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 金鍾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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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직업 |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1936년~195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1953년~1971년) 전라북도 국악원 교수 국악교습소 소장 전라북도 국악원 명예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 종묘제례악’ 보유자 |
출생 | 1918년 7월 20일 |
사망 | 2009년 5월 20일(향년 90세) |
자식 | 슬하 3녀 |
"당시에는 국악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등 정악이 있고 산조, 판소리 등으로 구분해서 불렀어요. 사람들이 모여도 정악을 하는 사람이 대청에 앉으면 그 외의 사람들은 그 아래에 앉고는 했어요. 폐습입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생전에 김종희가 생각하는 국악이라는 이름과 의미 #
생전에 김종희가 생각하는 국악이라는 이름과 의미 #
1. 개요
대한민국의 국악인.일제강점기인 1918년 7월 20일에 태어나 2009년 5월 20일에 사망한 종묘재례악 명예 보유자이자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마지막 국악인이다.
2. 일생
일제강점기 이왕직 아악부원 4기생 졸업사진. |
왼쪽 동그라미로 표시된 학생이 당시 김종희이고 오른쪽은 동창이자 친구였던 이창규이다. |
이후 방향과 자신의 전공인 해금을 비롯한 여러 국악기들을 다루고 연주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고,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다. 전쟁 중 피난을 갔다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월부터 1971년 4월까지 국립국악원 국악사로서 활동하며 중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활동할 당시인 1964년 12월에 마침내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 종묘제례악"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1964년 3월에는 당시 일본 마이니찌 신문사에서 일본에서 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하며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내외(방일) 공연을 하였다. 그 후 재일동포 위문공연 및 대만에서의 국악 공연을 맡기도 하였다.
말년인 1986년 10월부터 1991년 5월까지는 전라북도 국악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91년 6월에는 전라북도 국악원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 2008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로 지정되었고, 2009년 5월 20일 새벽, 노년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