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함명 | 그리먀시 (Гремящий)[1] |
건조자 | 즈다노프 명의의 푸틸로프 조선소 (190번 조선소), 레닌그라드 |
기공일 | 1936년 7월 23일 |
진수일 | 1937년 8월 12일 |
취역일 | 1939년 8월 28일 |
퇴역일 | 1956년 4월 3일 |
2. 제원
표준배수량 | 1,612 t |
만재배수량 | 2,215 t |
전장 | 112.8 m |
전폭 | 10.2m |
흘수 | 4.8m |
추진기관 |
ЛМЗ (레닌그라드 철강공장) ГТЗА-24 기어드 증기 터빈 2기, 고압 보일러 4기 최대출력 50,500 shp |
속도 | 38노트(70 km/h) |
항속거리 | 최고속도로 770 해리, 저속으로 1,670 해리 |
승무원 | 246명 |
무장 |
개장 전 4 × 1 - 130 mm (5.1 in) Б-13 단장주포탑 2 × 1 - 76.2 mm (3.00 in) 34-К 대공포 2 × 1 - 45 mm (1.8 in) 21-К 대공포 2 × 1 - 12.7 mm (0.50 in) ДК 혹은 ДШК 기관총 3 × 2 - 533 mm (21.0 in) 39-Ю 어뢰발사관 기뢰 60-95개 폭뢰 25개 1943년 개장 후 4 × 1 - 130 mm (5.1 in) Б-13 단장주포탑 2 × 1 - 76.2 mm (3.00 in) 34-К 대공포 4 × 1 - 37 mm (1.45 in) 70-К 대공포 2 × 1 - 12.7 mm (0.50 in) ДШК 기관총 2 × 2 - 12.7 mm (0.50 in)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3 × 2 - 533 mm (21.0 in) 39-Ю 어뢰발사관 기뢰 60-95개 폭뢰 25개 |
3. 역사
3.1. 발트해에서 북해로
진수와 취역은 발트함대 소속으로 치렀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취역 직후인 1939년 9월에 시험 항해가 끝나는 대로 북방 함대에 합류하라는 전보를 받고 발트 해를 떠나 백해-발트해 운하를 통해 북상한다.그러나 이 시기는 운하의 수심이 가장 얕을 때라 구축함조차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핀란드와의 전쟁이 임박한 만큼 핀란드 앞을 마음껏 지나다닐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택해야 했다. 흘수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무장은 모두 해체해 육로로 수송했고, 부교, 부표, 심지어 나무 상자 등 뜨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함체에 붙였는데, 이 때문에 그리먀시는 바다에 제대로 나가기도 전에 함체에 수많은 상처가 났다고 한다. 그마저도 부족해 강바닥에 걸리는 사태를 겪기도 했는데, 이 때 그리먀시의 수병들은 바지선에 돌과 쇠사슬 등의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 가라앉힌 뒤, 그리먀시 아래로 집어넣고 돌을 치워서 들어올리고자 했고, 이조차 여의치 않자 다시 돌과 흙을 가져다 임시로 댐을 만들어 수심을 높힘으로써 가까스로 끌어냈다.
수류가 강해 4척의 예인선으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승조원들은 다시 육지로 내려가 밧줄을 주변 나무들에 묶고, 이를 그리먀시의 캡스턴으로 감아올려 전진하는 꾀를 생각해 냈다. 십여 미터를 전진할 때마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수문에 다다라서는 무리없이 운항이 가능했다고 하며, 이곳에서 무장을 다시 장착하고 자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3.2. 대전 전반기
그러나 실제로 그리먀시가 북방함대 소속으로 변경된 것은 1941년의 일이다. 핀란드와의 겨울전쟁 에 동원되어 초계와 수송선 호위를 전전하면서 직접적인 함대전은 겪지 않았다. 1940년 10월부터 1941년 5월까지 그리먀시는 수리에 들어갔고, 이 때 히틀러의 공격 준비도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다.1941년 6월 22일 새벽 1:30, 함대에 경계 1호가 발령되고,[2] 그리먀시는 계획에 따라 바엔가 만으로 대피하여 개전 이틀째에 독일 항공기들을 상대로 대공방어를 실시했다. 8월 중순까지 그리먀시는 바엔가에 머물며 20차례의 공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7월 15일에는 해안포대와 합작으로 폭격기 하나를 격추해 첫 승리를 따낸다.
