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22:09:41

구본근(농구)

구본근의 수상 및 영예
{{{#!folding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9
(선수)
2007
(매니저)
2010
(매니저)
2013
(사무국 과장)
2014
(사무국 과장)
2015
(사무국 과장)
2019
(사무국 과장)
}}} ||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사무국장
ULSAN HYUNDAI MOBIS PHOEBUS
파일:20220615 구본근.jpg
구본근
具本根
<colbgcolor=#e20e0e> 출생 1975년 4월 17일 ([age(1975-04-17)]세)
대전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5cm| 체중 90kg
직업 농구선수( 센터 / 은퇴)
프런트
본관 능성 구씨[1]
학력 대전동광초등학교 (졸업)
대전동중학교 (전학) 대전중학교 (졸업)
대전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졸업)
프로 입단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10순위, 대전 현대)
현역시절 등번호 14[2], 34[3]
소속 <colbgcolor=#e20e0e> 선수 대전 현대-전주 KCC (1998~2002)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2)[4]
코치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2~2003)
프런트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3~2010 / 매니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2010~2019 / 사무국 과장)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2019~ / 사무국장)

1. 개요2. 선수 생활
2.1. 고교 및 대학 시절2.2. 비운의 선수 시절과 은퇴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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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前 농구 선수. 現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사무국장. 선수 시절에는 전도유망한 센터였으나 아쉽게도 오랫동안 뛰지 못하였다.

2. 선수 생활

2.1. 고교 및 대학 시절

대전중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후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한 구본근은 2, 3학년 때 1년 후배인 조상현, 황성인 등과 함께 돌풍을 이끌며 1993년에 개최된 협회장기 우승과 MVP에 올려 놓은 덕분에 차세대 센터로 낙점받게 되어 연세대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 첫해인 1994년에는 대표팀에 차출된 서장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94 대학농구연맹전 2차대회에 선발 센터로 출전하였으나, 선배 이상민의 국대차출과 우지원의 부상 등 다른 주전들의 공백이 너무 컸던 탓에 조별예선리그에서 건국대학교 한양대학교에 각각 대패하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주전들이 복귀하면서 1994-95 농구대잔치부터는 서장훈의 백업 또는 4번 포지션의 로테이션 멤버로 주로 출장하였는데,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3점슛을 쏠 정도로 슛거리가 길었고 노마크 찬스에선 덩크슛을 가볍게 꽂을 정도로 탄력이 좋아 여느 실업팀의 노장센터들보다 훨씬 나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연세대가 2년 연속으로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전승을 달성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팀은 예선리그 8위팀 삼성전자와 맞붙은 8강전에서 삼성전자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와 심판의 묵인까지 더해지며 1승 2패로 역전패, 8강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특히 선배들의 폭력이 가장 심했던 8강 3차전에서, 전반중반 서장훈이 상관타를 맞아 실려나간 뒤 신입생 센터로서 상대팀 센터들( 이창수, 박상관, 강을준 등)을 맞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은 결국 패했고, 골밑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무리한 모습을 보이더니 경기가 끝난 직후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산소 마스크를 쓴 채 응급실로 실려가고 말았다.

자신의 고향인 대전에서 몸을 추스르며 2학년 상반기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자 6월에 열린 1995 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부터 복귀, 미국 유학을 떠난 서장훈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고, 연세대가 당시 최강팀 고려대에 이어 2인자 자리를 지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도 우지원- 김훈- 조상현 등 3점슈터 군단이던 연세대를 정규리그 3위까지 오르는데 기여했다. 덕분에 3학년 때는 95-96 농구대잔치 올스타전 대학선발팀으로 출전하기도 했고, 22세 이하 농구 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1996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한 서장훈이 돌아오면서 다시 로테이션 빅맨으로 돌아가 연세대가 96-97, 97-98 농구대잔치를 연이어 제패하는데 기여하지만, 이 시절 완벽한 파이터 수비수로 거듭난 김택훈과의 주전경쟁에서 살짝 밀리며 출장시간이 줄어든다. 그래도 대학레벨에선 상위급 센터로 인정받아 졸업해이자 4학년이던 1997년 멜버른에서 열린 FIBA U-22 선수권대회 대표팀 센터로 선발. 동기인 황성인, 조상현, 김택훈 등과 같이 출전하기도 했다.

2.2. 비운의 선수 시절과 은퇴

파일:1998-99시즌 통합 우승 당시의 현대 멤버들.jpg
파일:KCC 구본근.jpg
대학 생활을 마친 뒤, 1998년 KBL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10순위로 대전 현대의 지명을 받았지만, -- 트리오 및 외국인 선수 조니 맥도웰이 전성기를 달리던 팀에서 마른 체형에 내구성이 떨어지는지라 전혀 도움되지 못하고 4년간[5] 벤치를 달구기만 했다(...). 그나마 1999년 현대와 북한 국가대표 간의 친선경기(일명 '통일농구대회')에서 조미관계 때문에 외국인 선수 2명이 불참하자 대신 선발출장 기회를 잡았으나, 자신의 신체사이즈보다 약 30cm 크고 30kg 무거운 북한의 리명훈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5반칙 퇴장 당했다(...).

파일:모비스 구본근 코치.jpg
2002년에는 연세대학교 시절의 은사이기도 한 최희암 감독의 부름을 받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3:3 트레이드[6]되었으나, 시즌 개막 전 대전고-연세대 직계선배인 박승일 코치가 루게릭병에 걸려 사퇴하자 최희암 감독의 코치 승격 제의를 받고 은퇴한다.[7] 그 후 팀 매니저, 팀 사무국 과장을 거쳐 현재는 사무국장으로 근무 중이다.

3. 관련 문서



[1] 본(本)자 돌림항렬 구본승이랑 동항렬이다. [2] 1998~2000 현대 시절 [3] 2000~2002 현대 및 KCC 시절 [4] 트레이드 후 시즌 시작 전 은퇴했는데, 자세한건 아래 항목 참조. [5] 전주 KCC 이지스 시절도 포함. [6] 울산 모비스 get: 구본근, 김태진, 이상영 ↔ 전주 KCC get: 표명일, 김동언, 송태영 [7] 당시 나이가 만 27세였으며 이는 KBL 최연소 코치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