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하경(夏卿) / 회정(晦亭)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55년 음력 1월 23일[2] |
강원도
고성군 서면 시탄리[3] (현 강원도 고성군 순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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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7년 음력 9월 18일[4] (향년 52세) |
강원도 고성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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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형원은 1855년 1월 23일 강원도 고성군 서면 송탄리(현 고성군 순학리)에서 아버지 권석화(權錫和, 1828 ~ 1909. 11. 5)와 어머니 충주 안씨(忠州 安氏, 1830 ~ 1903. 8. 27)[5]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성군의 향반으로서 고조부 권계만(權啓萬, 1731 ~ 1802. 12. 5)은 1777년( 정조 1) 증광 진사시에 3등 5위로 입격했고, 5대조 권규(權揆, 1706 ~ 1766. 6. 19)는 1756년( 영조 32) 식년 생원시에 3등 55위로 입격했다.그는 1896년 1월 26일 민용호 의병장의 부대가 고성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8명을 포박해 민용호에게 인계하여 참수하도록 한 뒤 그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유진장(留陣將)에 임명된 그는 관군에 맞섰지만 그해 6월 민용호의 의병대가 함경도로 북상했을 때 따라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는 의병 활동을 재개하여 고성군, 간성군, 양양군, 강릉군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수개월간 1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며, 동해 연안 어장을 침탈하던 일본인 어부들을 잡아 처단했다. 그러나 1907년 10월 20일 새벽 의병 350명을 이끌고 고성면을 습격해 5시간동안 일본군 보병51연대 9중대 소속 분견대에게 큰 타격을 입힌 뒤 송탄리 자택에 숨었다가 일본군에게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고성면을 가로지르는 남강의 소나무숲으로 그를 끌고 간 뒤 사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앞서 일본군은 권형원을 후원하던 송탄리 인근의 여러 마을들을 돌며 마을 지도자 12명을 학살했다고 하며, 권형원의 종적을 묻자 겁에 질려 모른다고 대답한 마을 사람 7명을 즉시 참수하고 그 머리를 장터에서 조리돌리고, 또한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곧바로 마을 사람 2명을 사살한 뒤 그 시체를 저잣거리에 끌고 가 가마솥에 넣고 삶아서 익은 뼈와 살을 군중들에게 보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유족과 고성 노인들의 증언 및 구전에 따르면, 일본군은 권형원의 목을 잘라 수비대 본부가 있던 고성군 북쪽 장전항으로 가져간 뒤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고 한다. 이후 두개골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는데, 1930년대 권형원과 14촌 지간인 족제 권증원(權增源, 1905 ~ ?)이 당시 이와테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6] 재학 중에 수학여행으로 어느 신사(神社)에 갔다가 '강원도(江原道) 권형원(權亨源)'의 표식이 있는 두개골을 목격했다. 그러나 얼마 후 권증원이 타계하면서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사후 머리 없이 고성 벌판에 매장되었다가 1936년 묘역이 송탄보통학교 운동장으로 쓰이게 되자 안동 권씨 선산으로 이장되었는데, 이장과정을 지켜본 손자며느리 심소청(沈小淸, 1905 ~ ?)[7]의 증언에 따르면 자손들은 목이 잘린 유골에 종이로 머리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고깔을 씌워 안장했다고 한다. #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