8월 18일 그리먀시는 대공무장 강화를 위해 무르만스크에 입항하여 첫 개장에 들어간다. 45mm와 37mm 대공포의 교체가 이 때 행해졌다. 한참 개장 중이었던 24일, 독일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그리먀시는 8발의 지근탄을 맞아 대공포대와 거리계, 식수관, 통신장비 등에 손상을 입었으나, 부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적재되어 있던 어뢰도 가스를 충전하지 않아 폭발 위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갑판에 불이 붙어 탄약고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잘못되면 자신들의 함선은 물론이고 시설 전체가 통으로 날아갈 위기에 처하자 승조원들과 장교들, 심지어 함장까지 탄약고 비우기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옷에 불이 붙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탄약을 그리먀시 밖으로 끌어냈으며, 당시 그리먀시의 함장이었던 보리스 니콜라예프 2등함장은 이 때 뜨겁게 달궈진 탄약을 맨손으로 옮기느라 양손에 화상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4일 뒤인 28일, 그리먀시는 개장을 마치고 자매인 그롬키 (Громкий), 오르페이급의 우리츠키 (Урицкий), 쿠이비셰프 (Куйбышев)와 함께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후미에 맞아 대파된 보급함 "마리야 울랴노바 (Мария Улянова)"를 구조하러 달려간다. 1차대전 시절의 낡은 구축함인 우리츠키가 울랴노바를 간신히 견인하게 되어 기동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데다, 독일의 폭격기들이 또 날아와 무려 4시간 동안 이들을 괴롭혔다. 그리먀시는 회피기동과 동시에 대공화망을 펼쳐, 이전까지 급강하폭격기를 상대한 경험이 없었음에도 45mm 대공포로 1대의 Ju 88을 격추하는 성과를 올린다.[3] 이 날 그리먀시는 76mm 55발, 45mm 138발, 37mm 265발, 12.7mm 328발을 소모했다.
상황이 급해진 소련은 3월에 미국이 통과시킨 렌드리스법을 이용해 도움을 받아보고자 했다. 연합군이 생각해낸 소련을 위한 렌드리스 방법은, 아이슬란드나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수송선단을 집결시켜 그린란드 해와 바렌츠 해를 지나 최전선인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에 바로 닿는 항로를 이용하는 보급이었는데, 수송선 1척당 대략 1만 톤의 화물을 적재한다 치면 1척만 해도 중형전차 260대 혹은 트럭 425대가 들어가는 수준이다. 이 정도 물량은 소련 육군의 5개 기갑사단 분량이나 되는데다, 이런 화물선을 10척에서 30척까지 한 선단에 편성하기로 계획하고 있었기에, 선단 하나하나가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피같은 존재였다. 영국에서 소련으로 가는 함대는 PQ, 소련에서 돌아오는 함대는 QP로 코드명이 정해졌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수송선을 어떻게 호위하느냐였다. 당시 소련 북방함대에는 구축함 8척이 수상전투함의 전부였던데다 이것들을 전부 선단호위에 몰빵해 버리기도 부담스러웠으므로, 영국이 순양함과 구축함 몇 척을 지원했고, 소련은 구축함 3-4척 가량을 편성했다. 바로 이 구축함들 중 하나가 그리먀시. 이 때만 해도 독일도 영국이 소련을 이런 식으로 도와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 몇 번의 수송선단은 발각당할 위험을 감수하고도 순조롭게 소련 영토를 찍고 돌아갔다.
