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3:21:46

달이 뜨는 강/탐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달이 뜨는 강
1. 개요2.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3. 시대 재현 오류
3.1. 유의사항3.2. 전체
3.2.1. 복식
3.3. 1화3.4. 7~8화3.5. 14화3.6. 18화

1. 개요

KBS 월화 드라마 < 달이 뜨는 강>의 역사 탐구를 다루는 문서.

2.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

  • 평강공주가 무인으로 나오는 것은 완전한 창작이다. 고래의 온달 설화, 설화소 가운데 평강공주가 이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신혼 초 바싹 마른 말을 헐값에 산 뒤 잘 먹여 준마로 키웠다는 것뿐이다.[1] 극작가가 서사 전개를 위해 창발한 설정이라고는 하나, 살수집단이라는 개념 설정 역시 종래의 판타지 사극에서나 흔하게 쓴 소재이며, 고대 동아시아에 이러한 세력의 존재 여부는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극본의 개발 단계부터 작가 및 제작진이 별달리 큰 고민을 하지 않고 (클리셰에 가까운) 쉬운 선택으로 안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 TV비평 시청자데스크에 출연한 정명섭 역사추리소설가에 따르면 극중 평원왕과 고구려 내부 분위기는 실제 평원왕보다는 그 전대인 양원왕 재위 시절에서 일부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 사이의 무력충돌을 불사하는 분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환도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된 점 등이 그렇다.
  • 역사상으로 북주군의 침입에 맞서 온달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공을 세운 것은 577년이며 영양왕이 즉위한 해는 590년으로 실제로 두 역사적 사건 사이에는 13년의 공백기간이 존재하지만 드라마에서는 4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나온다.
  • 태자 원이 영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등장하였다. 평원왕이 사망하였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평원왕은 태자 원에게 양위를 하지 않았다. 만약 평원왕이 사망하였다면 그 시기는 590년 이후이지만 진흥왕이 살아있으니 이 또한 역사상 시기가 맞지 않다. 진흥왕은 평원왕보다 앞선 576년에 사망하였으나 시기가 590년 이후라면 신라 진흥왕이 살아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 17화에서 귀족 고원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실 고구려에서의 귀족반란은 평원왕이 아니라 안원왕 때의 후궁들의 친척세력인 추군과 세군의 싸움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반란으로 인한 혼란으로 아단성을 신라에게 빼앗겼다고 설정되었는데 역사기록 상으로 평원왕 때 빼앗겼다기보다 그 전 양원왕때 빼앗긴 걸로 기록된다. 드라마의 진행을 위해 사건의 시기를 임의로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3. 시대 재현 오류

3.1. 유의사항

  • 이 드라마는 극소수의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는 캐릭터[2]들이 등장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스토리가 창작된 픽션이다. 온달 설화와도 다른 점이 굉장히 많다. 드라마의 스토리가 실제 역사와 어긋난다 해도 역사 왜곡이라 말할 수 없을 수준의 창작극이라 할 수 있다.
  • 다만 시기가 특정되어있다는 점에서 당대 고구려의 문화, 복식, 건축 양식 등의 시대 고증은 제대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문단에서는 핍진성을 해칠 만한 시대 재현상의 오류를 다루고자 한다.

3.2. 전체

  • 고구려 초기인 고국천왕 대에 부족적 오부가 행정적 오부(동·서·남·북·중)로 개편되어 순노부는 동부(東部)로, 연노부는 서부(西部)로, 관노부는 남부(南部)로, 절노부는 북부(北部)로, 계루부는 중부(中部), 내부(內部) 또는 황부(黃部)로 불리게 되는데 평원왕은 고구려 25대 왕으로 그가 재위했던 시기는 고구려 후기에 속하는데도 극 중에는 과거 부족적 오부의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해당 설정이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평강공주의 나이가 16살이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에게로 시집 보내고자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고씨"라는 것 때문에 상부를 왕족인 계루부로 설정하였으나[3] 지극히 작가의 개인적인 해석이 많이 담긴 것 같다. 이와 달리, 실제로 대략 66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원이라는 중국 사서에서는 고구려의 동부를 상부, 청부로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한원에는 고구려 내부(왕족, 즉 계루부)가 동부 밑으로 위치한다는 기술이 나와 있다. 따라서 한원이 쓰인 660년 전후, 고구려 말기에는 왕이 나오는 계루부조차도 동부의 아래에 있었다는 의미로 오부 중 가장 힘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상부라고 나타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온달이 활동했던 당시는 연개소문 가문의 힘이 강하던 때였는데[4] 연개소문의 부족을 많은 사서에서 동부로 보고 있다.[5] 따라서 상부는 동부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수 있고 동부는 예전의 순노부이며, 당시에는 연개소문 가문의 권력이 막강했으므로 동부 즉, 순노부 역시 세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온달의 부족이 동부인 순노부로 나오고 있고 부족의 힘이 약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연개소문 가문이 동부 대인의 지위에 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온달의 아버지가 순노부의 족장으로 나온다. 이러한 점들은 정확한 역사 반영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3.2.1. 복식

