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8:48:46

고석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67년
충청도 은진현 상두면 강청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강청리)[1]
사망 1937년 7월 19일[2]
충청남도 서천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226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7년 충청도 은진현 상두면 강청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강청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전라도 임피현 서사면 외산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구암교회 부속 멜볼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김병수(金炳洙)는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 200장을 들고 고향에 내려가 곧 있을 3.1 운동에 호응해 만세시위를 일으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병수는 당일 기차를 타고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에 갔고, 스승인 박연세(朴淵世)를 만나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위 사실을 알렸다. 이어 박연세로부터 영명학교 및 구암교회 부속 멜볼딘여학교의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이때 고석주는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烈)· 김수영(金洙榮) 등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고, 이들은 군산부 옥구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오는 3월 6일 군산부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런 다음 이들은 같은 교회 소속의 구암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무원들을 만나 만세시위에 동참하도록 권유했는데, 이때 송기주 또한 동료들과 함께 권유를 받아들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구암교회 신자들과 영명학교 및 멜볼딘여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를 권유하고, 영명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해 비밀리에 기미독립선언서 7천여매를 인쇄하고 학생들을 동원해 손수 태극기를 제작해 군산부내 각 교회 등에 배포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당시 만세시위에 미리 호응한 인물들
-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교사들
박연세(朴淵世)· 이두열(李斗烈)· 김수영(金洙榮)· 김윤실(金允實)· 송정헌(宋正憲)[3]· 고석주(高錫柱)·이동욱(李東旭)
- 군산 구암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 김창윤(金昌允)· 이진규(李眞奎)[4]· 유한종(劉漢鍾)[5]·이준명(李俊明)· 임병률(林秉律)[6]· 이재근(李在根)·홍의일(洪義日)· 양성도(楊成道)[7]· 송기주(宋基周)·김준실(金俊實)· 안경태(安敬泰) 등
- 군산부 거주 예수교 신자
김성은(金聖恩)·이(李)◯◯·홍종옥(洪鍾玉)· 유희순(兪熙淳)[8]· 임종우(林鍾祐) 등
- 영명학교 학생
양기철·전세종· 김영후(金永厚)· 송기옥(宋基玉)·이도준· 홍천경(洪天敬)[9]·고준상· 유복섭(劉福燮)· 오한길(吳漢吉)· 강규언(姜圭彦)· 강인성(姜仁聲) 등

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 5일, 거사계획이 사전에 이미 발각되어 고석주는 이두열을 비롯한 교사들, 여러 학생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이에 영명학교 교사 김윤실(金允實)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회의가 끝난 뒤에 즉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회의가 끝나자 영명학교 학생들이 앞장서고 멜볼딘여학교의 여학생들이 대열에 합류했으며, 옥구군에서 군산부내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했다. 시위 도중에 기독교 신도들과 행진을 하며 거쳐 가는 마을의 주민들, 군산공립보통학교(현 군산중앙초등학교) 학생들, 그리고 군산부민들까지 참여해 시위대는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미독립선언서와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배부해주었다.

시위대는 군산부 명치정1정목(현 군산시 중앙로1가)[10] 군산경찰서에까지 이르러 전날 체포된 교사·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황한 일본 경찰들은 익산군 익산면 이리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지원 요청을 했고, 이에 출동해서야 가까스로 시위가 진압되어 주도자들을 검속하고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고석주는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상고까지 했다. 그러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민족운동에 투신했고, 이후 충청남도 서천군에 교회를 개척해 계몽운동 및 농촌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37년 7월 19일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7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1919년 수형인명부에는 '전북 논산군 은진면 강청리'가 출생지,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는 주소지로 기재되어 있다. [2] 대전현충원묘적부 참조. [3]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宋憲으로 기재되어 있다. [4]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李鎭圭로 기재되어 있다. [5]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류한용(柳漢鎔)으로 기재되어 있다. [6]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임병렬(林秉烈)로 기재되어 있다. [7]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成道로 기재되어 있다. [8] 김희순(金熙淳)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27일 작성된 박연세 공판시말서(지방법원등사분)에 새롭게 나타난다. [9]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홍원경(洪元敬)으로 기재되어 있고, 군산 구암병원 사무원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