3.3. 중반기
하지만 이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해 1942년 봄이 되면서 루프트바페의 뇌격기 대부분이 북쪽으로 작전지를 옮기고, 잠수함이 더 자주 출몰하는 등 독일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대응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북쪽의 낮 길이가 길어지면서 더 긴 시간 동안 넓은 범위에 선단이 노출되게 되었다. 선단들은 뇌격기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며, 낮은 고도로 접근해 오는 뇌격기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리먀시는 대공포는 물론이고 주포까지 동원해 수면에 고폭탄을 쏴 물기둥을 만들어 제압했다.그리먀시를 비롯한 소련 해군의 구축함들은 항속거리 문제로 공해상에서 영국 구축함들로부터 수송선단을 인계받아 소련 영토까지 호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문제는 이후 위급상황에 대응하는 데에 큰 차질을 빚었는데, 1942년 4월 30일, 영국으로 돌아가는 수송선단 QP 11의 기함이었던 타운급 경순양함 HMS 에든버러가 7형 유보트 U-456의 어뢰에 피격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먀시의 호위 하에 긴급수리를 위해 무르만스크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연료가 떨어진 그리먀시는 재보급을 위해 5월 1일 호위대를 떠난다. 다음 날 에든버러에게 합류하려 했는데, 그 때 에든버러는 이미 침몰하고 난 뒤였다.
1942년 7-8월 경 무르만스크에서 잠수함 K-21이 촬영한 그리먀시. |
이후 한동안 그리먀시는 대지포격과 보급을 반복하며 잠시 호위임무에서 빠졌는데, 그리먀시가 참여하지 않은 17번째 수송선단(PQ 17)은 독일의 정찰기에 의해 발각되어 잘 구성된 Ju 88 뇌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선단이 계속 꾸려져 소련으로 향하자 독일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앞으로 소련으로 계속 들어가는 물자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티르피츠까지 꾸역꾸역 올려보내면서 본격적인 함대전의 분위기마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드(순양전함)가 격침된 이후로 독일 군함만 봤다 하면 눈이 뒤집어지는 영국이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함선들까지 불러내 미친개마냥 쫓아가는 바람에 티르피츠를 북해로 보내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여기에다 티르피츠가 북해에 얼씬도 못 하게 하겠다는 각오로 영국 해군과 코만도가 합작으로 프랑스 생나제르 항의 도크를 폭약을 꾹꾹 눌러담아 개조한 구축함 HMS 캠벨타운(Campbeltown)으로 들이받아 통째로 날려 버리면서 북해 근방에서 정비받을 만한 도크가 사라져 티르피츠의 북해에서의 작전능력은 사실상 없어지고 말았다. 이 때 영국이 날뛰지 않았다면 수송선 때려잡으러 올라온 티르피츠를 그리먀시와 자매함들이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 북방 수송선단에게는 독일의 위협도 위협이었지만, 기상조건 자체도 위협적이었다. 한여름에도 기온이 영상 한 자릿수를 찍는데다, 부서진 파도에서 날리는 바닷물이 얼어 온 선체에 달라붙는다. 이것들을 제때 제거하지 못하면 항력이 증가하는 건 둘째치고, 무게중심이 자꾸 올라가 결국에는 함선이 뒤집어지는 불상사까지 생길 수 있었다. 즉 얼음을 제거하는 일 자체가 생사가 달린 문제였고, 수병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북해의 거친 파도를 몸으로 맞아 가면서 얼음을 각종 연장으로 일일이 깨부숴 함선을 유지했다.
