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2 13:24:09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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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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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1.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245호

1. 개요

金泉 葛項寺址 石造如來坐像. 현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갈항사 터에 있는 8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65-1번지'에 소재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2.jpg

불상 높이 1.22m.

신라 경덕왕 15년인 758년을 전후한 시기에 김천 갈항사에서 제작된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사찰 본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갈항사가 폐사된 관계로 옛 금당지(金堂址) 터에 작은 보호각을 만든 후 거기에 안치되어 있다.

이 불상은 758년 당시 아직 원성왕으로 등극하기 전이었던 김경신(金敬信)이 외가에서 갈항사를 중창한 후 석탑과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 제99호) 기단부에 새긴 조성기(造成記)로 남아 있는 바, 대한민국 국보 제99호 석탑과 동 시기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본 불상을 제작한 갈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孝昭王, 692~702) 때 의상대사의 제자였던 승전대사(勝詮大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불우(佛宇)’조에 김천 갈항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후기 들어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유학자들 손에 빈 터만 남은채 모조리 다 파괴되었다.

겨우 화마를 피한 갈항사의 문화재 또한 현대에는 그 수난사로 악명 높다. 갈항사가 유학자들에 의해 폐사된 후 한동안 빈 터에는 본 불상과 비로자나석불좌상(毘盧遮那石佛坐像) 1구, 석탑, 신장상(神將像)이 부조된 석재 만이 황량하게 남아있었는데, 1914년 쌍탑중 동탑의 기단부에서 4줄짜리의 금석문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후부터 도굴꾼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곧 탑내 유물이 도난당했고 이에 탑은 1916년에 임시적으로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진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탑에서 나온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출토 사리장엄구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본 석불 또한 갈항사가 파괴될 당시 크게 손상을 입었는데, 전체적으로 여러군데가 깨져 있고 특히 왼팔은 시멘트로 붙여놓은 상태다. 무릎 부분과 손가락들 또한 떨어져나갔다. 대좌의 경우 불신(佛身)과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 있고, 광배와 하대석은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졌다.

파일: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3.png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 사찰의 흥망성쇠, 갈항사와 직지사. 문화재 수난의 역사 남아있는 갈항사

상기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갈항사 터에는 본 불상 외에도 비로자나석불좌상 1구가 더 남아있는데, 불신의 상태는 보물로 지정된 본 불상보다 더 안 좋은 편이다. 본 불상과 같은 시기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라 비로자나불 석상의 경우 일단 머리 참수되어 완전히 사라졌고, 불신 또한 파괴가 심각하여 현재 임시적으로 쇠창살 안에 넣어놓았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에 두드러진 눈과 긴 코, 작은 입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불상으로,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지만, 남은 것은 오른손목과 손등뿐이며 왼손도 약간 깨어졌고 오른쪽 무릎도 파손이 심한 편이다. 비록 파손된 상태이지만 본 불상이 맺고 있는 항마촉지인은 석굴암 본존불이나 칠불암 본존불 등 일반적인 신라 불상 양식과는 달리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본존처럼 왼손을 거의 오른발 위에 올려놓은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는 없어졌으며 불상의 뒷면에 광배 꽂이 구멍만 남아 있다.

본 불상은 경주 석굴암 불상,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등과 비슷한 8세기 중엽 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 제99호)의 기록을 통해 그 제작 시기(758년)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에 1963년 1월 21일에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梧鳳洞石造釋迦如來坐像)"이란 명칭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24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2010년 8월 25일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245호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 높이 1.22m의 불상으로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가슴이 당당하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 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갈항사 3층석탑의 건립 연대인 경덕왕 15년(758)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