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2:30:07

박승일(농구)

박승일의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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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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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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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박승일[1]
朴勝一
출생 1971년 5월 30일
대전광역시
사망 2024년 9월 25일 (향년 53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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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202cm
학력 서대전초등학교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대전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체육학 / 학사)
경력 선수 연세대학교 농구단(1991~ 1993)
기아자동차 농구단(1994~ 1997)
한국사회체육센터 코치 (1996~1997)
지도자 프로보고등학교 코치 (2001~2002)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코치(2002)
종교 개신교[2]
링크 승일희망재단

1. 개요2. 생애3. 루게릭병 발병
3.1. 사망
4. 연예인들과의 만남5. 저서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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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코치, 사회운동가.

1998년까지 연세대학교, 기아자동차 농구단 등에서 활동했고 2002년에는 역대 최연소 프로농구 코치로 선임되었으나, 코치 부임 직후 루게릭병이 발병하여 2024년에 사망할 때까지 투병했다. 발병 이후에는 루게릭병 홍보대사 및 승일희망재단 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사실상 대한민국에 루게릭병이라는 난치병을 알린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2. 생애

서대전초등학교 4학년 때 큰 키 덕에 농구부로 발탁되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농구를 잠시 접었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해 대성중학교에서 대전중학교로 전학가면서 다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키는 컸지만 체력이 딸려서 아주 힘들어했다고. 건강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했다.

그 후 대전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농구부를 거쳐 1994년 기아자동차 농구단에 입단했으나, 기아 농구단은 국가대표 트윈타워인 김유택- 한기범에 같은 학번 최고의 센터였던 조동기까지 무려 세 명의 전/현직 국가대표 센터가 버티고 있었고, 선수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1998년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농구 지도자의 꿈을 안고 미국 그레이엄 대학에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2년간의 유학생활을 하였다. 그레이엄 대학 수료 후에는 미국 유타주 프로보 고등학교에서 잠시 코치직을 맡았었다. 어떻게 보면 첫 지도자 커리어인 셈. 프로보 고등학교 코치 재직 중 최희암 당시 모비스 감독의 제안을 받고 귀국했고, 2002년 4월 21일 마침내 만 31세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코치로 선임되었다.[3] 또한 역대 최장신 코치(202cm), 또 최단기간 코치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박승일은 지도자로서의 앞날만 꿈꾸고 있었다.

3. 루게릭병 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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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후의 모습.
옆에서 글자판을 짚어주고 있는 사람은 2세 연하의 여자친구 김중현 씨.
코치로 선임된 얼마 되지도 않은 2002년 5월,[4]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에서 루게릭병을 진단받는다. 이미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인 2001년 말부터 증상이 시작되었고, 코치로 선임된 이후에 증상이 악화됐다고 한다. 원래는 코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처음에는 구단에 알리지 않고 본인도 해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증상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사임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5] 코치직에서 물러나기 전 모비스 오토몬스 홈페이지에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희망과 응원을 달라는 긴 장문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2002년 7월 26일 정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승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고, 팔과 다리 등 온몸이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6] 발병 4개월 쯤 후에는 왼손이 마비되었고 9~10개월 쯤부터는 오른손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루게릭병 환우들의 어려움과 정부의 허술한 대책 등을 알고 루게릭병 환우 돕기 운동을 시작, 2002~ 2003 시즌 모비스 선수들의 3점 슛, 리바운드가 1개씩 성공할 때마다 10,000원씩을 모으기로 하였고, 팀이 승리할 때마다 10만 원씩 루게릭병 환우들을 위해 기부하는 정책을 실현하고, 선수들[7] 에게도 루게릭병 환우 돕기 운동을 펼치고 다음에 카페를 개설해 루게릭병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2003년에는 한국루게릭병협회 루게릭 홍보대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처음 루게릭병협회와 인연을 맺고 방송 출연을 시작할 당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본인도 건강이 안 좋았는데 대외활동까지 하게 되면 병이 더 심하게 악화될까 걱정했다고. 그러나 박승일이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직업이라며 강력하게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어머니도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어머니의 좋지 않은 마음은 여전해서, 아직 대외 활동이 가능하던 시절 출연한 방송에서 어머니와 가끔 다투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병 11개월만에 휠체어를 타야 했고, 발병 20개월 후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2004년 7월경부터는 호흡 근육까지 마비되어서 결론적으로 기도를 절개하고 호흡기를 달게 됨으로써 말을 못하게 되었다.[8][9] 하지만 박승일은 유일하게 움직이는 두 눈동자로 안구 마우스컴퓨터를 사용,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 를 출간하고 여러 활동을 하는 등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동자 근육이 점점 마비되면서 결국 안구 마우스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글자판으로 소통하였다고 한다.[10]

