤이상의 음악전집 중 <광주여 영원히> 등 4개 음반에 대해 이데올로기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수입을 불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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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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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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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도서출판 아침 등 2개 서점과 대학가 앞 3개 서점들을 상대로 수색을 벌여 <지리산(이기형 저)> 등 3종의 사회과학계열 서적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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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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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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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화위원회가 해체되면서 민간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본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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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7일 ~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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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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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작가회의예비회담'에 참석 예정인 시인
고은, 이기형,
신경림,
백낙청 등 문인 26명이 판문점으로 가던 중에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이틀 뒤에
훈방 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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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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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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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남북작가회담에 참석하려던
고은 시인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를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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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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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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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대전 시내에 소재한 '책사랑' 등 주요 서점들을 영장 없이 압수수색해 <민중의 바다> 등 13종 13권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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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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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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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 가브라스가 1973년에 제작한 영화 <
계엄령>에 대해
공연윤리위원회 측이 잔혹성을 이유로 수입불가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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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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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합동수사본부는 당시 방북 중인 황석영이 귀국할 즉시
구속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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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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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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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5.18 민주화운동 진압 도중 탈영한 계엄군 병사의 양심선언을 다룬 소형영화 <황무지>의 비디오테이프를
서울 혜화동 예술마당 '금강'에서 상영 도중에 압수했다. 이에 제작/연출자인 김태영씨는 이미 당월 4일에 우진필름으로부터 필름을 뺏긴 상태라 비디오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며 상영 강행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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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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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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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펴낸 노동문학사 대표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사인 씨와 편집장 임규찬 씨를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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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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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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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화백 등 재야 미술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당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범국민 진군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백골단들에 의해
파괴/소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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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탄압과 관련 사건 일지 1989년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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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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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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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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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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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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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None>의 저자 이기형과 이를 출판한 도서출판 아침 대표 정동익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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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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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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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를 다룬
박종원 감독의 영화 <
구로아리랑>이 공윤의 사전심의 과정에서 21개 장면이
삭제된 채로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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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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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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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중미술연합 건설준비위원장 겸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 지도위원을 지낸 홍성담 화백이 평양축전에 걸린 자신의 작품 '민족해방운동사' 대형걸개 그림 슬라이드 사진이 북한으로 유출되었다는 혐의로
안기부 소속 기관원 10여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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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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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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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는 홍성담 화백과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공동작업한 '가는패' 대표 차일환과 민미련 공동위원장 정하수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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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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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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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는 홍성담 등 3명의 변호를 맡은 김선수 변호사 등 3명의 접견요청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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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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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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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등 3명의 화가들과 김선수 등 3명의 변호사들은
서동권 안기부장을 상대로
'변호인 접견 금지처분 취소 준항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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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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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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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서출판주간신문잡지윤리위원회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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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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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미술협회장 신학철 화백이 자신의 작품 <
모내기(1987년작)>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시경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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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에 구속된 차일환 씨의 부인은 남편과의 접견 과정에서 남편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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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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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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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에 구속된 차일환 씨는 서울구치소 면회 과정에서 안기부에서 보복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날 홍성담 화백과 정하수 역시 고문사실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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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안기부를 상대로 변호인 접견금지 처분 준항고에 관해
"이유 있다." 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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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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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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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는 평양축전에 전시된 '민족해방운동사'의 일부를 그린 전국대학미술운동연합(이하 학미련) 대표 전승일 씨를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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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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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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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 건전비디오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건비연)'이 창설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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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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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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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 조교수 이윤성씨 등은 홍성담 화백과 관련한 신체감정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당시 감정서에 따르면, 홍 화백의 오른쪽 무릎과 정강이 및 왼쪽 귀 등에 생긴 상처는 '둔기에 의해 2~6주 전에 생긴 것'이라고 결론짓고 상처 발생 시기가 안기부에서의 조사 시기와 일치해 안기부에 의한 고문피해 주장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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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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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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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문공부로부터 판매금지 종용도서에 올라 재판을 못 내게 된 <김형욱 최후의 그 얼굴>의 저자 손충무 씨와 이우석 문학예술사 대표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저자와 출판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판매금지 종용이 불법으로 판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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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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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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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이기형과 정동익 씨에 대해 각각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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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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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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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이기형과 정동익 씨에 대해 각각 징역 1년 6개월과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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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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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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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화백은 9일 공판에 앞서 자신을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 2명의 몽타주를 그려
이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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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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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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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구속중인 신학철 화백에 대해 보석을
허가해 석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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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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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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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는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실린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이적성을 문제삼아 창작과비평사 주간 이시영을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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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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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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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공안부는 전국 검찰에 '좌익출판물/유인물 단속지침'을 내려 <지리산(이기형 저)>, <붉은 산 검은 피(오봉옥 저)>, <사람됨의 철학(채광석, 채희석 저)>, <한국민중사>, <주체사상비판>, <현대 민족사의 재인식>, <월간 노동해방문학> 5~7월호 등
1백30종의 서적들을 '좌익출판물'로 규정하였다.
