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17:27:17

공자식인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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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실상

1. 개요

공자 인육으로 담근 젓갈 즐겨 먹었다는 도시전설.

2. 배경

공자의 제자 자로 위나라에서 벼슬할 때 변란이 일어났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복잡하다. 너무도 음탕했던 자신의 모친을 죽이려했던 태자 괴외가 실패하여 망명을 하고, 괴외의 아들이 군주(위출공)가 되어 아버지를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고, 괴외는 자신의 누나를 위나라 대신에게 시집을 보내 돌파구를 찾는데 이 누나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잘생긴 노비와 간통하고, 그의 아들 공회는 못마땅해하지만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 괴외는 위나라로 돌아와 자신의 아들을 내쫓고 군주(위장공)가 된 그런 이야기다.

자로가 괴외의 조카인 공회를 섬기고 있을 때 공회는 괴외에 의해 붙잡혀있는 상황이었다. 자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공회를 구출하려 하자 괴외는 뛰어난 무사 두 명을 자로에게 보냈다. 이미 자로는 늙은 몸이라 이겨낼 수 없었으며 얼굴에 칼을 맞아 갓끈이 끊어져 갓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갓을 다시 쓰고 정좌했고, 무사들은 자로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를 살해했으며 괴외는 그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해(醢)로 만들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통곡을 하며 집안의 '해' 단지를 모두 엎어버리고 집 안을 서성거리다가 쓰러진 다음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3. 실상

한 마디로 공자가 자신의 애제자인 자로가 정쟁에 휘말려 해(), 즉 젓갈이 되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고 이를 들은 공자는 탄식하며 제자가 맞이한 최후를 상기시키기 때문인지 집 안의 해(젓갈)를 몽땅 내다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공자는 인육젓갈을 즐겨 먹었는데 제자가 인육젓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뚝 끊었다'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해()는 젓갈이라는 뜻밖에 없다. '고기나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보존발효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로가 소금에 절여져 젓갈 신세가 되었다고 해서 온 세상의 젓갈을 다 인육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당장 해(醢)란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백 차례 나오며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오늘날도 먹는 전통 한국 요리 중에는 식해(食醢)가 있다. '식해라니 인육젓갈을 먹는다는 뜻이냐?' 라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송 시기 '시장에서 인육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석한 이야기들도 사실은 '젓갈을 팔았다'라는 구절을 오독한 것이다.

사실 사람의 시신을 소금에 절이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당장 고대에는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적군 장수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후방으로 보내기도 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의 두 후궁을 어머니의 원수라 여겨 죽인 뒤 젓갈로 담가서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한 여후도 인간젓갈 기술을 시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당연하지만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끔찍하며 무도한 행위로 여겨졌으며, 대상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이나 철저히 실용적인 필요(전공 확인)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예외 사례를 확대 해석해서 '젓갈이라고 먹은 게 다 인육 아니냐'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없는 난장짓에 불과하다.

인간을 사용한 XXX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이야기는 맹자에 나와있다. 양혜왕 편의 맹자가 혜왕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서,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삼대가 멸할 것이다.'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정말 사람을 묻어버리는 순장도 아니고, 그저 공양용으로 따로 만든 사람 비슷한 물체를 사용하는 행위조차, 그 근간에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행위'라는 사상이 아직 존재한다고 느껴 경계했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식인을 했으리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오히려 평범한 젓갈을 봐도 젓갈처럼 소금에 절여진 제자가 생각나 모두 내버릴 정도였는데.

이를 확대재생산한 '중국의 식인풍속사'라는 친일 대만인의 글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대만 사람이 중국~중화권을 까기 위해서 일본에서 편찬한 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엽기적인 식인드립들은 대부분 저기서 나왔다. 유비가 식인을 즐겼네 어쩌네 하는 글도 이것이 기원. 그런데, 저 <중국의 식인문화>라는 책은 황원슝[1]이란 대만인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은 혐중(물론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혐오) 성향이 짙으며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자이다. 이 링크를 타고 황원슝이 어떤 똘아이인지 보고 평가하도록 하자. 황문웅의 저서인 <중국의 식인문화> 반박 덧붙여 황원슝은 일본에서 활동하며 식인이 중국의 전통문화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중국인을 비하하는 데 앞장서는 인물이다.[2][3] 철저하게 대만 친일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 그나마도 더 기원을 파고 들자면 일본 제국 시기의 쿠와바라 지츠조라는 일본의 중국학교수가 저술한 <지나의 식인육풍습>(circa 1927)[4]이라는 일련의 논문들이 있는데, 결국 황원슝도 이 논문들을 참조해서 현대에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일본 제국의 만선사관을 부화뇌동하여 고구려를 만주족의 역사라고 하는 등 동북공정과 유사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다.

유교 사대주의를 까기 바쁜 몇몇 서적에서는 이걸 사실인 것처럼 써놓기도 했다. <전통과 중국인>이라던가.

사족으로 저 책에서 얘기하는 식인 기록이란 것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아주 드물게 대기근이 들었을때 등장하며, 이는 어느 나라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적이고 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났을 때에만 나타나는 일이다.

프리한 19 2022년 7월 4일 '괴담, 진실을 알려주마 19'에서 소개되었다.

'100가지 상상이 만든 엉뚱한 이야기'라는 어린이 책에는 공자식인설과 중국의 식인풍속에 대한 뜬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쓰여있다.


[1] 그런데 대만에 동명이인이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여기 나온 사람은 따로 작가라고 언급된다. 헷갈리지 않도록. [2] 근데 애초에 중화민국이 아무리 중국을 싫어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중국이지 중화민국인이라도 원주민이 아닌 한 어쨌든 그 조상은 중국 본토에 살았을 것이고, 더욱이 공자의 후손은 대만에서 대접받으며 살고 있으니 이자가 한 짓은 아주 웃기지도 않는 헛짓거리일 뿐이다. [3] 그리고 이 인간이 쓴 책에는 ' 납치가 한국의 전통 문화'란 말도 나온다. 그나마 보쌈이라고 둘러대면 그렇다 치더라도 이 사람은 한반도의 일제강점기도 정의로운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난징 대학살, 위안부 사건 등도 모두 조작이라고 떠드는 자다. [4] 1919년, 1923년에도 같은 제목의 관련논문을 저술한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