파일:F2FADA18-027E-4A10-A387-8FFE9BEFD41E.jpg
파일:고구려-단령.jpg
* 평강공주의 아역이 입고 있는 옷은 고구려 벽화를 기반으로 시대를 재현한 옷이다. 보통 직령 형태의 한복을 떠올리기 쉽지만 단령(=곡령=원령)은 고구려 이전부터 쭉 입어왔던 복식이다. 단령은 내의(內衣)로 많이 착용했지만 외의(外衣)로도 착용했음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무용총의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인을 보면 평강공주의 아역처럼 단령반비(團領半臂)를 입고 있다. 이런 복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6] 또한 착용했다.
  • ‘달이 뜨는 강’ 복식을 담당한 한복 전문가 한복나래솔 김정숙 대표는 이 논란에 대해 "한복은 시대별로 다른 복식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문서 사료를 근거로 하여 제작했습니다. 다만 드라마 의상의 특성상 고구려 시대 왕족이 입었던 의상에 입체 패턴을 접목시켜 제작했습니다"라고 해명했다. # 다만, 회화와 사료를 참고한 의상은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에 해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명을 한다는 것은 모든 복식 관련 재현 오류에 전혀 면피가 될 수가 없다.
    또한 자수도 아니고 현대적 나염 프린팅에 가까운 (왕족 이상의 표징이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삼족오 문양을 시대에 맞지 않게 오부 예복의 가슴팍에 새긴 것 또한 문제이기는 하나, 자수를 프린팅으로 대체한 것은 제한된 제작비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파일:달뜨강 고증수준.jpg
파일:6561593A-19EC-42F2-8A12-D0F5C81328A0.jpg 파일:50C617E2-722C-4702-AF21-36C6A9F55293.jpg
달이 뜨는 강 해모용 당나라 잠화사녀도(蠶花仕女圖)
  • 여주인공, 염가진과 일부 궁내 여성들의 복식은 고구려풍으로 아주 잘 재현된 것은 맞다. 주요 여성인물들의 복식까지 전부 당나라풍으로 만든 일부 사극들에 비하면 칭찬받을 만은 하다는 평이지만 여전히 남겨진 문제는 극 중 서브 여주인공인 해모용이 입고 나오는 의상의 형태 역시 고구려식의 저고리, 치마가 나뉘어져 있는 투피스 형태보다 중국 당나라 의상의 형태에 더 가깝다. 사진 속 해모용의 의상처럼 속살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치마를 가슴선까지 올려서 입는 형태는 당나라 말기 때 유행하던 의상의 형태였으며[7], 한반도에서 이런 형태의 당나라풍 의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때는 문무왕 재위 당시인 664년이다.[8] 게다가 무엇보다 극 중 달이 뜨는 강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6세기 말에는 아직 당나라가 건국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차라리 통일신라 중후기 배경 사극에 그런 당나라 말기 의상이 나왔으면 맞는 재현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방송사의 해신이 그렇게 신라인 여성의 의상이 당나라 말기 여성의 의상으로 나와서 맞는 재현이 된 경우다. 염가진의 복식은 고구려 한복으로 잘 고증된 것을 보아 고증할 수 있는데도 굳이 여주인공과 서브여주인공의 차별화를 둔 것을 보면 아마 별 생각없이 퓨전을 한듯하다.한국 사극들 제작진이 복식에 대해 생각하는게 거의 다 이렇다만
파일:54701B42-83AB-45A0-BC50-2834778B7551.jpg 파일:62B917D3-19FA-4932-BE71-F3B0ED21C865.jpg 파일:D6069C6E-BE41-4B71-858C-F10CBD284E48.jpg
달이 뜨는 강 고건 달이 뜨는 강 고원표 중국 시안 선우염묘에서 출토된 호복(胡服)의 일종인 번령포(翻領袍)를 입고 있는 당삼채
  • 고건과 고원표가 입고 있는 의상 역시 고구려풍이 아니라 당나라풍 의상에 더 가까운데 사진 속 고건과 고원표가 입고 있는 의상은 당나라에서 돌궐의 영향을 받아 유행했던 호복(胡服)의 일종인 번령포(翻領袍)의 형태와 많이 유사하다. 사진 속 의상처럼 옷깃이 브이넥 카라처럼 양쪽으로 열어젖혀져 있는 형태의 옷깃을 번령(翻領)이라 부르는데 이런 번령 형태의 의상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의상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일대 돌궐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의상이었다. 반면 당나라 이전의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직령(直領) 형태의 의상이 더 유행했던 편.
  • 청나라풍 옷을 고구려 귀족들이 입는다. 특히 고건의 복식은 한복이라고 보기도 힘든 그야말로 짬뽕옷이다.

