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04 01:48:47

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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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경주 김씨
출생 1882년 12월 6일[1]
함경도 온성도호부 충동사 회동[2]
(現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노동자구)
사망 1935년 7월 21일 (향년 52세)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現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노동자구)
묘소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노동자구
배우자 이옥경[3]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2년 12월 6일 함경도 온성도호부 충동사 회동(現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온성군 영충면에서 서당 교사로 근무하던 1919년 3월 30일, 천도교 신자인 전창우(全昌禹)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는 만세시위를 주도해줄 것을 제의받았다. 이에 흔쾌히 승낙한 그는 곧 안병손을 만나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자고 권유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전창우·안병손 등과 수차례 협의한 끝에 그해 4월 4일 온성군 영충면 회덕동 회동교[4]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이어 대형 태극기 1개, 소형 태극기 35개를 제작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동지들을 포섭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전 10시에 약속대로 250여 명의 시위대가 회동교에 모였다. 김창욱은 이들 앞에서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고, 이어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그리고 영충면사무소를 지나 북창평동 장터를 향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급보를 받은 북창평헌병파견소에서 15명의 일본군 헌병이 출동해 총칼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제지하자, 시위대와 함께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맞서는 등 저항했으나 일본군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5명이 죽거나 다쳤고, 결국 만세시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 6개월형으로 형이 더 가중되었고, 이에 상고했으나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35년 7월 21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現 온성군 창평노동자구)에서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참고 문헌



[1] 1919년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는 12월 7일생으로 기재돼 있다. [2] 1896년 온성군 충동면 회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온성군 영충면 회덕동 615번지, 614번지 [3] 李玉竟. 2월 23일생. 광복 이전 작고 [4] 회덕교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