6공 당시의 금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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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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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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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 만화 모니터 모임은 <만화자료집>을 작성하여 만화 탄압의 기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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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14일
|
민중미술
|
검찰은 차일환 화백에 대해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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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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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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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는 '일본만화 수입개방에 대한 간담회'를 열어 만화가와 만화잡지 편집자, 서울 YWCA 산하 만화 모니터회 회원 등을 모아 한국 만화가 나아가야 할 방안에 대해
토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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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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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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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는 <월간 노동해방문학>에 대해 3개월 정간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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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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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차일환 화백 등 3명에
징역 1년 6개월과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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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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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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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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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탄압과 관련 사건 일지 1990년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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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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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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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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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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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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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이 낸 5집 앨범 <아, 대한민국>에 실린 <버섯구름의 노래>, <형제에게>, <우리들의 죽음> 3곡이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수정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마저도 거부하고 심의 없이 앨범을 내 공윤과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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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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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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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윤리위원회는 신진 영화감독 이정국 씨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해서 제작한 최초의 대중영화 <부활의 노래> 에 대한 새빛영화촬영소의 심의 요청을
반송시켰다. 그 이유는 제작사인 새빛영화촬영소 측이 동월 9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세방현상소의 시사실과 연세대 통일문화제에서 각각 대중을 상대로 상영해서 검찰에 고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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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26일
|
문학
|
<붉은 산 검은 피> 건으로 구속된 송기원 주간이
만기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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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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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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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내 각 경찰들은 2학기 개강에 앞서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호남대 등지의 대학 근처 서점 11곳을 압수수색하여 <조선통사>, <미제침략사> 등의
북한 관련서적 2백여 권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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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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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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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활의 노래>가 공윤의 확대회의와 재심의에서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공윤의 관계자 측은 "심의에는 합격했으나 심의규정에 따라 일부 장면이 삭제되거나 단축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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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18일
|
영화
|
공연윤리위원회는 영화 <부활의 노래>의 장면 중 도청사수 장면과 전야 횃불시위 장면 등 전체 분량의 22%에 '고증오류'를 빌미로
삭제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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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22일
|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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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윤리위원회는 효동필름과 우진필름이 각각 수입한 성인영화 <굿바이 엠마누엘(1977년작)>과 <엠마누엘4(1984년작)>에 대해 "외설 논란은 있으나 시대상을 감안하면 이미 흘러간 영화"라는 이유로
수입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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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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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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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상고심에서 홍성담 화백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간첩혐의가
파기되었다. 대신 이적표현물 제작과 찬양고무죄만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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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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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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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화백의 작품 <모내기>의 이적성 여부에 대한 서울형사지방법원 5차 공판에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 2부는 신 화백에 대해 징역 3년형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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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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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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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예술의전당 미술관 관장이 문화부의 민중미술 전시회 철거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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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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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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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이날 오후부터 서울시내 대학가 서점 및 사회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에 압수수색을 실시하여 <강좌철학 I/II> 등 재야 이념서적 4백여 권을 압수하는 한편 이를 펴낸 세계출판사 대표 윤후덕 씨를 국보법 위반으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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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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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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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대학가에 한창 상영중인 북한영화에 대해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회관에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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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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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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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검찰청 형사 2부는 <파업전야>를 만든 장산곶매 대표 이용배와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김명곤을 영화법과 공연법 위반 혐의를 적용시켜
불구속 입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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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31일
|
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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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화백이 서울고등법원에
보석신청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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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9일
|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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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총연합회,
YMCA,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 10개 단체는 '스포츠신문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만들어
스포츠만화의 음란성을 시정하고자 거듭 촉구했다. 이는 1991년에 '스포츠신문음란폭력성조장공동대책협의회(이하 음대협)'을 거쳐 1994년경에 '음란폭력성조장공동대책협의회'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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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24일
|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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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윤리위원회는 영화 <부활의 노래(이정국 감독.)>을 재심의하여 지난 9월 심의 당시 잘린 25분 가량의 장면들을
복원하여 심의필증을 교부했고, 아울러 '수출불가' 판정까지 해제시켰다. 그러나 철기(김영건 분)이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 등 1분 가량이 편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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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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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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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는 일본만화 수입규제를 위한 `외국만화 수입개방에 따른 법규제정 제안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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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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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은 홍성담 화백에 대한 보석신청을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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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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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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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랑구 지역 학부모, 교사, 공무원 5백여 명이 학교 주변 정화에 나서서 불량만화와 음란비디오 등을