북방함대의 마스코트 곰 마샤 (Маша).[4] 1943년 촬영. 뒤로 그리먀시와 자매함들이 보인다. |
이 공적을 인정받아 그리먀시는 소련에 "친위(Гвардия)" 칭호 제도가 생긴 뒤 1943년 5월 16일에 친위함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때 그리먀시는 바엔가의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전선에서의 소식을 목빠지게 기다리던 수병들은 이 예상치 못한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으며, 오밤중에 모두 들고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북방함대 소속 군함들 중 유일하게 수여받은 것이었으며, 이 기록은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5]
친위함 깃발을 수여받고 충성문에 맹세하는 장교들과 수병들. 해군기의 아랫단에 추가된
성 게오르기우스의 리본에 주의. 무릎을 꿇고 충성문을 읽는 장교는 함장 보리스 니콜라예프. 뒤에 서서 거수경례를 하는 세 사람은 왼쪽부터 제1구축대 지휘관 안톤 구린,[6] 북방함대 인민위원회 임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프, 북방함대 참모장 미하일 표도로프. |
Жизнью своей клянемся никогда не отступать перед врагом. Мы готовы принять смерть, но не запятнать честь гвардейского Знамени... За счастье и свободу наших отцов и матерей, жен и детей мы, гвардейцы эскадренного миноносца «Гремящий», пойдем вперед и только вперед, до полного уничтожения врага!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적으로부터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친위의 깃발의 명예를 깨끗이 지키고자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이를 위해, 우리 친위함 그리먀시의 승조원들은 적이 완전히 격파될 때까지 앞으로 또 앞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함장 보리스 니콜라예프의 자서전에 묘사된 그리먀시의 친위 충성문 중 일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적으로부터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친위의 깃발의 명예를 깨끗이 지키고자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아이를 위해, 우리 친위함 그리먀시의 승조원들은 적이 완전히 격파될 때까지 앞으로 또 앞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함장 보리스 니콜라예프의 자서전에 묘사된 그리먀시의 친위 충성문 중 일부
3.4. 대전 후
렌드리스 호위 임무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그리먀시는 계속해서 각종 지상지원과 호위, 적 선단 추적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고, 1944년 12월 그동안 함체에 쌓인 손상을 보수하기 위해 몰로토브스크의 402번 공장에 버려진다. 이후의 행적은 확실하게 남겨진 기록이 없다.3.5. 최후
퇴역 후 1957년에는 OS-5 (ОС-5)로 이름이 바뀌어 실험함이 되었고, 10월 10일, 노바야 제믈랴 주변에서 행해진 핵실험[7]에 자매함 그로즈니(Грозный)와 라즈야룐니(Разъярённый)와 함께 동원되었다. 그로즈니는 폭심으로부터 240미터, 라즈야룐니는 450미터, 그리고 그리먀시는 650미터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로즈니는 폭발로 일어난 파도가 잦아들기 전에 이미 침몰했고, 라즈야룐니는 폭발 4시간 후에 가라앉았지만, 그리먀시는 폭발을 오른쪽으로 받았는데 왼쪽 함수 쪽으로 기운 상태로 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시설은 작동 가능했다고. 6시간 뒤 그리먀시와 라즈야룐니는 얕은 물로 예인되어 모래바닥에 올려졌고, 잠수부들의 조사로 함저는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 확인되어 자침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 버려졌다.그리먀시의 함체는 지금도 수면 위로 남아 있어 위성지도로 확인이 가능하다. 구글 어스 위성사진상의 위치. 작아 보이는 함은 자매인 라즈야룐니이고, 조금 더 큰 것이 그리먀시. 지금도 이 주변은 러시아가 제한구역으로 지정하여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다. 그리먀시 잔해 사진이 인터넷에 자주 돌지 않는 이유.
2018년 러시아의 한 지질학회에서 방문하여 촬영한 그리먀시의 잔해. 주포와 37mm 대공포, 어뢰관 각 하나씩은 분리되어 모스크바의 애국공원 (Парк «Патриот») 에서 복원 후 전시 중이다. |
2021년 초 촬영된 그리먀시와 라즈야룐니의 잔해 |
역사가 되어 함대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리먀시는 소련 해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훈함 중 하나로 기억되었으며, 1982년에는 군함 시리즈 우표 중 하나에 올랐고 1996년에는 러시아 해군 300주년을 기념하는 100루블 주화에 프로젝트 7U형 구축함인 "소브라지텔니(Сообразителный)"와 함께 등장했다. 이 주화에는 깨알같은 고증오류가 있는데, 그리먀시도 7U형마냥 연통을 두 개로 그려 버렸다. 7형인 그리먀시는 연통이 하나였다.