3.1. 사망

2024년 9월 25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5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신의 소망이었던 루게릭병 요양병원의 착공을 본 뒤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승일희망재단 관계자는 “박승일 대표께서는 루게릭요양병원 건립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환우도 중요하지만 환우를 돌보는 의료진과 간병인 등 직원들의 근무환경을 위해서 공기 청정기를 꼭 설치해달라”고 요청하는 등 설계 건축 과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전달해 왔으며, “2023년 12월 착공식에는 엠블런스를 타고 참석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셨다. 이미 그 꿈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늘 감사해왔다”고 전했다. 요양병원 착공식에 참석했을 때 '이제 해방이네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

4. 연예인들과의 만남

그룹 지누션의 멤버 , 소녀시대 전 멤버[11], 가수 양동근, 방송인 송은이 등 많은 연예인들이 박승일의 뜻에 동참했다.

타이거 JK는 박승일을 응원하기 위하여 '희망승일: 행복의 조건' 이라는 앨범을 만들었다. 타이틀 곡 '행복의 조건' 은 가사가 박승일을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냥노창의 앨범 '기억시옷'의 트랙 '나는 살아'는 노창이 박승일 코치에게 바치는 곡임을 밝혔다. 작업 과정에서 그의 가족들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친한 절친으로는 미국인 방송인 김미남(본명: 폴 제임스 로저스)이 있었다. 1990년 연세대학교 시절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형동생으로 지내왔었다. 1999년 박승일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던 당시 자신의 집에서 몇 주 머물게 해주기도 했고, 이후 유학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승일이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김미남이었다. 2005년 12월 김미화의 U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미남이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살펴보는데 ALS 사이트가 띄워져 있었고, 처음에는 박승일의 부모님이 병에 걸린 줄 알고 있다가 박승일이 자신이 걸렸으며 미국에서부터 의사가 ALS 의심군이라고 진단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5. 저서

  • 희망을 전하는 거인 (대현문화사, 2003)
  • 눈으로 희망을 쓰다 (웅진지식하우스, 2009)

6. 여담

  • 그의 어머니가 가장 아들을 보고 비통해했던 순간은 아들이 마비 되어가는 식도와 목 근육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식사하려는 모습을 바라 보았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저를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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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거동이 가능했던 시절 집안에서는 항상 실켓면사 소재의 고급 반팔러닝을 입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었다.
  • 선수 은퇴 후 아내와 결혼했으나, 루게릭병이 발병한 뒤인 2003년 1월 합의이혼했다.

7. 관련 문서



[1] 프로필 사진은 루게릭병 투병 전의 모습. 2002년 모비스의 코치로 선임되었을 때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진단만 안 받았을 뿐, 이미 2001년 말부터 루게릭병 의심 증세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2] # [3] 이 기록은 그가 루게릭병 선고를 받고 코치직을 그만둔 뒤 만 27세의 구본근 선수가 코치로 승격되면서 깨졌다. [4] 본인 인터뷰로는 웨이트 트레이닝 때 근육이 훅 빠지거나 손가락을 잘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본인은 피로 때문인지 이 병인지는 잘 몰랐다고. [5] 루게릭병 증상이 결정적으로 심해진 계기는 전 부인과 백화점에 가서 주차를 하기 위해 운전을 하려는데, 운전대에 왼팔이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6] 루게릭병 발병 선고를 받았을 때 집에 가서 엄청나게 울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시기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농구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서, 한 때는 농구에 관한 모든 걸 집 안에서 치워버리고 농구 경기조차 관람하거나 시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7] 양동근, 함지훈이 가장 많이 협조했다. [8] 루게릭병 환자들은 대부분 발병 1년 내에 걷는 게 불가능해지고, 발병 2년 후에는 자발호흡, 대화를 할 수 없게 된다. 호흡기를 단 뒤에는 폐렴으로 대부분 4~5년안에 사망한다. [9] 2004년 초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어눌하게 말도 하고 죽이나 간식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5월 경부터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성대 근육이 마비되고 목 근육도 마비되어 식사도, 말도 못했었다고 한다. [10] 한 글자를 짚어주면 맞는 글자면 눈을 미세하게 깜빡이는 방식. 그러다보니 한 마디에 30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11] 거의 모든 멤버가 박승일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