소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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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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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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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이자
덕성여대 교수
이원복의 주도로 스포츠신문 관계자들과 서울 YWCA 등 시민단체들이 모여 충주 수안보의 한 호텔에서 '스포츠 만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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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탄압과 관련 사건 일지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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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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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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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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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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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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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땅(고석만 연출, 김기팔 극본)> 첫회분의 정치적 논란 건으로 인한 반발로 인해
최창봉 MBC 사장과 민용기 제작이사가 청와대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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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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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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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는 종전의 방송심의위원회를 방송위 산하 연예오락/보도교양/영화/광고 특별심의위원회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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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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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 산하 연예오락심의위원회는 MBC 드라마 <땅>의 첫회분을 심의해 제작 관계자를 소환할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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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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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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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 TV 모니터 클럽이 '서울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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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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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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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MBC 드라마 <땅>과 <MBC 리포트 - 정치물갈이>에 대해 각각 '사과방송'과 '주의'조치를
내렸다. 당초 방송위 산하 연예오락심의위원회는 <땅>의 첫회분에 대해 제작 관계자를 징계하지 않는 조건으로 해명 조치를 취해달라고 방송위에 건의했지만 방송위는 이를 묵살하고 '사과방송' 조치를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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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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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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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제작국 소속 드라마 PD 20명과 박신서 PD연합회 사무국장은 방송위원회를 방문해 드라마 <땅>의 사과방송 철회를
촉구했다. 한편 MBC 드라마 PD들은 철야 대책회의를 열어 방송위 부위원장 김규를 만나 방송위가 정부의 압력 부분에 대해 해명하고 해당 에피소드에 재심을 요구했지만 김 부위원장은
"현행법상 재심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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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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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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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은 홍성담 화백에 대해 간첩죄 부분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고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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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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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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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외국 수입만화에도
사전심의제를 확대하여 일본 만화 정식수입의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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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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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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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회는 개그맨 이창훈이 한 내무반원의 입에 물고 있는 사과를 향해 칼을 던져 명중시키는 장면을 담은 <
유머 1번지 -
동작그만> 2월 2일 방영분에 대해 '사과'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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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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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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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음반에 관한 법률'이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하 음비법)'으로 바뀌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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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20일 ~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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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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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부산, 수원, 조치원 등 주요 도시에 소재한 사회과학서적 서점들을 상대로 수색을 벌여 <완전한 만남(김하기 저)>,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저)> 등의 20종류의 인문사회과학 선정 대학생 추천 서적들을
'이적표현물'로 몰아 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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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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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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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1989년부터 <노동가요 모음집> 2~4집, <포항제철 노동가요모음집> 1집 등의 노동가요 테이프 1만 2천여개를 제작해 판매했던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의장 박인배 씨를
음비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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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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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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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노문협 의장 박인배 씨가 법원에
구속적부심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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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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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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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경찰서와 마포구청 직원들은 사설 시네마테크 '영화공간 1895'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여 이날 시사회를 개최하려던 16mm 소형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청년영화제작소 제작.)>이 공윤의 사전심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필름을 압수하고 이에 항의한 회원 2명을
강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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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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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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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상영하던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 정문 앞에서 학생 5백여명이 경찰의 영화상영 저지에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이 와중에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눈을 맞아
실명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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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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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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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오후 1시 30분경부터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상영하던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 5백여명이 법원의 영장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 1,200여명에 맞서
경찰 병력이 철수하는 2시 50분까지 농성을 벌였다. 한편 이날 오후 3시 30분경에
경희대학교에서도 해당 영화를 크라운관에서 상영하다 교내에 진입한 경찰에 맞서 1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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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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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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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WCA 만화 모니터회는 서울지역의 초중고 근처 서점 등을 조사하며 일본 만화 실태를 분석했다. 이들은 외국만화심의기구의 심의기준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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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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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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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홍익대학교 문헌관 16층에서 상영한 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경찰에 의해 10분만에 상영 중지되자 학생들은 40여분간
경찰에 격렬히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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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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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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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프로덕션 간부진들은 원래 50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 <땅>을 15회로 줄여 조기종영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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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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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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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인노조(위원장
