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향한 인물들
- 박종운: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성향을 우익으로 갈아타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1]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를 듣고 정계를 떠난다. # 그 후 극우 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 # 비록 전향했지만 매년 박종철 열사의 기일(1월 14일)과 생일(4월 1일) 때가 되면 그가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다고 한다.
- 오현규: 박종운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문서 최상단의 2번째 사진에서 고인의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박종철의 후배로,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이었던 오현규다. 그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해운대구의원에 당선되었다. #
- 금창태: 정권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최초 보도를 내보내서 사건을 세상에 알렸던 그는 1990년대에 홍석현 대표 아래서 전무, 사장 등의 요직을 지내다가 2001년에 중앙일보를 퇴사하고, 시사저널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선 기자들에게 삼성그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고, 결국은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폭거를 저질러서 시사저널 기자단 전원이 파업하는 사상 초유의 '시사저널 사태'를 촉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in 항목 참조.
- 김두우: 신성호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탐사했던 중앙일보 법조계 출입기자이다. 당시 김두우는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의 정확한 이름, 소속 학과와 주소를 찾아냈다. 이 특종 보도로 1987년 당시 신성호, 허상천 기자와 함께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2004년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을 받아 퇴사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회사측에 반려를 요청해서 조용히 복직했다. 이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까지 지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홍보수석까지 맡아 'MB 정부의 오른팔'로, 'MB의 입'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박근혜 퇴임 이후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언론인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를 받고 있다.
1.1. 비판론
이들을 왜 '변절자'라 부르냐면 이들이 과거 독재정권이나 독점재벌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짝짜궁했던 민주정의당이 한나라당(지금의 자유한국당)의 전신임을 고려했을 때, 한나라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하거나 했던 박종운과 오현규의 행태는 이해되지 않는다. 또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 금창태가 재벌의 눈치를 보며 재벌을 비판하는 기사를 막으려는 것도 그렇다.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종범인 민주정의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에 들어가고, 재벌 밑에서 슬슬 기는 이들의 행태에 "박종철 열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라는 질문을 지울 수가 없다.물론 본인들은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박종운, 오현규 같은 사람들의 행적은 유족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박종운에 대서는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이 2018년 1월 썰전에 출연하여 나나 박종운씨에겐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즉 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쪽을 선택하면 안 되었고,[2] 직접 열사의 가족들도 박종운의 선택에 매우 힘들어했다고 말하였다. 그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이 있는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한 것은 박종철 열사의 유족분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다. 현재 자유한국당의 전신 중 하나가 민주정의당이란 점을 생각하면 저들을 변절자라 판단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1.2. 옹호론
썰전에서 박형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현 시키기 위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서 완성된 사건이지 그것이 사회주의를 지향한 사건은 아니였다. 6월 항쟁은 '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답게 하자'는 취지에 전 국민이 동참한 운동이기 때문이다.민주화를 달성한 뒤에 민주화 운동 세력의 노선은 분화가 되었다. 모두 자신들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분화를 한것이다. 그 과정에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분열을 한것이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수용하며 보수쪽과 손을 잡으면서 이쪽에 손을 잡은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로 민주화의 비밀병기였던 김정남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교육문화 수석으로, <민중과 지식인>이란 명저를 지은 한완상 교수도 통일부총리로 재직하기도 했고, 운동권들의 사상적 스승이던 리영희 교수도 문민정부 초기에 김영삼을 지지하기도 했다. 즉 이러한 분화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무엇이 바람직한가?'의 생각 차이일뿐이지, 지금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 정당에 계속 참여하고 있으면 변절/전향을 안 한 거고, 보수 정당 등 비 민주/진보 정당을 갔으면 변절/전향 했다는 식의 판단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