파일:EF8o2d6UUAARnbW.jpg
  • 평강의 찰갑옷을 제외하면 갑옷이 제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마치 MBC의 계백이나 주몽에서 나오는 갑옷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실제 고구려군은 위의 그림이나 고분벽화 처럼 좌우로 날개형 뿔장식이 솟아 있는 투구를 쓰고 목가리개를 했다. 그리고 바지저고리 위에 신체 부위별로 나뉜 비늘 갑옷을 걸쳤다. 경갑(頸甲)은 나팔 모양으로 앞에서 개폐하도록 되어 있으며, 대퇴갑과 경갑(頸甲)은 구분되지 않고 통자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 장수들은 바닥에 송곳처럼 끝이 날카로운 쇠막대가 촘촘히 박힌 금동 신발을 신었는데, 이는 보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덧신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현 오류가 계속된다면 잘못된 인식이 나타날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 역사 드라마를 접한 외국인들은 조선군의 군복을 포졸복으로 알고 있다는 경우가 꽤 많다. 다만 조선군의 군복이 포졸복이었다는 건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마냥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아예 판타지 갑옷이 나온 달이 뜨는 강의 경우가 더 심각하다.

갑옷 재현 미스가 아쉬운 것은 방송사가 KBS라는 점 때문이다. KBS의 경우 사극 근초고왕 대왕의 꿈에서 이전 사극과는 다른 삼국시대 갑옷의 모습을 훌륭하게 재현하였기에 기존 것을 이용하면 될 것을 굳이 국적불명, 시대불명의 판타지갑옷으로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다.[9] 심지어 광개토태왕보다도 못하다.

3.3. 1화

  • 1화에서 절노부에 대한 자막 설명으로 북쪽 국경 방어라고 하였는데 절노부가 행정적 오부에서 북부에 해당하므로 맞는 설명이지만 다음 장면에서 순노부의 족장이라고 나오는 온협 장군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남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야말로 우리 순노부의 막중한 소임일세." 즉, 순노부가 남부에 해당한다는 뜻인데, 하지만 실제로 남부에 해당하는 오부는 관노부이며, 순노부는 동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동쪽 국경 또는 자막에 나온 것처럼 신라 쪽 국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3.4. 7~8화

  • 공녀 에피소드는 당시 시대와 맞지 않는 설정이다. 고대 시대니까 노예나 미녀가 재산 취급을 받아 선물로 보내지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대륙의 눈치를 보면서 공녀를 징발해서 바치는 것은 고려 몽골의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나 생긴 모습이다. 제후로서 대국을 섬긴다는 존화(尊華) 의식이 내면화되지 않은 고구려 시대와는 거리가 먼 설정이다. 오늘날에 대입을 하자면 202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에게 매년 위안부를 바친다는 수준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고구려인 입장에서는 이보다도 더 황당했을지도...
당시 국제정세를 보자면 고구려는 돌궐제1제국과 싸워 이겨 대등한 인국(隣國)이었고 북주 돌궐에게 신속(臣屬)하여 효순한 아이 취급을 받던 처지였다. 더군다나 북제의 고장공, 곡률광 등에게 한참 깨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온달에게 깨질 예정인 서쪽 구석의 북주의 눈치를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드라마 구도가 나중에 각성 등을 통한 반전을 기대하게 하는 유약한 인물상이 많듯이 나중에 반전이 붙을 수는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8화 시점에서 보자면 공녀 에피소드는 고구려 비하로 볼 여지가 없잖은 게 사실이다. 차라리 대등한 국가끼리 동맹 차원에서 상호간에 공녀를 교환하는 것으로 나오거나 아예 고구려가 어느 약소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공녀를 받는 내용이었으면 그게 더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3.5. 14화