유인촌)는 MBC 드라마 <땅>의 조기종영에 대해 저항하며 "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땅은 형태상으로 안정이 기본이다. 누가 땅을 뒤흔들고 있는가?"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출연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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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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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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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소 '청년' 등 18개 영화문화단체들로 구성된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탄압 저지 공동투쟁위원회'는 공권력의 영화 상영탄압에 맞서고자
성명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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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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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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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대학교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상영한 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병력 1천 8백여명이 진입하자 서울대생 2천여명은
돌과 화염병을 던져 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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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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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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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땅>에 출연한
오지명,
길용우,
반효정 등 24명의 탤런트들은 해당 드라마에 대한 조기종영 철회를
요구했다. 단, 당초 출연거부한 <땅>의 마지막회 녹화(19일)에는 일단 출연했다. 같은 날 서울 YMCA '좋은 방송을 위한 시청자 모임'도 MBC의 어린이프로 대폭 축소, <MBC 리포트>,<땅>, <사람과 사람>, <우리는 지금> 등의 조기 종영에 대해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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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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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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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땅>이 조기 종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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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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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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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 대한 감정평가를 위한 공개 시사회 및 기자회견이 공투위의 주최로
한양대학교 학생회관 3층 콘서트홀에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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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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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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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경찰과의 별다른 충돌 없이 성균관대, 건국대, 숭실대 등
6개 대학에서 동시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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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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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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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청소년의 달인 5월을 맞이하여 서울
YWCA, 서울
YMCA,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및
걸스카우트연맹, 전국서적상조합연합회, 한국청소년도서출판협의회, 주부교실중앙회 등 8개 단체는 불량만화 폐기식을 시행하며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행사의 이름은 '불량만화추방시민결의대회'였으며 오후 2시에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시행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
당시 MBC 뉴스데스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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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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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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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선, 유동훈 등의 영화인들이 낸 영화 사전심의제도 위헌심판제청이
서울형사지법에서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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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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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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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는 각 교도소를 감사하면서 <녹슬은 해방구(권운상 저.)>, <태백산맥(조정래 저.)>, <완전한 만남(김하기 저.)> 등의 재야계열 소설 32권을 금서목록에
추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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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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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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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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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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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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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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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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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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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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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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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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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제작한 이상인 감독이 경찰에 의해 영화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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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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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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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빨치산의 딸(
정지아 저.)>을 낸 실천문학사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여 해당 서적 2천여권을
압수한 뒤 대표인 이석표 씨를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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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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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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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노동가요 테이프를 만들어 판 박인배 씨에 대해 음비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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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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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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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이날을 기해 불량만화의 홍수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월 10일에 나올 국내만화 단행본에 아동용은 '아동만화'라고 쓰인 연록색 표시를, 청소년용은 '청소년만화'라고 쓰인 청색 표시를 달도록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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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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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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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신문 음란폭력조장 공동대책협의회'는 스포츠신문 만화의 음란/폭력성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국내 스포츠신문 3개사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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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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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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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형사지방법원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제작한 이상인 감독에 대해 징역 10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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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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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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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는 당해 출판된 도서 중 <빨치산의 딸(정지아 저.)>, <녹슬은 해방구(권운상 저.)> 4~9권, <한국현대사(한국역사연구소 저.)>, <한국사회의 이해(장상환 외 9명 저.)> 등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부정하거나 김일성 주체사상 등을 찬양하는 등 그 내용이 실정법에 현저히 저촉될 우려가 있다’는 이적표현물 26종을 검찰에 통보했다고 그해 국감자료에서 밝혔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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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1일 ~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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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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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는 어린이들에게 좋은 만화 73종을 선별한 뒤 서울 YMCA 회관에서
'좋은만화 비교전시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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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11일 ~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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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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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YMCA는 안양, 대구, 원주 등 8개 도시를 돌며 '좋은만화 비교전시회'의
순회전시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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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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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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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음비법 위반으로 구속된 박인배 씨에 대해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해 석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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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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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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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유선방송법'이 새로 제정되어 '종합유선방송위원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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