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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마사히코 [ruby(木村政彦, ruby=きむら まさひこ)] / Masahiko Kimu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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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생 | 1917년 9월 10일 |
구마모토 카와시리정[1] | |
사망 | 1993년 4월 18일 (향년 75세) |
학력 | 타쿠쇼쿠대학 |
종목 | 유도 |
신체 | 170cm, 85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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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유도 겸 프로레슬링 선수. 일본 유도 역사상 가장 강한 유도인 중 한명으로 평가되며, 역대 최초로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3연패 우승을 하였다. 특히 유도 시합에 한해선 1936년도부터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알려져있다.2. 생애
2.1.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기무라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와 강바닥의 자갈을 끌어올리는 중노동을 해서 근력을 키웠다.10세의 나이에 유도에 입문하였고 15살의 나이에 상대팀 주장을 포함한 전원을 꺾고 2단, 16살의 나이에 4단, 18살(1936년)의 나이에 강도관(세계 유도 본부)에서 8연승을 거두고 세계 최연소 5단이 된다.
18세의 기무라 마사히코(세계 최연소 5단, 170cm, 85kg)
기무라는 엄격한 자기관리와 혹독한 훈련량으로도 유명했다. 기무라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고, 유도 시합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라고 생각해,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해인 1935년도 4번의 패배 이후, 칼을 뽑아 배에 실제로 상처를 내고(...), 지면 할복하겠다는 일념으로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하여튼 이때부터 그는 3배 훈련이라는 자신만의 트레이닝 루틴을 만들었는데, 그의 라이벌들이 3시간 정도 훈련을 하니 그 3배인 9시간을 훈련을 해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팔굽혀펴기 1천회, 나무에 정권지르기 1천회, 토끼뜀 1km, 유도 유단자 50명과 쉬지 않고 4시간 란도리(자유연습), 나무에 부딪히기 1천번 같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365일 유지하였고 잠은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고 한다.
2.2. 유도가 시절
20대부터 기무라는 당대 유도계의 최강자로 불리며 승승장구한다.허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개혁 차원에서 일본 학교에서 행해지던 유도 교육을 금지시키자, 일시적으로 유도인들의 밥줄이 끊긴다. 물론 기무라 정도 되는 위상의 유도가가 그거 때문에 생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찌됐건 그도 다른 활로를 찾아봐야 했다. 이때 카라시코라는 프로레슬러가 브라질 출장을 이끌어 홍보차 브라질에 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오늘날엔 브라질리언 주짓수로도 유명한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와 대결하게 되는데, 1951년 상파울로 신문사(sao paulo shimbun)[2]의 초청으로 브라질에 들어와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전에도 가토를 비롯한 유도가들을 꺾은 엘리오와 당대 유도계 최강자라는 기무라의 대결은 브라질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관객만 2만 명에 브라질 대통령까지 보러 온 대규모 시합이었다고 한다.
경기 영상.
그렇게 타격없는 그라운드 승부를 벌이던 와중 기무라는 13여 분만에 팔 얽어 비틀기로 엘리오 그레이시의 양 팔을 부러뜨렸고, 엘리오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세컨드 측에서 타월을 투척하여 TKO로 승리했다. 이후 그에 대한 존경 차원에서 브라질리언 주짓수계에서[3] 팔 얽어 비틀기 기술을 그의 이름을 빗댄 기무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기술 자체는 기무라 본인이 만든 것은 아니고 본래 유도에 있던 '팔 얽어 비틀기(腕緘, うでがらみ)' 기술이지만 주짓수계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불려진게 그 시작이다.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 대결 이전까지 무승부는 있어도 패배한 적은 없던 강자였던지라 지금까지도 기무라의 강함을 논할 때 이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물론 당시 엘리오 그레이시는 나이도 많고 몸이 쇠락해져갈 시기였고 기무라는 가장 신체적으로 좋을 때였기는 했다. 나이 자체는 엘리우가 4살 더 많다. 키는 둘 다 170cm이나 몸무게는 차이가 많이 났다. 애초에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전 경기 내용도 보면 압도적인 승리만 있는 건 아니었고, 무승부도 많았다. 일본 유도가들과의 대결에서도 기절까지 시킨 가토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별로 이긴 적이 없으며[4] 레슬러들과의 대결에서도 많은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원래 엘리오는 체격이 왜소하고 몸도 허약해서 형제들 중 누구도 그가 무술로 대성할 거라 생각을 안 했던 사람이란 것이다. 즉, 엘리오는 형제들 중에서도 체격이나 힘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걸 기술로 보완하여 싸운 스타일로[5], 강자로서 유명했다기보다는 그런 허약한 체질에서도 강한 상대를 이겨오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에 대한 강함을 널리 알리게 된 인물이라고 보는게 더 옳다. 한편, 기무라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완력도 동전이나 못을 손가락으로 구겨버리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참고로 대결 당시 몸무게도 10~30kg대까지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기무라가 앞서긴 했다.
