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곽헌(郭憲)·곽송원(郭松園, 郭松圓)·곽석귀(郭錫貴) |
자 | 사평(士平) |
본관 | 선산 곽씨[1] |
출생 | 1891년 11월 16일 |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 백지리 (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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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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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곽중선은 그의 막내 동생이다.
2. 생애
곽중규는 1891년 11월 16일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곽준희와 어머니 진산 진씨(珍山 陳氏) 진순애(陳順愛)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1907년경 장운식(張雲植) 의병장의 부장이 되어 군수품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1909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6월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곽중규는 이런 아버지로부터 민족의식을 전수받았고, 1909년 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서울로 상경한 그는 만국성서연구회에서 성서 보급을 위한 업무에 종사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1916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영동에 대서소를 개업하여 문자를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와줬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동생 곽중선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고민하던 그는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가려 했지만 여권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상하이로 방향을 돌렸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1922년 3월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했으며,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1924년 5월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에 헌신했으며,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어 제13회 의정원 회의에서 강창제, 나창헌, 최석순과 함께 이승만 임시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되었다. 탄핵안은 3월 18일 가결되고 이를 다시 심판에 부치기로 결정하여 심판위원장에 나창헌이 선출되고 곽중규를 비롯하여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직을 결정하고 3월 23일 회의에서 이를 발표하는 동시에 후임 대통령선거를 수행해 국무총리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26년, 곽중규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하비로 307호에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했다. 1927년 10월에는 상해교민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1929년까지 활동했다. 그리고 1927년 말부터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겸 유호독립운동자동맹(留·獨立運動者同盟)의 집행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방침을 토론하자는 의견을 제출했고 여러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192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 내로 이사한 곽중규는 그의 경험을 살려 성광(星光)사진관을 개업한 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의 비밀장소로 제공했다. 1931년 9월 윤봉길을 사진관이 있는 건물에 은신하게 했으며, 동생 곽중선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
193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일경의 검색이 극심해지자 이를 피하여 난징, 한커우 등지를 경유하여 충칭으로 가 머무르다 1933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그해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한 그는 톈진에 있는 첫째 남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동생 곽중선이 상하이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하이로 가지 못하고 1938년 중국 스자좡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상애의원(相愛醫院)을 개업하는 한편, 지하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5년 8.15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두절되었고, 1950년 9월 10일자로 사망신고 처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곽중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