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이천(二千) / 석봉(石峰) |
본관 | 제주 고씨[2] |
출생 | 1894년 11월 15일 |
경상도
진해현 서면 일암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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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0년 11월 15일 |
경상남도 창원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65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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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11대손이며, 고경명의 장남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의 10대손이다. 독립유공자 고앙주는 그의 남동생이다.
2. 생애
1897년 11월 24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일암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에서 아버지 고제칠(高濟七, 1855 ~ ?. 10 .1)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 ~ ?. 5. 26) 변덕윤(卞德潤)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전라도 광주목에 세거해왔으나, 6대조 고한창(高漢昌)이 동생 고한현(高漢賢)·고한일(高漢日)과 함께 10대조 고종후(高從厚)[3]의 묘소가 있던 경상도 진주목 양전면 발산리(현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로 이주해왔고, 뒤에 고한창이 재차 진해현 서면 일암리로 이주해와서 7대째 세거하게 되었다.[4]그는 1920년대 초 경상남도 부산부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1919년 창원 지역의 3.1 운동 당시 동생 고앙주가 일본군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한 것이 그의 결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포섭한 뒤 1922년 4월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과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같은 달 22일 권총을 휴대하고 동래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 등을 전전하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이후 1980년 11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5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