그래도 엘리오 그레이시 입장에서도 별로 손해본 장사는 아닌게, 이때 브라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이후 본인의 도장과 유파도 인기를 끌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기무라도 이때 엘리오의 기술에 감명받아 일본에 돌아가 동료들에게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엘리오의 아들인 호이스 그레이시가 90년대 들어 UFC 초대 챔피언이 되고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전세계에 알려지는걸 보면 격세지감이다.
이후 1959년 브라질의 흑인 발리 투도 선수[6]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와 그래플링 1승, 무규칙 경기 1무를 기록하기도 했다.
2.3. 프로레슬링계 진출
기무라 마사히코는 1950년대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든다. 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7], 상기했듯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개혁 차원에서 일본 학교에서 행해지던 유도 교육을 금지시키는 등 유도계 쇠락 현상이 생기자, 다른 활로를 찾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그렇게 프로레슬링계에서 입지를 다지던 기무라 마사히코는 당대 일본 프로레슬링계 최고의 스타였던 역도산과도 팀을 맺어 경기를 가지는데, 아무래도 기무라는 프로레슬링계에선 유도계만큼 대접받는 스타는 아니었고, 역도산과 하는 팀 매치도 본인은 조연에 가깝고 주로 주연은 역도산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었는지 새로 단체를 차리는 등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흥행 카드로 역도산과 1:1 매치를 하게 되는데, 이때 기무라와 역도산의 대결은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이라 불리며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었다.
허나 문제는 경기 결과 기무라 마사히코는 역도산한테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고 만다. 게다가 경기 직후 기무라 마사히코가 원래는 무승부로 끝내기로 했는데, 역도산이 사전 약속을 어기고 자신을 두들겨팼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에 역도산은 본인이 먼저 기무라에게 급소공격을 당해 기무라가 룰을 어겼다고 판단하고 실전 매치로 간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결과적으로 어찌됐든 경기에서 무기력하게 패한 기무라는 이후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잊혀져갔고, 역도산도 이전의 영웅 이미지가 제법 깎여나가게 되었기에 이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 기타 내용은 쇼와의 간류지마 항목도 참조.
2.4. 사망
폐암에 걸려 투병하다, 1993년 4월 18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기타
- 1940년 덴노친람대회(텐란 시아이)[8]에서 우승한 후 쇼와 덴노에게서 탄토를 선물받았다.
-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최영의와 강도관에서 함께 유도를 배웠으며 친구이기도 했다. 최영의는 기무라를 강도관 선배로서 그래플링 타입으로는 자신도 상대가 안 된다고 할 만큼 고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아는 무도가 중 자신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수련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는걸 보면 지독한 연습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그래서인지 상기한 역도산과의 대결에서 기무라가 낭패를 당하자 발끈해 복수한답시고 한판 붙자고 역도산을 쫓아다니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다.
[1]
현 구마모토시 미나미구.
[2]
일본계 브라질인이 만든 언론사로,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림으로써 당시 브라질 내 일본인의 계몽을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일본계 빈민층들은 팽배해진 자존감에 이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 이를 믿고 브라질 정부에 협력하던 일본계 중산층들까지 습격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결국 이런 정황은 상파울로 신문사가 기무라 마사히코를 브라질로 불러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3]
이후 그라운드 기술은 주짓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합격투기계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다.
[4]
그나마 가토와의 대결도 첫번째는 무승부였다. 오노 야츠시하고는 무승부, 타카시에게도 무승부였다.
[5]
이런 일화 때문에 엘리오가 오늘날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일대종사로 취급받는 측면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체격을 보완하고자 주짓수 가드 기술 등을 열심히 개발했기 때문이다.
[6]
격투 기반은
카포에라. 키 182cm, 몸무게 94kg의 선수였다.
[7]
아내가
병(
결핵)에 걸려 고가의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이 부분이 아내가
자궁암에 걸린 것으로 각색되어 암 치료제 비용을 대기 위해 프로레슬링에 뛰어들었다고 묘사했다.
[8]
덴노가 친히 관전하러 온 대회를 뜻한다.
[9]
하루에 무려 9시간씩 수련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