4. 모범함
북방함대 유일의 친위함 타이틀 보유자답게 그리먀시는 함대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숱한 정찰과 포격지원, 호위임무를 거친 북해에서 수행하며 이름난 그리먀시의 장교들과 승조원들은 크게 인정받았고, 초대 함장 안톤 구린이 제1구축대의 지휘관으로 승급되며 보리스 니콜라예프 함장을 그 자리에 앉히자, 보리스는 자신의 일기에 "나처럼 부족한 장교가 이렇게 명예로운 군함을 지휘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가 나를 믿고 이 자리를 맡겨주었으니 있는 힘을 다해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라고 쓰기도 했다. 이후 그리먀시는 제1구축대의 기함 자리를 맡았다.본래 북방함대는 각 수병들에게 단 한 가지의 보직만 가르치고 그것만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리먀시의 승조원들은 모두 그것이 실전과는 거리가 먼 전략이라는 데에 동의했고, 그에 따라 자발적으로 서로 다른 보직을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유사시 서로를 대체할 수 있게끔 대비했다. 이 교육방식은 나중에 함대 전체에 퍼져 아예 교범을 바꿀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리먀시는 함내에 작은 도서관을 구비했다. 백여 권의 책들이 수시로 채워지고 교체되었는데, 거의 교과서나 학술지라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임에도 승조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5-6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전역하고서 한두 학년을 건너뛸 정도로 시험 성적이 뛰었다고.
5. 대중매체에서
전함소녀에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그리먀시(전함소녀) 참조.벽람항로에도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그리먀시(벽람항로) 참조.
월드 오브 워쉽에 가장 먼저 출시된 프리미엄 함선들 중 하나였으며, 최초로 추가된 소련 함선이었다.[8] 월드 오브 워쉽/소련 테크 트리/프리미엄 선박 참조.
6. 참고
"우리는 그리먀시에서 왔다(Мы с «Гремящего»)" - 2등함장 보리스 니콜라예프와 3등함장 표트르 페트루힌의 일기 (러시아어)
[1]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서방에서는 그레먀시치 (Gremyashchy) 라는 기괴한 독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щ를 shch로 풀어쓰다 보니 생긴 폐해. 이를 그대로 수입한 일본에서도 구레먀슈치 (グレミャーシュチ), 구레먀시치 (グレミャーシチイ) 등으로 독음이 정형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독일어는 원어와 비슷하게 그레먀쉬 (Gremjaschij) 라고 부르고 있다. 강세가 없는 е는 "이" 소리에 가깝고, щ는 현대 러시아어에선 얕은 "샤" 소리에 가깝다.
[2]
스탈린은 경계 발령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아래 군함들은 쿠즈네초프의 지휘에 따라 발령을 받았다. 실제로 영토가 공격받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스탈린은 크게 화를 냈지만 해군의 피해가 타군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는 것을 듣고는 칭찬했다고 한다.
[3]
"고작 1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물론 항공기 격추가 주 목표이지만 이 당시의 대공포는 화망을 형성하여 제압하는 효과가 더 컸던데다 수병들의 숙련도도 낮았다. 컴퓨터 따위가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자.
[4]
암컷
불곰으로, 바다에 빠진 녀석을 구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북방함대에서 맡아 키웠으며, 덩치와 달리 하루 2인분만을 먹으며 불만없이 지내 식량수급에 큰 차질을 빚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자연으로 돌려보내졌다.
[5]
나머지 함선들은 대부분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그 외에도 85명에 달하는 수병들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6]
안톤 이오시포비치 구린 (Антон Иосифович Гурин). 그리먀시의 첫 함장이었다. 원래 3등함장 (Капитан 3-го ранга,
소령과 동급) 이었으나, 이후 1등함장 (Капитан 1-го ранга,
대령과 동급) 으로 진급하여 1942년 12월 16일부터 북방함대 제1구축대의 지휘를 맡았다.
[7]
32 킬로톤급 핵폭발을 일으켜 지상 건축물과 선박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목적이었다. 쵸르나야 구바(Чёрная Губа)라는 섬 해안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15미터짜리 탑을 세우고 그 위에 폭탄을 올렸다고 한다.
[8]
초창기에는 미국과 일본 테크 트리밖에 없었기에 유일한 소련 함선인 그리먀시는 클로즈베타 참여권을 담은 프로모션 패키지 3종 중 하나로 등장했었다. 나머지 둘은 일본 경순양함 유바리, 미국 구축함 심즈. 그래서 그리먀시는 함선 ID도 PRSD001로 소련/러시아 첫번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