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대에 미요시 가문을 섬겨
탄바 공략에 공을 세우면서 탄바를 통치하게 되었다. 1564년에 세례를 받았고 1565년에 아버지가 전사하면서 가독을 승계받아 탄바 야기 성(八木城)의 성주를 지냈다.
1585년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로 들어가 고니시 성씨를 하사받아 고니시 히다노카미 조안(小西飛彈守如安)이라고 칭했으며[1],
임진왜란 때 외교 교섭을 담당해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 협상에서 실무 대표로 참가했다.
계월향 설화에서는 평양성 탈환을 위해
조선의
김응서에게 암살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이후에도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 때 사망한 것은 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2]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히라도로 도주해 가톨릭의 포교 활동이나 성당 건설을 하다가 161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톨릭 추방령[3]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추방되었다가 병사했다.
본래 전투보다는 외교석상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이지만
임진록 등 조선의 소설, 설화에서는 생김새부터 험악한 용장으로 묘사된다. 이는
박씨전에 본래의 성격이 무시되고 그저 흉악한 적장으로만 묘사되는
용골대와 흡사하다.
[1]
이로 인하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소서비(小西飛)로 기록되어있다.
[2]
제4차 평양성 전투 와중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족 여럿이 전사했기에 이들 중에 계월향 설화와 얽힌 인물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들 중에 조선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외교석상에 자주 등장했던 소서비였기에 설화에서는 그나마 들어본 이름인 소서비라는 이름이 쓰이게 된다.
[3]
비리 사건 등으로 인하여 가톨릭교도에 대한 반감 증가로 인하여 내려진 조치. 유명한
타카야마 우콘도 이 때 조안 등과 함께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