파일:732C71F7-F3C1-4DA2-A27C-4A48F3688197.png
출처
2021년 4월 5일자 14회 방송분에서 중국의 간체자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레딧 한국 드라마 서브레딧에서 제기되었다.
이 당시에는 간체자가 아닌 정체자를 사용하였으므로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다. 편지 속 간체자의 경우 1964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간화자 총표를 선포되고나서야 쓰여지기 시작한 한자이다.
고화질 버전으로 자세히 보면 간체자로 써져있는거에 모자라 문장마저도 오늘날 현대 표준 중국어식 문법으로 써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현대 표준중국어는 북경어식 백화문을 기반으로 하며 백화문이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게 1910년대 신해혁명 혹은 5.4 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신문화운동 시점이라는 점이다. 한문은 2천년 전 사용된 상고한어 문법을 기반으로 한다. 심지어 저 편지 속 쓰인 중국어도 문법에 오류 투성이가 많아 대충 파파고같은 번역기로 돌려 만든 문장인 것으로 의심된다.

이후 제작사 측에서 공식 사과와 함께 재편집을 통해 재방송과 다시보기 서비스에서 문제가 된 장면을 삭제했다. #

3.6. 18화

  • 관노부 대가로 나온 진필(진비의 부친)이 진비가 신라와 내통한 사실이 발각났을 때에 아버지로서 용서를 비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부탁을 하는 부분에서 천주교식 기도 자세가 나온다. 이는 100% 명백한 재현 실패인데 당시에 아시아에서 특히 고구려에서는 그런 자세로 부탁을 하는 경우가 없다.[10]
다만 제작사가 의도하여 그런 자세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보기는 무리이다. 진필의 역할을 맡은 배우인 차광수의 종교가 개신교이다보니 딸의 생명을 구하려는 절실한 장면을 연기하면서 무의식 중에 천주교식 자세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해당 부분이 절실히 부탁하는 장면에서 마지막에 잠깐 나온 부분이기도 하고, 촬영하는 스태프들 입장에서도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자세이기에 별 생각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1] 그마저도 전승하는 문장 속 주어가 모호하여 온달의 공인지, 평강공주의 공인지 확언하기 어렵다. [2] 애당초 평강공주가 살수였다는 배경 설정 자체가 온달 설화를 비롯해 어느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3] 고구려 왕족의 성씨가 고씨이고 계루부에서 왕을 배출하고 있었으므로 [4] 온달은 590년에 죽었고, 연개소문의 출생은 590~610년대 사이로 보는 편이다. 590년대로 잡았어도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태조가 삼국사기에는 대대로(大對盧)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묘지명에는 아버지인 연자유(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더불어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미 온달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상당한 고위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연개소문이 연태조의 동부 대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영류왕 본기에는 연개소문이 서부 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기 힘들다. 다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기록이 구당서나 신당서 등에 더 많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동부 대인이었다는 설이 더욱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 [6] 파일:백제-곡령교임포.jpg 논문에 따르면 교임이 있는 이 포(袍)를 곡령교임포(曲領交袵袍)로 지칭한다. [7] 파일:2E12F52A-F6F5-4162-BA06-A3F4C6BD8215.jpg 참고로 이와 거의 똑같은 형태의 의상을 재현한 드라마로는 판빙빙 주연의 무미랑전기가 있다. 다만 무미랑전기의 경우 시대적 배경은 초당시기이기 때문에 속살이 노출된 의상을 선보이는 건 재현 오류에 더 가깝다. 이것은 중화권 사극도 간혹 재현 오류를 범한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8] 흔히 우리가 아는 김춘추의 주도로 수입된 당나라 복식은 관복으로 입던 단령이었고, 여인들의 의상이 수입된 건 조금 더 훗날인 문무왕 재위 시기였다. 게다가 이 당시 당나라도 아직 초당시기였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속살이 노출되어 있는 복식은 아직 유행하지 않았다. [9] 이 드라마가 제작 초반에는 MBC에 편성될 계획이었으므로 MBC 미술팀의 갑옷을 그대로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복식 문단에서 설명한 고구려인들의 복식도 마찬가지다. KBS 편성이 더 빨리 결정났더라면 달리 기대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10] 이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2차대전 배경의 드라마에서 군인들이 현대식 경례를 하지 않고 로마식 경례를 하거나 중국 무협지에나 나오는 포권 자세를 하는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어색하고 이상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