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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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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시절. 왼쪽 인물은 김양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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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감독시절 당뇨병이 악화되어 투병 중에 우승 트로피를 받는 김영조[1] | |
김영조 金永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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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3년[2] 3월 15일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3] | |
사망 | 1981년 3월 25일 (향년 59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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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데이쿄 상업고등학교 - 와세다대학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아사히 군 (1944) 금융조합연합회 야구단 (1948~1950?) |
본관 | 광산 김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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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인. 1940~50년대 한국 야구를 풍미했던 야구 원로다.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인 문희상이 그의 사위다.[5]2. 생애
2.1. 유년기와 일본 선수 생활
1923년 3월 15일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의 농가에서 인삼을 재배하던 아버지 김진현(金軫鉉, 1896. 1. 23 ~ 1972. 7. 20)과 어머니 충주 박씨(1894 ~ 1953. 2. 25)[6]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 장남으로 태어났다. 딸 셋을 두고 얻은 외아들이어서 김영조의 부모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김영조의 친척 가운데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 있었는데, 김영조의 부모도 아들을 와세다대학으로 보내고 싶은 소망이 강했다. 김영조가 7세가 되던 해, 부모는 고려인삼 밭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문 근처에 한국음식점을 열면서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이 음식점은 고달픈 타향 생활을 하루하루 견디던 교포 및 유학생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었고, 자연스럽게 김영조도 와세다대학 입학을 꿈꾸게 됐다.결국 이러한 환경 속에서 보통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해 당시 야구 명문이었던 데이쿄 상고를 나왔다. 당시 은사인 전 주니치 감독 아마치 감독에게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 당대 야구 명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고, 차별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인을 제치고 주장에 뽑힐 만큼 빼어난 기량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프로 초창기이고 선수 수명이 짧던 당시 일제는 프로야구리그와 대학야구리그가 거의 동등한 수준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와세다-게이오 라이벌전 등은 그 인기가 대단했다. 즉, 그 당시 와세다대 주장이라는 것은 프로 스타급 수준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진다.
1944년 아사히 군(요코하마 전신 중 하나)에 입단 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라 리그가 중단되어 귀국한다. 가네미츠 아키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그가 1944년 일본리그에서 올린 기록은 30게임(전체 시즌 35경기) 동안 타율.248 2홈런이었으며 타격은 비교적 인상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약팀에 투고타저였던지라 그 성적은 팀내 홈런 1위(애초에 30경기짜리 단축시즌인데다가 당시 일본야구는 홈런이란 거 자체가 잘 안 터지던 시기) OPS 3위에 해당한다. 게다가 포수, 2루수 등 상식 파괴의 멀티 포지션을 뛰던 선수. 물론 1944년은 이미 태평양 전쟁으로 프로가 파행 상태였지만 그럼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2.2. 국내 복귀 이후
해방 후 1945년 국내로 돌아온 김영조는 광복 1주년 기념 조·미 친선 대회에 조선 대표팀 포수로 국내 데뷔했다. 48년 금융조합연합(농협 전신) 야구부를 창설해서 감독 겸 주장 겸 선수를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팀이 없어졌지만 피란지에서 야구인들을 모아 친선경기를 갖는 등 한국야구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로도 1954년 제1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를 비롯해 55년 2회, 59년 3회 대회에서 부동의 4번 타자 겸 포수로 활약했다. 1958년 전서울군(서울 올스타) 소속으로 세인트루이스와 친선경기 당시 최고의 좌완투수였던 김양중과 배터리를 맞추며 메이저 팀을 상대로 9이닝 3실점을 기록하도록 리드하였고 타석에서 서울팀이 친 3안타 중 하나가 그가 기록한 안타였다. 특히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 절반이 사고로 잘려나간 어려움을 딛고 50년대까지 각종 대회 홈런상을 휩쓸었으며, 이영민 이후 박현식 이전의 최고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렸다.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50년대 후반까지도 1류 선수였지만 나이도 있고 당시 프로가 없는 국내 사정상 50년대 중반부터는 대부분 코치로서 활동했다. 1955년 중앙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했고 당시 이미 야구부 학생들의 학업에 관심이 많은 선진적 지도자였다고 한다. 1963년 국가대표 코치, 1964년 실업연맹 전무, 1971년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였다. 1973년에는 당대 야구기술을 집대성한 야구교본을 펴내며 국내 야구의 학문적 발전에도 큰 기초를 마련하였다. 1970년대 이후 당뇨병으로 입원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7] 어려움을 겪었다. 1981년 3월 25일 오전 3시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인 당뇨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8세.
위의 김영조에 대한 내용들은 NHK 다큐인 "백구(白球),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에 많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