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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미쓰시로 오우슈(光城應洙) |
자 / 호 | 명진(明進) / 소계(小溪) |
본관 | 광산 김씨[1] |
출생 | 1880년 9월 14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동선면 가야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228번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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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년 4월 10일[3] (향년 78세)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무원골마을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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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광산김씨 긍구당종택의 12대 종손이다.
2. 생애
1880년 9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동선면 가야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228번지)의 광산 김씨 긍구당(肯構堂) 종택[4]에서 긍구당종택 11대 종손인 아버지 김영운(金永運, 1852 ~ 1940. 12. 11)과 어머니 진성 이씨(1856 ~ 1899. 6. 10)[5]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와룡면 가구리로 이주해 살기도 했다.일찍이 애간(愛澗) 이화성(李和聖)[6]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오전 1시,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읍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김익근(金益根)· 이종악(李鍾岳)· 이비호(李丕鎬) 등을 비롯한 2,000명의 군중들과 함께 '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안동군청, 안동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에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돌을 던졌다.
이때 일본 경찰과 안동수비대 병사들이 총칼을 뽑아 휘두르며 발포하는 등 무력 진압을 단행했고, 군중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얼마 뒤 김응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3월 23일 안동경찰서에 구류되었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으나, 곧 공소를 제기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9년 4월 10일 사망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3. 여담
-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 셋째 사위 서주(西州) 이용준(李容準, 1916. 3. 3 ~ ?)이 처갓집인 긍구당 종택 서고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고 몰래 가져와 김태준에게 넘겨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긍구당종택 14대 종손인 김대중(金大中, 1934 ~ )[7]이 자신의 조부(김응수)가 이용준에게 "매월당집, 훈민정음 왜 안 가져오냐, 이 도둑 같은 놈아"라고 꾸지람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
양간공후(良簡公后)-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37세 수(洙) 항렬.
[2]
출생지인 가야리 228번지에는
광산김씨긍구당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3]
광산김씨평장대보 권15 776쪽에는 1957년 6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4]
조선 중기의 학자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 1520. 8. 26 ~ 1588. 3. 15)가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본래는
영천 이씨(永川 李氏) 참봉공(參奉公) 종택이었다고 한다. 김언기는 첫째 부인
영양 남씨(1522 ~ 1555. 12. 6) 남세용(南世容)의 딸과 1555년 사별한 뒤, 영천 이씨(1540 ~ 1599. 8. 17)
참봉 이인필(李仁弼)의 딸과 재혼하여 30대 후반부터는 처갓집인 이곳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이 집은 둘째 부인 영천 이씨 슬하에서 태어난 차남 김득숙(金得䃤, 1561 ~ 1649. 4. 26)이 물려받았으며, 지금의 당호는 김언기의 현손 김세환(金世煥, 1640 ~ 1703. 2. 14)의 호를 딴 것이다.
[5]
이철영(李徹永)의 딸이다.
[6]
진성 이씨이다.
[7]
김좌희(金佐喜)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