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孔吉생몰년도 미상
조선 연산군 때의 광대. 조선왕조실록에서 딱 한 번 언급된다.
2. 생애
공길은 궁궐에서 늙은 선비를 흉내내는 놀이를 하다가 '전하는 요, 순과 같은 임금이시고 저는 고요와 같은 신하인데, 요순은 항상 나오시는 성군이 아니지만 고요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신하입니다'라고 연산군을 띄워주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 논어 구절 중 하나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란 말을 했다.[1] 이를 자신이 임금답지 못하다고 놀리는 것으로 간주한 연산군은 공길에게 불경한 죄를 물어 곤장을 때린 후 귀양을 보냈다.실록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고 그는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왕의 남자 홍보 팜플렛에서는 이 기록을 한 줄로 요약해 적으면서 "배우 공길이 '왕이 왕 같지 않으니 쌀이 쌀 같지 않다'고 말했다가 참수되었다''라고 써 놓았다(...)
하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고 신세 망친 대표적인 예로, 아니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 인물을 다룬 이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부풀리고 부풀려서 결국 연극 < 이>가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이준익 감독은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들었다. 대장금과 비슷한 사례.
KBS 스페셜에서는 그를 무용가 공옥진 여사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설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작 족보 연구가들은
[1]
이는 공자가 한 군군신신부부자자와 많이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