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지마 조(新島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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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본명 |
<colbgcolor=#ffffff,#1f2023>니지마 조 新島襄(にいじま じょう), 新島七五三太(にいじま しめた, 니지마 시메타)[1] |
별명 | Joseph Hardy Neesima |
국적 | 일본 |
종교 | 개신교 |
출생 | 1843년 2월 12일 일본 무사시노쿠니 에도 칸다 |
사망 | 1890년 1월 23일(46세), 일본 카나가와현 유루기군 오오이소마치 |
학력 |
애머스트 칼리지, Andover Theological Seminary |
직업 | 교육자, 목사 |
배우자 | 니지마 야에(新島八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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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人一人は大切なり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배다
我が校の門をくぐりたるものは、政治家になるもよし、宗教家になるもよし、実業家になるもよし、教育家になるもよし、文学家になるもよし、且つ少々角あるも可、気骨あるも可。ただかの優柔不断にして安逸を貪り、苟も姑息の計を為すが如き軟骨漢には決してならぬこと、これ予の切に望み、ひとえに希うところである
우리 학교의 문을 넘는 이들이 정치가가 되든, 종교인이 되든, 문학가가 되든, 또한 조금 서투르든, 갖은 일로 근심이 있다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유유부단하여 매일을 허무하게 보내지 아니하며, 적어도 고식지계[2]를 일삼는 가벼운 인간이 되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며 한결같이 희망하는 바다.
우리 학교의 문을 넘는 이들이 정치가가 되든, 종교인이 되든, 문학가가 되든, 또한 조금 서투르든, 갖은 일로 근심이 있다해도 상관 없다. 그러나 유유부단하여 매일을 허무하게 보내지 아니하며, 적어도 고식지계[2]를 일삼는 가벼운 인간이 되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며 한결같이 희망하는 바다.
私の胸中には一点の曇りもない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구름조차 없다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구름조차 없다
니지마 조는 일본의 개신교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영어권 국가에서는 미국 유학 중에 사용한 이름인 조지프 하디 니지마(영어: Joseph Hardy Neesim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교토시에 도시샤대학과 도시샤여자대학의 전신인 도시샤 영학교(同志社英學校)를 설립했다.
메이지시대의 6대 교육자(明治六大教育者)중 한명으로[3]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람이다. 아내인 니지마 야에(新島八重)와 함께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미국으로의 유학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4년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에 의한 출국 금지령에도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에 걸친 항해 끝에 보스턴에 도착하여 애머스트 칼리지[4] 등에서 약 10년간 유학했다.보스턴으로 밀항하기전 우선 하코다테로 향한 니지마는, 그곳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이자 성인인 니콜라이 야폰스키와 만나 교류를 하였다. 니콜라이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권유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미국으로 향할 의지를 비치자, 그와 사카모토 료마의 친척인 사제(司祭) 사와베 타쿠마, 후쿠시 나리토요가 니지마의 밀항을 도왔다. 그후 니지마는 하코다테에서 밀항해 일단 상하이까지 간후 다른 배로 갈아탔다고 한다. 이때 선장에게 joe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을 추후에도 사용하게 된다.
미국 유학 중에 에도 막부가 무너져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고, 초대 주미공사인 모리 아리노리의 도움으로 밀항 죄가 사라지면서, 공식적으로 유학생 신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애머스트 칼리지에서는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는 서구권 대학에서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받은 정식 학사학위라고 한다.[5] 졸업 후에는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또한, 유학 당시에는 미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행하여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통역과 교육제도 설립계획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6]
2.2. 도시샤 영학교 설립
귀국 후 '기독교주의에 입각한 양심적이고 능력있는 젊은이를 양성하겠다'는 목적 하에 모금운동을 시작했고, 후에 오사카에 학교설립을 목표로 하였으나[7] 기독교 반대파에 의한 반대가 심해 좌절되고 마침내 교토에 1875년에 도시샤대학의 전신인 도시샤영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년 후에는 여성들을 위한 학교인 도시샤여학교도 세웠다. 니지마 야에와 만난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에는 학생교육과 학교의 발전에 전념했으나, 지병이었던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4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3. 여담
- 니지마 조는 2013년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의 여주인공, 니지마 야에(新島八重)의 남편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해당 드라마에서는 오다기리 조가 니지마 역을 맡았다. 야에의 벚꽃 외에도 메이지 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역사 드라마에 여러 번 나온 적이 있다.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니지마 조
- 홋카이도의 개척자이자 홋카이도대학(당시 삿포로농학교)의 초대 학장을 지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를 애머스트 칼리지에서의 인연으로 일본 정부에 소개해 일본으로 초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도시샤대학 캠퍼스 안에는 그의 이름을 딴 클라크 기념관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사상가들이 그와 크고 작은 교류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들은 도시샤대학에 설치되어있는 니지마 조, 건학에 관련된 수업이나 그에 대한 연구 서적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어릴적 이름이다.
[2]
姑息之計, 잠시의 이득과 안정을 위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3]
니지마 외의 나머지 5명은 오오키 타카토, 모리 아리노리, 콘도 마코토,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4]
니지마 조가 유학한
애머스트 칼리지에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후, 클라크 박사는 니지마 조의 소개로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
홋카이도의 개척을 위하여 삿포로농학교에 초빙되어 1876년 7월에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5]
정확히는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통틀어 최초이다.
[6]
당시
일본 정부 재정의 2%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파견한 사절단 내에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후일 일본의 정치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이때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근대국가의 형태에 대해 알게 된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견인했다.
[7]
당시 일본은
가톨릭이 다수파였기에, 가톨릭파가 없는 오사카를 선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